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표독스레 쏘아붙이는 욕설에 로즈안나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무서워…….’
“말해봐, 누가 네 어미야? 내가 언제 너 같은 것을 낳았어? 말해봐!”
숫제 경기에 가까운 체첼리카의 목소리를 들으며 로즈안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공포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어깨가 움츠러드는 순간, 아르사크의 얼굴이 로즈안나의 머릿속을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로즈, 너는 이제 울 필요가 없어.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로즈안나는 가쁘게 치미는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괜찮아. 로즈안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괜찮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제… 어머니로 오신 것이 아니라면, 부인. 이만 나가주십시오.”
“뭐가 어째?”
높게 터져 나온 체첼리카의 목소리와 더불어 손이 휙 올라갔다. 로즈안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움츠러드는 몸을 어쩌지 못했다.
소파 위에 웅크린 채 작게 비명을 지른 로즈안나의 어깨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뺨이라도 내리칠 것 같던 체첼리카는 로즈안나의 그런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믿을 수 없이 되바라진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용케 천것처럼 보이는 것은 면했다만 역시 피를 속일 수는 없나 보군. 시궁쥐마냥 웅크리고 떨면 누가 가엾게 여겨주기라도 할 줄 알아?”
너무 오래전에 잊어버린 폭언에 로즈안나는 정신이 멍해질 지경이었다. 아주 옛날에는 밥 먹듯이 들은 말들이었지만, 그때와 지금의 거리는 너무도 멀었다. 이제 거의 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새롭게 벌어지며 짜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때 체첼리카의 손이 로즈안나의 머리카락을 확 움켜쥐었다. 로즈안나는 순간적으로 손등을 깨물며 비명을 참았다. 그것조차도 어린 시절의 버릇이었고, 다 잊었다 생각했던 굴욕적인 몸짓이었다.
“너같이 더러운 계집의 딸이 무슨 수로 운트겔 집안의 아들을 꼬여냈는지는, 흥! 안 봐도 뻔한 노릇이지. 어미나 딸이나 똑같겠지? 응? 이런 것을 황녀의 놀이 동무랍시고 옆에 두니 그 황녀도 재수가 없어 요절한 거야.”
머리채를 휘감아 흔드는 손은 포악스러웠다. 로즈안나는 약한 흐느낌을 참으며 체첼리카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네가 황후의 측근 시녀라고, 운트겔 집안과 결혼을 하게 된다고 내가 네까짓 것에게 머리를 조아릴 줄 알았어? 어림도 없어. 뭐? 나가줘? 다시 한번 내 앞에서 시건방지게 지껄여 봐. 응? 지껄여 보란 말이야!”
“마님,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로즈안나는 어린애처럼 흐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체첼리카는 씩씩거리면서 로즈안나를 팽개치고는 손바닥에 남은 머리칼을 더러운 것을 버리듯 털어버렸다.
“난 너 같은 것들만 보면 구역질이 나. 분수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것들.”
외마디 말을 남긴 체첼리카는 그래도 분이 덜 풀렸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손에 잡히는 것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대로 로즈안나를 내리쳤을 것이다. 그게 채찍이든 뭐든 말이다. 예전에 그랬듯이, 지금도 똑같았다.
“그까짓 야만족 출신의 계집을 황후로 떠받들고 모신다고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았던 모양이지? 그렇게는 못 하지. 네가 얼마나 비천한 출신인지 운트겔 집안에서는 상상도 못 할 게야. 안 그래? 모든 사실을 알고도 너 같은 것을 과연 아들과 결혼시키려 할지 궁금하지 않아?”
로즈안나의 눈물 젖은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자신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 로즈안나는 어린 나이에도 그 사실을 불필요할 정도로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원인은 단 한 사람이었다. 체첼리카. 그녀는 로즈안나를 학대할 때마다 마치 저주라도 하듯이 로즈안나의 어머니에 대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지껄이곤 했던 것이다. 너무 어렸을 때는 그녀가 하는 말의 절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지각이 생길 무렵부터는 달랐다.
그 사실이 밝혀진다. 테오도르에게, 그리고 그의 부모님들에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두려움이 로즈안나의 가슴속을 칼날처럼 후벼댔다. 집안과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날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과거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들춰질 줄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어떻게 손쓸 수도 없었던 일들이.
거기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로즈안나는 깨달았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마님, 마… 마님.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것, 그건… 그러지 말아 주세요, 제발. 그… 그건, 그런 일이 밝혀지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하지만… 하지만 테오도르 님과, 그, 그리고 황후 마마께… 누가 될 수 있습니다. 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로즈안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울면서 체첼리카의 발밑에 엎드리다시피 매달려 빌었다. 그러나 체첼리카는 로즈안나의 손이 자신의 드레스 자락에 닿으려 하자 구둣발로 뺨을 걷어찼다. 뾰족한 굽에 쓸려 귓불과 턱선에 상처가 생겼다.
“앗……!”
체첼리카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바닥을 짚은 로즈안나의 손등을 밟았다. 로즈안나가 울음 섞인 비명을 질렀지만 체첼리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로즈안나가 괴로워하면 할수록 즐거운 것 같은 잔인한 기색이 엿보였다. 인간으로서 일말의 안타까움이나 연민조차도 없는 악랄한 모습이었다.
