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로즈안나의 의붓어머니인 체첼리카 이오나는 로즈안나의 어머니였던 실리케를 치를 떨며 증오했다.
실리케는 체첼리카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체첼리카가 적녀이고 실리케는 서녀였다.
결혼하기 전, 체첼리카와 실리케는 사이가 좋지는 않긴 했어도 손찌검이 오갈 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체첼리카는 실리케가 어차피 자신과는 핏줄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실리케의 어머니가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였기 때문에, 실리케는 자라면서도 귀족 집안의 아가씨다운 자신만만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없는 듯이 조용히, 죽은 사람처럼 살았다. 언니인 체첼리카에게도 반항하지 않았다.
그러다 단 한 번, 체첼리카를 그토록 돌아버리게 만들 복수를 했다. 체첼리카와 결혼한 남자, 그러니까 드로스 이오나와의 사이에서 임신을 한 것이었다.
항상 조용하고 얌전하던 실리케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집안사람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드로스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체첼리카와 그녀의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정말로… 정말로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실리케가… 그 아이가 먼저 제게 술을 가져다주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마셨을 뿐인데……!’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있을 때, 실리케가 피로를 풀어주는 효능이 있다며 술을 가지고 왔다, 처제의 상냥한 배려가 고마워서 술을 마셨고, 그다음에는 기억이 없다, 일어나니 여전히 서재에서 자고 있었을 뿐이다……. 그게 다였다.
실리케는 아이를 가졌음을 누구에게도 숨길 수 없을 때까지, 그러니까 이제는 낳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을 때까지 철저하게 임신 사실을 숨겼다. 집안의 작은 별장을 관리하는 하인들을 매수하여 누구도 모르게 그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제발요, 언니. 저는… 저는 죽겠지만, 이 아이는 살리고 싶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실리케! 왜… 어째서 네가…….’
그때 실리케를 도와주었던 것은 도로테아였다. 드로스 이오나의 방치 속에 학대를 당하는 로즈안나를 구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도로테아는 실리케가 아이를 갖게 된 내막을 알고 있었다. 결코 실리케가 형부인 드로스 이오나를 술로 유혹한 것이 아니며, 거꾸로 드로스 이오나의 손아귀에 실리케가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도로테아는 분노했었다.
‘드로스 이오나, 그자는 파렴치한 인간이야. 네 아버지께 당장 말씀드려야 해!’
‘안 돼요! 안 돼요……. 그러면, 그러면 체첼리카 언니는 정말로… 모든 걸 포기하고 미쳐버릴지도 몰라요. 도로테아 언니, 저는… 저를 어리석다고 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체첼리카 언니가… 감당하지 못할 거예요.’
실리케는 산통이 시작되고 난 후에야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밝혔다. 소식을 들은 체첼리카는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지만, 체첼리카의 부친은 황망한 와중에도 머리를 굴렸다.
드로스 이오나는 처가의 그늘 밑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런 드로스를 반쯤 협박하여, 이 일이 알려지면 자네에게도 좋을 것이 없으니 서녀로 들여 기르다 아무 데로나 시집을 보내든지 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또한 딸에게도 마찬가지로 당부했는데, 드로스 이오나에게 말했던 것과는 그 내용이 조금 달랐다고 한다. 뭐라고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체첼리카가 그 때문에 로즈안나를 더더욱 싫어하는 것이라고 하녀들이 쑥덕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듯 로즈안나도 무엇이 진실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대체로 미친 사람처럼 휘두르는 체첼리카의 매질에 숨이 넘어가기 직전일 때, 그녀가 내뱉는 증오와 저주 섞인 말들 속에서 기억에 남는 것들을 골라 필사적으로 짜 맞춘 내용이 로즈안나가 아는 전부였다.
또는 겁 없는 하녀들이 안주인 몰래 소곤거리는 것을 엿들어 알게 된 것도 있었다. 아무튼, 로즈안나가 알기로 자신이 이오나 남작의 서녀가 된 경위는 이처럼 복잡하고, 지저분했다.
체첼리카는 태어나자마자 당장 죽여버리지 않은 것만도 감사하며 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었다. 정말로 그랬어야 할지 모른다고, 로즈안나는 이제야 생각했다.
차라리 어머니의 신분이 낮은 사람이기만 했더라면 이렇게 도망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로즈안나는 테오도르와 그의 부모님, 그리고 에리히와 아르사크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신분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개의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에리히와 아르사크는 남이니 이해해 줄 수도 있다. 어쩌면 테오도르도 충격은 받겠지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운트겔 집안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었다. 충격을 받을 것이고, 추한 방식으로 태어난 자신을 꺼리게 될지 모른다. 운트겔 부인의 다정한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견딜 수 없었다.
로즈안나는 오르막을 한참 걸었다. 땀이 배어 나오고 숨이 찼다. 드디어 좀 트인 공간이 나왔지만 도저히 쉴 만한 곳은 아닌 것 같았다.
