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반투명한 살구색 술이 자잘한 거품을 내면서 잔 안에 반쯤 차오른다. 한 모금 마시니 상큼한 맛이 혀끝에 돌았다.
“걱정 마. 내일까지 여기 있겠다는 건 농담이다. 저녁 식사가 나오기 전에 돌아갈 테니까.”
“예? 아니, 그건 또 왜입니까? 이왕 오셨고, 방도 준비되었으니 차라리…….”
“어제 싸웠거든.”
누구와,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에리히가 ‘싸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감히 그와 싸움씩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제국 안에 하나 이상일 리 없기 때문이다.
테오도르는 왜 싸웠는지 묻지 않았다. 둘만의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거니와, 듣고 나면 늘상 시시껄렁한 이유여서 물어본 쪽이 오히려 맥 빠지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일은 로즈안나의 결혼식이니 오늘 기분을 풀어놓지 못하면 곤란하겠지.”
잔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말하는 에리히의 모습에 테오도르는 왠지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와 아르사크는 이제 일 년 정도의 기한만을 남겨놓고 있는 임시 부부이긴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왠지 몇 년을 함께 지내온 진짜 부부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이렇게 되기 전에도 아무것도 아닌 일로 서로 언성을 높이고 으르렁거리는 일이 일상이었지만, 요즘 들어 테오도르가 두 사람을 보며 느끼는 감상은 그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새 반병이나 술을 마셔버린 에리히는 말한 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오도르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평소에는 거의 보지 못하는 따뜻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지금, 이 한순간만큼은 황제와 그를 모시는 기사가 아닌, 또래 친구로 처음 만나 황궁의 정원을 뛰어다니던 두 소년으로 돌아가 있는 것 같았다.
에리히는 테오도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너를 위해서 기쁜 일이다.”
그와 비슷한 말을 아르사크도 로즈안나에게 해준 적이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몰랐다.
테오도르는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에리히 님.”
“로즈안나를 만나고 가고 싶다만 신부는 오늘 저녁부터 모습을 숨겨야 하지. 웃긴 전통이라니까. 하지만 지키지 않았다가는 네 아버지가 내게도 점잖게 훈계를 하실 테니 얌전히 가겠다.”
“모셔다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에리히는 그답지 않게 빙긋이 웃고는 방을 나갔다. 잠시 로즈안나가 있는 방 쪽을 올려다보긴 했지만, 그는 말없이 저택을 나섰다.
저녁 시간이 되자 운트겔 저택에 머무는 손님들이 모두 연회장으로 불려 내려왔다. 그들은 거의 다 지방의 귀족들이었고, 테오도르의 아버지인 운트겔 장군과 친분이 두터운 자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테오도르는 아버지와 어머니 옆에서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축하의 말을 듣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로즈안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혼인을 앞둔 신부는 결혼 전날 오후부터 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 관습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로즈안나의 곁에는 시중을 드는 하녀 두어 명만이 있을 것이다. 테오도르는 로즈안나를 위해 씁쓸한 생각에 잠겼다.
원래대로라면 신부는 결혼 전날 마지막 밤을 부모님과 보낸다. 하지만 로즈안나에게는 딸과 함께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우고, 축복과 격려로 새로운 인생의 행복을 빌어줄 부모님이 없었다.
오늘 밤, 로즈안나의 곁에는 테오도르의 어머니인 운트겔 부인이 머물 예정이었다. 강인한 무골인 남편과 달리 여리고 마음 약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옛날에도 어린 로즈안나를 위해 마음을 많이 썼으며, 로즈안나를 가족의 일원으로 맞아들이게 됐을 때 매우 기뻐한 사람이었다.
“테오.”
테오도르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뒤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어머니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네, 어머니.”
“난 이제 슬슬 로즈안나에게 가볼까 한단다. 네 아버지는 옛 친구를 만나 테라스에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중이니, 혹시 나를 찾으시거들랑 그렇게 말씀을 드리렴.”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테오도르는 큰 키를 숙여 어머니와 살짝 뺨을 맞댄 뒤 미소를 띠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자신은 로즈안나와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였다. 연회장의 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것이 테오도르의 눈에 들어왔다. 저택의 주인은 아버지지만 지금은 자리를 비우셨으니 테오도르가 나가보는 것이 순서였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어머니도 무슨 일인지 궁금한 표정으로 조금 처져서 그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간 테오도르는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모두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수도 귀족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운트겔 가문에 초대가 될 정도라면 안면이 아주 없을 수는 없다.
테오도르는 부드러운 미소와 정중한 태도로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 집안의 주인이신 페레아슬란 운트겔의 아들인 테오도르 운트겔입니다.”
