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쓰러진 남자의 뒤에는 테오도르가 던진 것이 분명한 단검이 꽂혀 있었다. 정확히 목뼈와 척추가 이어지는 지점이다. 말발굽 소리가 미처 들리지도 않았는데, 노리고 던진 것이면 대단하고 그렇지 않다면 엄청난 운이었다.
도적들이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사이, 테오도르는 허리에 찬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발검 자세는 빠르지도 않고 뚜렷한 특징도 없었지만, 매끄럽게 뽑혀 나오는 검의 소리는 낭랑했다.
“좋은 날에는 으레 원수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야 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지.”
조용히 뇌까린 테오도르가 검을 들었다. 그 순간, 도적들은 분명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임에도 긴장감으로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너희에게는 베풀 은혜가 없다.”
115장 극의 전주곡 (6)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싸움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다. 도적떼의 우두머리는 이미 나자빠진 세 명, 아니, 단검을 맞은 놈까지 합하면 넷이나 되는 시체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자신과 남은 한 명, 단 둘뿐이다.
‘젠장… 대체 어디서 뭐 하던 놈이야!’
애초에 차려입은 것을 보고 잰 체나 하는 귀족 나부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단검을 던져 급소를 맞춘 일 같은 건 순전히 우연이라고 치부했던 것이다.
도적떼나 다름없긴 해도, 애초에 자신들은 시시한 놈들과는 달랐다. 개개인의 실력도 그랬거니와, 가지고 있는 무기들도 녹슨 쇠스랑 따위가 아닌 진짜 검, 진짜 도끼였다. 그러나 이 남자 앞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테오도르의 움직임은 정확하고 날카로웠다. 로즈안나조차도 테오도르가 그렇게 싸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아르사크만큼 재빠르고 변칙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석에 가까운 움직임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아무렇게나 달려드는 도적들은 그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검을 빗겨 막아내고, 뒤이어 베어내는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솟구친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로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았다.
‘이… 이 자식을 정면에서 상대하는 건 승산이 없어.’
우두머리는 테오도르의 실력을 얕보았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순순히 죽어줄 마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일부러 테오도르에게 달려들며 오른쪽에 있던 부하를 향해 눈짓을 했다. 테오도르가 자신과의 싸움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 부하는 슬금슬금 달아나는 척하다가 재빨리 로즈안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사실을 테오도르가 알아차렸을 때, 로즈안나는 이미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로즈안나!”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테오도르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검을 돌렸다. 그러나 반 박자가 늦고 말았다.
우두머리는 들고 있던 도끼를 휘둘러 테오도르의 어깨를 내리쳤다. 붕, 하는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할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진 도끼의 날이 보였다.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그 순간, 테오도르는 팔 하나를 잃어버리면 확실하게 그를 죽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단숨에 목을 베고, 그대로 로즈안나를 붙든 놈을 향해 집어 던지면?
빗나가면 끝장이다. 단 한 순간, 정확하게 던져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하는 데에는 단 일 초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테오도르는 뭔가가 쐑! 하는 소리를 내며 눈앞을 스쳐 지났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에 보인 것은 도적의 손에서 벗어나 뒤쪽으로 날아간 도끼였다. 그리고 그다음에 보인 것은 화살 한 대에 관자놀이를 관통당해 쓰러진 도적의 몸이었다. 누구의 솜씨인지 궁금할 것도 없었다.
우두머리까지 당해서 쓰러지자, 로즈안나를 인질로 붙잡았던 마지막 하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이런 미친……! 이게 무슨……! 죽여버리겠……!”
말은 미처 맺어지지 못했다. 다시 한번 더 날아온 화살은 이번에도 정확히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도적의 팔에서 풀려난 로즈안나는 괴로운 기침을 토해내며 목을 움켜쥐었다. 희고 가느다란 목에는 시퍼런 멍 자국이 생겨 있었다.
“로즈안나!”
테오도르는 다급하게 달려가 로즈안나를 끌어안았다. 뒤이어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아르사크의 모습이 나타났다. 도대체 얼마나 멀리서 활을 쏜 것인지 짐작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녀는 말이 채 발을 멈추기도 전에 그대로 뛰어내려 둘을 향해 뛰어왔다.
“테오도르! 로즈는?”
“아, 아르사크… 님. 저, 괜찮아요. 콜록!”
로즈안나가 힘겹게 말했다. 아르사크는 분노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사방에 널린 시체들을 쏘아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죽은 것을 다시 일으켜 세워 한 번 더 죽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놀란 로즈안나를 위해 끓어오르는 화를 일단 눌렀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던 망토를 로즈안나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테오도르는 떨고 있는 로즈안나를 끌어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곧 마차가 올 거야, 돌아가자.”