“네까짓 것이 하지 말아 달라면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해? 응? 말해봐.”
“마님, 제발… 제발.”
“망신당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지? 그런데 어쩌나? 네 편을 들어줄 사람이 누가 있겠어? 오지랖 넓던 도로테아도 여기 없고, 선황후나 황녀도 다 죽어버린 마당에 누가 네 말을 들어주기나 할까? 황실에서 네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알고도 네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해? 이 돼지처럼 지저분한 것아!”
도로테아는 로즈안나를 데리고 황궁으로 왔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아버지인 이오나 남작의 친척 누나로, 로즈안나에게는 오촌 고모쯤 되는 사람이다.
체첼리카가 악쓰는 소리는 로즈안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보이지 않는 유리 조각 위를 맨몸으로 나뒹구는 것처럼, 전신이 찢기는 듯 아팠다.
로즈안나의 손등이 핏자국과 상처로 너덜너덜해졌을 때가 되어서야, 체첼리카는 비로소 발을 떼고 내뱉듯이 말했다.
“더러운 얼굴 쳐들지 말고 네 발로 꺼져. 아니면 파혼당하고 쫓겨나서 구걸이나 하든지. 어느 쪽이든 너 같은 것에게는 딱 어울리는 결말이긴 하겠지.”
결혼식 당일의 아침이 밝았다.
오늘을 위해 테오도르의 아버지는 운트겔 저택의 정원의 문을 모두 열었다. 귀족들의 저택처럼 으리으리하지는 않지만, 세월에 떠밀리지 않고 단정하게 가꾸어진 정원의 아름다움은 특별해서 모두의 칭찬이 이어졌다.
초대된 손님들이 모이고, 황제 부처가 탄 마차가 도착했을 때 사람들의 흥분한 분위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오늘을 위해 황제와 황후가 직접 신부의 혼수를 대단히 많은 금액을 들여 준비했다는 소문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아르사크와 에리히는 황족으로서 예복을 갖춰 입었고, 모두의 절을 받으며 나란히 입장했다.
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분위기는 벌써 화기애애했다. 그러나 그 행복감에 도취되지 않은 인물도 있었다. 바로 드로스 이오나와 체첼리카 이오나였다.
그들은 마치 결혼식 자체를 비웃으러 온 사람들 같았다. 도저히 신부의 부모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태도에 사람들도 모두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저택 안에서 테오도르가 달려 나왔다. 사람들은 벌써 신랑이 등장할 때인가 싶어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악사들도 아직 다 자리에 앉지 않았는데 식을 시작할 리가 있는가? 게다가 테오도르의 표정은 뭔가 이상해 보였다. 고통을 참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한 대 때릴 것 같기도 한 표정이다.
아르사크와 에리히도 테오도르를 발견했다. 그들은 테오도르가 곧장 자신들이 앉아 있는 쪽으로 오고 있음을 깨닫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오도르, 무슨 일이냐.”
에리히가 조용히 물었다. 고개를 든 테오도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숨을 얼마나 몰아쉬는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부탁…드립니다.”
“무슨 일이야, 테오도르? 로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대답해.”
아르사크가 낮은 소리로 다그쳤다.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목소리는 작았다.
테오도르의 표정이 한순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로즈안나가… 없어졌습니다. 사라져 버렸어요.”
114장 극의 전주곡 (5)
테오도르와 에리히, 그리고 아르사크와 운트겔 부부까지 사라진 로즈안나 때문에 혼비백산하고 있을 그 무렵, 로즈안나는 아침 일찍 하녀가 입혀준 드레스를 입은 채 어딘지도 잘 모르는 곳에 와 있었다.
숲속인 걸 보면 운트겔 저택에서 곧장 황궁의 사냥터와 연결된 숲으로 들어온 게 아닌가 싶은데, 돌아다니는 병사들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외진 곳이거나 길을 살짝 벗어나 다른 산길로 온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다시는 돌아갈 일이 없을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산길을 헤매는 로즈안나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마치 어딘가 납치라도 당했다가 빠져나온 사람 같아 보일 지경이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드레스, 로즈안나는 흙물이 들고 찢어져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흰 드레스를 허탈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 드레스는 여러 벌의 후보들 중에서 에리히와 아르사크가 같이 고른 것이다. 감히 황제 부처가 내린 것을 이런 꼴로 만들었으니, 돌아가서 죽는다고 해도 할 말 없을 죄였다.
하지만 로즈안나는 그런 것은 두렵지 않았다. 차라리 가서 죽는다고 해도 할 수만 있다면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로즈안나의 걸음을 자꾸 무겁게 만들었다.
어머니에 대한 일…….
로즈안나는 서글픔과 허무함이 뒤섞인 심정으로 땅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여러 사람이 밟고 지나간 듯, 단단하게 다져진 흙 사이에 나뭇가지와 벌레의 시체 같은 것들이 뒤섞여 서서히 썩어가고 있었다.
로즈안나는 자신이 이오나 저택에서 보낸 시간이 바로 저런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저분하고, 모두가 꺼리고, 손조차 대고 싶어 하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