얼핏 옆을 돌아보니 어머니가 서 있었다. 그녀도 저택의 안주인다운 단정하고 품위 있는 태도로 방문객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테오도르는 그제야 방문객들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쪽에서 먼저 환영 의사를 밝혔는데도, 마주 돌아오는 인사가 너무 늦었다. 조금만 더 지체한다면 무례해질 지경이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무렵, 부인 앞으로 한 걸음 나선 남자가 어딘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느물거리듯 말했다.
“이거 실례했군. 너무 반가워서 그만 할 말을 잊었지 뭐겠소. 반갑습니다. 나는 드로스 이오나요. 이쪽은 내 부인입니다.”
테오도르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오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성이다. 테오도르가 그의 정체를 미처 떠올리기도 전, 드로스 이오나라 자신을 밝힌 남자가 말했다.
“그나저나, 내 딸 로즈안나는 지금 어디 있소?”
방 안에 있던 로즈안나는 하녀가 전해준 믿지 못할 소식에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이나 온몸을 떨며 서 있다가, 그다음에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다시 주저앉았다.
결국, 부모님이 오셨다.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받고서도 로즈안나는 그들이 마음을 바꾸어 매정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를 그토록 바랐다.
선황후가 로즈안나를 거두어 황궁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었을 때, 로즈안나는 그 집안과의 모든 인연을 다 끊은 셈이었다. 그들도 로즈안나의 안부를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으며, 수도에 온 뒤로는 만난 적도 한 번 없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파리해진 로즈안나의 안색을 살피던 하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당장 내일이면 결혼식인데, 이제 와서 신부가 병이라도 난다면 큰일이었다.
“아냐… 아무것도.”
“하지만 아가씨, 안색이 너무 나쁘세요.”
“정말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그때였다. 바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신부의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하녀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도저히 초대받은 손님이라고는 할 수 없을 거칠고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 손님인지도 몰라보는 멍청한 것들이 감히 내 앞을 가로막아? 내가 누군지 아는 거냐!”
로즈안나는 삽시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어렸을 때, 로즈안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면 허둥지둥 숨을 곳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들킬 수밖에 없었다. 들킨 뒤에는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하녀들이 안 된다고 외치는 와중에도 문은 벌컥 열렸다. 로즈안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순간 창밖으로 뛰어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지만,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방 안에 있던 하녀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밀고 들어온 부인의 싸늘하고 조롱 섞인 목소리가 더 빨랐다.
“이게 누구람? 어렸을 땐 그토록 보기 싫게 생겼더니만. 황궁에서 아주 예쁨 받으며 잘 먹고 잘 산 모양이로구나. 그렇지, 로즈안나?”
로즈안나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드레스를 쥔 손끝이 얼음을 댄 듯이 차가워진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로즈안나의 입술 사이에서 간신히 쥐어 짜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머니.”
113장 극의 전주곡 (4)
순간적으로 부인을 그렇게 부른 로즈안나는 흠칫하면서 입술을 다물었다. 어렸을 때에는 그녀를 그런 식으로 부를 수 없었다. 실수로 ‘어머니’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날 식사는 그걸로 다했다고 봐야 했다. 어쩌면 이튿날까지도.
“너희들은 나가도 좋아. 원래 신부는 식을 올리기 전의 마지막 밤을 부모와 함께 보내잖아? 안 그래?”
거만한 목소리로 명령하는 그녀는 체첼리카 이오나, 즉 드로스 이오나의 부인이자 로즈안나의 의붓어머니였다. 그러나 하녀들은 도무지 이 앙칼지고 사나운 여자가 로즈안나의 어머니라는 말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인내심 짧은 체첼리카의 눈썹이 표독스럽게 치켜 올라간 순간, 로즈안나는 뭔가를 체념한 사람처럼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나가도 괜찮아. 내… 어머니시니까. 마님과… 다른 분들께도, 그렇게 전해줘.”
“아… 그렇지만, 아가씨…….”
“괜찮으니까 나가보렴.”
불안하긴 했지만, 로즈안나가 나서서 어머니라고 말하니 하녀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물쭈물 눈치만 보고 있던 하녀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은 삽시간에 불길한 적막에 사로잡혔다.
체첼리카는 하녀들이 나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방 안의 풍경을 휘 돌아보는 시선에는 가소롭고 시답잖다는 조소가 가득했다. 마치 값싼 물건으로 가득 찬 고물상에라도 온 것처럼, 손님으로서의 예의는 찾아볼 수도 없는 태도였다.
“운트겔 집안은 수도에서 귀족보다 더한 대접을 받는다고 하더니……. 이게 뭐야? 보잘것없는 골동품뿐이군.”
로즈안나는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눌러 삼켰다. 그러나 앞으로 자신의 가족이 될 집안, 그리고 자신에게 더없이 다정하게 대해준 운트겔 집안을 욕하는 것은 참고 들어줄 수 없었다.
“어머니, 그런 말씀은…….”
“누가 네 어머니야, 이 천한 것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