149화
“아아악!”
이오나 남작은 부인이 그 몰골이 되는 것을 보면서도 눈만 둥그렇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르사크는 입가가 피범벅이 된 채 악다구니를 쓰며 발광하는 체첼리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로즈안나의 발밑에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로즈안나에게 잘못을 빌어라.”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악! 나… 나는 남작 부인입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수모를! 폐하! 폐하!”
아르사크는 체첼리카의 머리채를 다시 움켜쥔 채 그녀의 목을 뒤로 휙 꺾었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또렷하게, 근처의 모두가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황후인 내 말을 한 번 거역했고, 내가 허락하기 전에 함부로 떠드는 무례를 저질렀지. 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하지 않았고, 나의 가장 가까운 시녀를 모욕했다. 로즈안나를 모욕한다는 것은 곧 나를 모욕하는 것이다.”
체첼리카가 뺨을 맞은 것은 그런 이유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만은 알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자신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체첼리카를 그토록 험하게 다룬 것이 아니었다. 이유가 있다면, 오로지 로즈안나 때문이다.
“그러니 폐하는 널 구해주지 않으신다. 폐하께서 구해주시지 않는다면, 여기 있는 누구도 너를 구할 수 없음을 잘 알 테지. 그러나 네 목숨을 쥐고 있는 사람은 폐하도 아니고, 하물며 나도 아니다.”
마지막 말은 무슨 뜻일까? 체첼리카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공포에 질린 시선은 한순간 운트겔 부부 쪽을 향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도 이 상황에, 아르사크의 인정도 이해도 없는 징벌에 놀라고 있을 뿐이었다.
아르사크는 체첼리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이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체첼리카 이오나, 여기서 네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로즈안나뿐이다.”
“그, 그, 그게 무슨……! 그게 무슨 소리야! 아악, 난 잘못한 게 없어! 저… 저 혼자서 뛰쳐나갔다가 저 꼴이 된 걸 왜 나에게……!”
아르사크는 움켜쥐고 있던 머리채를 더욱 거칠게 당겼다. 마치 체첼리카가 지난 밤 로즈안나에게 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받기라도 하는 풍경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체첼리카와 로즈안나밖에 없었지만.
“떠들기를 좋아하는 모양인데, 한 번만 더 내 허락 없이 입을 놀리면 그 혀뿌리를 지져버리겠어. 로즈안나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라. 로즈가 너를 용서한다면, 나도 너를 용서하지. 그러나 로즈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때, 모두의 시선은 아르사크가 아니라 로즈안나와 체첼리카를 향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네가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게 만들어 줄 것이다.”
116장 극의 전주곡 (7)
체첼리카는 피투성이가 된 채 부어오른 얼굴을 들어 에리히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르사크의 말대로, 에리히는 이 사태를 해결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체첼리카는 엉망이 된 흰 드레스를 입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로즈안나와 눈이 마주쳤다. 로즈안나는 이 상황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두려움에 질린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체첼리카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눈빛이 싫었다. 천한 것들의 징그럽고 비굴한 표정. 자신처럼 고귀한 자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라도 핥아먹고 싶어 안달을 하면서도, 주제넘는 앙심 따위나 품는 것들.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이복 여동생, 실리케도 그랬다. 체첼리카가 신경질을 부리면 늘 겁먹은 하녀들과 똑같은 표정으로 눈치를 보았고, 체첼리카가 변덕스럽게 잘 대해주는 날이면 머저리처럼 헤실헤실 웃다가 시건방지게 굴곤 했다.
체첼리카가 가지고 있는 인형을 자기도 갖고 싶다고 말한다거나, 체첼리카의 브로치나 팔찌 따위를 만져보고 싶다고 졸랐다.
처음부터 실리케를 동생으로도, 같은 사람으로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체첼리카에게 실리케의 그런 행동은 괘씸하고 은혜를 모르는 짓일 뿐이었다.
“너는…….”
피 묻고 뒤틀린 입술이 들썩인다. 로즈안나는 반사적으로 흠칫 물러설 뻔했으나 아르사크의 얼굴을 보면서 필사적으로 두려움을 참았다. 체첼리카의 신경질적인 눈매가 삐죽하게 치솟는가 싶더니, 몸 전체가 분노로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
“너같이 더러운 것을 죽이지 않고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황궁에서 살다 보니 네가 무슨 황녀라도 되는 줄 알았던 거야? 천만에! 너를 낳은 그 더러운 계집과 너는 똑같이 닮았지! 둘 다 천박하고 상스러운 것들! 네가 어떤 더러운 짓거리로 태어나게 됐는지 전부……!”
“그만.”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체첼리카가 몸부림을 치듯 발악하는 모습에 기가 질려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난 에리히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단상 옆으로 마련된 작은 계단을 따라 걸어 내려온 에리히의 표정은 냉랭했지만, 한편으로는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는 듯했다.
“체첼리카 이오나.”
에리히가 입을 열자, 무서울 게 없다는 듯이 떠들던 체첼리카도 차마 더는 악다구니를 쓰지 못했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얼굴은 피와 멍투성이, 얼룩덜룩하게 상기된 목덜미를 내려다보던 에리히는 미간을 가볍게 좁히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로즈안나의 출생에 대한 것을 누구에게 들었지?”