여기저기에 위험해 보이는 바위가 있고, 썩은 나무토막이 굴러다녔다. 흙은 기분 좋은 냄새가 아니라 축축하고 불길한 습기만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드레스는 이미 못 쓰게 되어버렸고 구두도 마찬가지였다. 로즈안나는 둥그스름한 바위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오도카니 앉아 생각에 잠겼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슬픔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어떻게 할까, 어디에 가서 뭘 하면 좋을까…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다들 나를 찾느라 정신이 없으시겠지. 폐하와 아르사크 님도 계실 텐데 한바탕 소란이 일겠구나. 혹시 나를 잘 지키지 못했다고 하녀들이 벌을 받지는 않을까? 테오도르 님은 나를 얼마나 걱정하실까…….
테오도르.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울컥 눈물이 났다. 테오도르가 얼마나 애타게 자신을 찾을지, 그리고 앞으로도 또 얼마나 긴 세월을 그렇게 보낼지 생각하니 멍하니 잊어버린 것 같던 울음이 한꺼번에 터졌다.
테오도르의 성격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라졌다고 해서 몇 년 사이에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버리거나, 잊어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 봐라. 웬 아가씨가 이런 데서 울고 있지?”
이런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한 탓에, 로즈안나는 놀라서 일어나다가 그만 바위 아래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별로 높지 않아서 크게 다치는 것은 면했지만, 부딪힌 자리가 욱신거리고 아팠다. 찡그렸다가 눈을 뜬 로즈안나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러 명의 남자들을 보고 공포에 질렸다. 아무렇게나 입은 옷차림, 지저분하게 기른 수염들, 야외에서만 생활하는 것처럼 검게 탄 얼굴, 손에 든 무기들.
틀림없어. 로즈안나는 생각했다. 이자들도 분명, 여러 차례 보고된 바 있는 도적떼 중 한 무리일 것이다.
도망칠 수 있을까? 로즈안나가 슬그머니 몸을 움직이려 했을 때, 둘러서 있던 남자들 중 한 사람이 우악스럽게 로즈안나의 어깨를 잡았다.
“악!”
“흐흐, 결혼식장에 추남이 들어온 모양이지? 그래서 이런 결혼은 못 하겠다며 도망쳐 나왔나?”
“아니면 결혼을 약속하기 전에 어떤 놈팡이랑 먼저 눈이 맞은 거지. 설마 여기서 만나기로 한 거야? 그렇다면 그 놈팡이는 버얼써 꽁무니를 뺀 것일 테니 미련 버리라고.”
“이것… 놓으시오. 나는… 황후 마마를 모시는, 측근 시녀입니다. 내게 손을 대면, 마마께서…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로즈안나는 필사적으로 용기를 쥐어 짜냈다. 한마디, 한마디, 신중하게 말했건만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도적떼는 로즈안나의 말을 듣더니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황후 마마의 측근 시녀? 차라리 네가 황후 마마라고 하지 그랬어? 둘러대는 핑계치고는 소심하구먼!”
“네가 황후 마마의 측근 시녀건, 황제 폐하의 측근 시녀건, 우리가 그걸 신경이나 쓸 것 같으냐? 너 같은 계집애들을 아주 비싼 값에 사주는 사람을 우리가 좀 알지. 그쪽에 가서 ‘측근 시녀’가 되어봐라. 경력도 있겠다, 새 직장은 무리가 없겠군!”
다시 와 하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로즈안나는 전신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한쪽 구두를 벗어 어깨를 잡고 있는 남자의 손등을 있는 힘껏 찍어버렸다.
“으악! 이… 빌어먹을 계집이!”
남자는 움찔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로즈안나의 힘 같은 것은 아무런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굽 때문에 생채기가 난 것을 보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았다.
그는 로즈안나의 머리를 거세게 후려치고는,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지자 드레스의 앞섶을 움켜쥐었다.
“오냐, 오늘 아주 잘 걸렸다. 마침 신랑 맞기 딱 좋은 옷을 입고 왔군그래.”
로즈안나는 남자의 두꺼운 팔목에 손톱이 파고들 만큼 거세게 저항했다. 그러나 손아귀의 억센 힘을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다.
“누가… 살려주세요!”
울부짖음 같은 비명이 숲속에 퍼진 순간이었다. 로즈안나는 오른쪽 시야가 갑자기 트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에도 분명 남자가 서 있었는데 왜일까?
시선을 돌리니 그 남자는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입에서 울컥 피를 뿜어내며 옆으로 쿵 쓰러졌다.
“으악, 빌어먹을! 뭐야!”
“어떤 놈이야!”
놀란 도적들은 로즈안나를 내버려 둔 채 허둥지둥 무기를 잡았다.
말에서 내린 남자와 로즈안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너무나 당당한 태도로 성큼성큼 걸어와, 쓰러진 로즈안나를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다섯 자루나 되는 칼과 도끼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에 험악한 도적들조차도 순간 얼어붙어 남자를 죽이지 못했다.
로즈안나는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호흡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울었다.
“테오, 도르 님, 으, 윽… 흑, 어, 어떻게… 여기.”
“그런 건 나중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잠시만 여기 있어.”
테오도르였다. 그는 나무 아래 푹신한 곳에 로즈안나를 소중히 내려놓은 채 다시 도적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