감히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틸 수는 없었다. 이윽고 마차가 왔을 때, 로즈안나는 순순히 두 사람과 함께 마차에 탔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을 벌였느냐는 질문은 아르사크가 했다. 대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로즈안나는 산을 내려오는 동안 자신이 겪은 일을, 숨기고 있었던 사실을 전부 다 털어놓았다.
아르사크와 테오도르,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마차가 멈출 때까지 로즈안나를 안고 있는 팔을 풀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마차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문을 열자 운트겔 저택의 모습과 여전히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테오도르의 품에 안겨 나온 로즈안나의 몰골을 보고 하나같이 놀랐다. 납치라도 당했던 것이라 생각했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로즈안나!”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테오도르의 누나인 에셴과, 그리고 뜻밖에도 루이제였다. 테오도르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누나에게 로즈안나를 부탁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아르사크가 끼어들었다.
“기다려라.”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낮고 엄격했다.
테오도르는 아르사크의 그런 목소리를 아주 예전에 단 한 번 들은 일이 있었다. 토르갈을 처음 찾아갔을 때, 부족장으로서 불청객인 자신에게 경고하며 들려주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루이제조차도 움찔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을 만큼, 아르사크는 무시무시하게 화가 나 있었다.
“로즈안나, 걸을 수 있겠어?”
“…네, 아르사크 님. 걸을 수… 있어요.”
“테오도르, 로즈안나를 잠시 내려줘.”
“마마, 하지만…….”
“테오도르 님, 저… 괜찮습니다. 절 내려주세요. 마마의 말씀에 따라주세요.”
테오도르는 반박하려다가,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에리히를 한번 바라보았다. 그는 왠지 미동도 없이 한쪽 턱을 비스듬히 괸 채 이 촌극 같은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불안했지만, 로즈안나가 직접 내려달라고 부탁하니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테오도르가 로즈안나를 조심스럽게 내리자, 아르사크는 로즈안나를 부축하듯이 데리고 맨 앞으로 나아갔다.
테오도르의 부모님은 당장이라도 뛰어나와 로즈안나를 살펴보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황제가 있어서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테오도르와 나란히 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로즈안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아르사크와 함께 서 있었다.
아르사크는 로즈안나의 손을 놓고 턱을 살짝 들었다. 그리고, 체첼리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와라.”
아르사크의 시선이 닿은 곳에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웅성거리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고 나니 중앙에 남은 것은 이오나 남작 부부뿐이었다. 체첼리카는 자신이 지목을 당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았지만, 모르는 척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체첼리카 이오나, 너에게 한 명령이다. 앞으로 나오라.”
이름을 불리자 이제는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체첼리카는 천성이 표독했다. 게다가 아르사크를 존중하는 마음도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데, 게다가 황제가 저 위에 있는데 제가 나를 감히 어쩌랴?
체첼리카는 당당하게 걸어 나왔고, 엉망진창이 된 로즈안나의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황후 마마께서 이 아이를 그토록 어여삐 여기신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군요. 그런데 참, 마마께서는… 황실의 일원이 되셨으면 사람을 보는 안목을 좀 더 갖추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천한 계집애를 곁에 두시면 마마께도 불행이 닥칠지 모르오니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지금 그 말은 누구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냐. 내게? 아니면 로즈안나에게?”
아르사크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성미가 어떤지 눈으로 직접 본 바 있는 몇몇 귀족들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지만, 먼 지방에서만 산 체첼리카는 아르사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따금 수도의 풍문이 그녀의 귀에까지 흘러든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허황된 헛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마마께 드리는 저의 충심 어린 충고라고 해두지요. 마마께서는… 자신의 시중을 드는 시녀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황후의 자리에 계시는 분이, 옆에 두는 심복들을 아무렇게나 고르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요? 저 애는 말입니다, 온갖 부류의 천민들 중에서도 가장…….”
그 순간이었다. 아르사크가 체첼리카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꺄악!”
단 한 대만으로, 체첼리카는 한순간 의식을 잃었다. 입술이 터져서 피가 흘러나오고, 몸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체첼리카가 정신을 추스를 틈도 주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체첼리카의 멱살을 잡아채어 억지로 일으킨 뒤, 한 번 더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또다시 한 번, 또 한 번.
그쯤 되니 아무리 성미가 독한 체첼리카라도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지 않을 수 없었건만, 아르사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엉망진창이 된 체첼리카의 뺨을 또다시 거세게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