체첼리카는 말문이 막혀 에리히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남편인 드로스 이오나를 돌아보았다.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실리케는 산고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날의 광경을 먼지 한 톨 놓치지 않고 똑똑히 기억했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드로스 이오나가 꼴사나울 정도로 울며 하소연하던 것, 그 모습을 몇 번이나 짓밟아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죽어가는 실리케의 목을 졸라 실리케도, 아직 나오지도 않은 아이도 전부 죽여버리고 싶었다.
“드로스 이오나.”
에리히는 체첼리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번에는 그녀의 남편인 드로스를 불렀다. 그런데 그는 에리히가 체첼리카에게 출생 운운하는 질문을 한 순간부터 곧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에리히는 잠깐의 사이를 두고 드로스 이오나를 바라보았다. 개구리처럼 툭 불거진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과거에 네가 너의 아내와 처부(妻父) 앞에서 말했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지금 여기서 바른대로 말해라.”
로즈안나는 놀라서 헉,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체첼리카는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껍질만 남은 것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 사실을 에리히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런 것은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에리히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재촉이나 호통보다 침묵이 더 무서웠다.
“사, 모, 모두, 모두… 사, 사실, 사실입… 입니다.”
“체첼리카 이오나의 여동생이 너에게 술을 먹이고, 의식이 없던 너와 억지로 관계를 맺은 것이 사실이란 말이지?”
뜻밖의 내용에 모두가 낮은 비명을 질렀다. 테오도르의 부모님조차도 생전 처음 듣는 사실에 놀라 일어났다.
그러나 드로스 이오나의 떨림은 더 심해져 있었고, 에리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르사크가 에리히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하객들의 뒤쪽에서 마차 한 대가 멈추었다. 이런 상황에 대체 누가 온 것인가. 사람들의 시선이 마차를 향한 순간, 로즈안나가 조그맣게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도, 도로테아 고모님…….”
“로즈안나!”
마차에서 내린 부인은 식장의 분위기에 한 번 놀라고, 엉망진창이 된 로즈안나와 체첼리카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로즈안나에게 달려온 그녀는 로즈안나를 황궁으로 데리고 왔던 도로테아였다. 에리히는 그녀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여전히 드로스 이오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도로테아 아즈나이즈, 그대가 말해보라. 드로스 이오나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체첼리카 이오나의 여동생이 언니의 남편을 속여 로즈안나를 임신한 것이 맞는가?”
“무슨 말씀을……! 그건 아닙니다, 폐하! 절대로요!”
도로테아는 그제야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았다. 체첼리카는 가느다란 눈을 더 이상 치뜰 수 없을 만큼 크게 뜨고는 도로테아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럼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그럴 수는 없었다.
“무슨… 도로테아!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은 실리케를 본 적조차 없으면서!”
“아니, 체첼리카. 그렇지 않아. 실리케가 로즈안나를 가졌을 때, 별장에 숨어 있던 그 애를 돌본 게 나야. 네 아버지의 부탁으로.”
로즈안나는 놀란 표정으로 도로테아를 쳐다보았다. 도로테아는 체첼리카를 쏘아보면서 로즈안나를 보호하듯 껴안아 당겼다.
“네 아버지는 전부 다 알고 계셨지. 당연한 일이야. 실리케가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실리케가 네 남편을 먼저 건드렸다고? 너는 그 말이 정말 믿어지던? 그 반대야, 체첼리카.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 건 실리케가 아니라, 너의 남편이야.”
털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드로스 이오나 쪽을 쳐다보았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허옇게 질린 그는 입가를 푸들푸들 떨면서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혐오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드로스 이오나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드로스는 실리케가 사실을 발설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겠지. 그랬다가는 체첼리카 네가 실리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걸 그도 알고 있었던 거야. 누가 잘못했는지, 너에게 그런 건 상관없는 일이잖아. 안 그렇니? 넌 항상 실리케를 사람 취급도 해주지 않았잖아. 그런데 실리케가 사실을 밝히자 드로스는 뻔뻔스럽게도 너와 네 아버지 앞에서 거짓말을 한 거야. 네 아버지가 벌써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체첼리카는 눈이 뒤집혔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목소리로 체첼리카가 외쳤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폐하, 거짓말입니다! 전부 다! 아버지가 알고 계셨다면 나에게 말하지 않으셨을 리 없어! 아버지가 저자를 용서하셨을 리 없다고!”
“그래, 용서하지 않으셨어. 그래서 로즈안나를 똑바로 보살피라고 명령하신 거야. 로즈안나를 책임지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라고. 그리고 너에게 사실을 말씀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정말로 모르겠어?”
체첼리카의 눈동자가 볼품없이 흔들렸다.
“체첼리카, 그분은 너를 지키기 위해서 죽은 실리케를 한 번 더 희생하신 거야.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네가 견디지 못할 것을 걱정해서! 가엾은 실리케는 이미 죽었으니 로즈안나만은 불쌍히 여겨주라고 네게 부탁하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