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만찬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위축된 니스 후작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의 대화는 느리지만 조금씩 활기를 되찾았다. 아르사크도 이번에는 대화에 집중했다. 물론 재밌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식사가 끝나자 니스 후작은 누구보다 빨리 황궁을 벗어났다. 다행히 오늘 밤에는 목을 보존할 수 있었지만, 에리히나 아르사크, 둘 중 한 명이라도 생각을 달리한다면 당장 내일 아침 해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는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위든 앞에서조차 늘어지는 자랑을 주체하지 못했던 문제의 마차가 아닌, 하인들이 짐을 실어 나를 때나 쓰는 허름한 마차를 타고 서둘러 어디론가 떠났다. 결혼하지 않았으니 같이 데리고 가야 하는 처자식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 이후 한동안 사교계에서는 니스 후작이 빚쟁이에게 쫓겨 야반도주를 했다더라, 그게 아니라 평민 아가씨와 눈이 맞아 전원으로 여행을 즐기러 달아났다더라, 그런 소문들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튀어나왔다.
에리히는 겨울을 지내면서 열흘의 반절 정도는 아르사크의 방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나머지 반절을 그러지 못한 것은 늦게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따금 아르사크와 다퉜다든지, 뭐 그런 사소한 이유들도 있긴 했지만 빈도가 너무 적었으므로 그다지 중대한 이유는 못 됐다.
니스 후작이 그랬듯, 오늘처럼 누군가 자신에게 대놓고 무례한 경우를 제외하면 아르사크는 대체로 있는 듯 없는 듯한 황후였다. 여전히 주도해서 연회를 여는 일도 없었고, 사교계의 거물들을 불러 모아 인맥을 쌓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변에 머물며 가까이 지내는 귀족은 자연스럽게 둘로 좁혀졌다. 그중 한 명은 운트겔 가문의 딸로 태어나 랜크버 백작 부인이 된 에셴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내란을 선동했던 죄인의 딸이지만 지금은 명실공히 홀드빅 남작이 된 루이제였다.
“서쪽 지방에서 또 도적떼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죠?”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온 아르사크의 표정은 평소대로의 쾌활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와 마주 앉은 에리히는 내놓은 차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보고서를 읽느라 정신이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반년쯤 전에 처음으로 문제가 대두되었던 도적의 소탕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채였다. 겨울이 되면서 그들도 움직이기를 꺼렸는지 어디론가 숨어 나타나지 않은 탓이다. 몇 번 수색대를 보냈지만 악천후 때문에 산을 헤매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날씨가 풀리고 여행객과 상인들의 이동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또다시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도적에 대한 보고가 줄을 이었다. 처음 발생했을 때에 비하면 어림잡아도 두 배는 늘었다. 심상찮은 일이었다.
“그들이 어디서 무기를 구했을까요?”
아르사크는 차를 마시며 혼잣말을 하듯 질문했다. 에리히도 그것이 고민이었으므로 찡그린 미간에 좀 더 힘을 주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곳곳에서 출몰하는 도적떼의 규모는 각각 달랐다. 열 명 남짓으로 소규모이기도 했고, 혹은 수십에서 기백에 이르기도 했다.
아무리 오는 사람 안 막는다는 도적떼라지만 그 정도의 규모가 도대체 어디에, 그것도 수색에도 걸리지 않고 숨을 수 있는지 완전히 수수께끼였다.
한 가지 더 이상한 점은 규모는 서로 다를지언정 그들이 무장하고 있는 수준이 모두 엇비슷하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산속에 숨어 저희들끼리 먹고사는 도적들로서는 너무 값지고 좋은 것들이었다.
판에 박은 듯이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읽던 에리히의 머릿속을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혼잣말 같은 질문을 던졌던 아르사크도 근본적으로는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들이 ‘진짜’ 도적이 아닐 가능성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누군가 그들을 수색으로부터 숨기고, 무기도 제공한다. 지금은 지나가다 운 나쁘게 걸린 행인이나 상단을 털지만, 어쩌면 그들이 노리는 것은 그런 푼돈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사병일 가능성…….”
에리히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르사크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제국에서는 귀족들이 사병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재산이나 토지라면 모를까, 사적으로 군대를 가지는 것만은 어떠한 이유로도 불가능했다.
정 군사력이 필요하면 정식으로 황제의 승인을 받아 황실의 병사들 중 일부를 데려다 잠시 부릴 수는 있었지만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말 심각한 사안이 아니면 애초에 노려볼 만한 건덕지도 없었다.
그토록 강하게 금지된 법을 어기고 누군가 사병을 기르고 있다면 그 목적은 단 한 가지였다.
반란.
에리히는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구기며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잔뜩 어두워진 눈가의 그늘이 그의 속내를 대변하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왕국이나 제국의 반란을 직접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거기서 패배한 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만약 에리히의 생각대로 누군가 도적을 가장한 사병을 제국 곳곳에 포진시켜 놓은 것이라면?
“폐하,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접근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아르사크의 말에 에리히는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시기를 재기라도 하는 듯한 이상한 출몰 빈도와 규모, 그리고 그들이 가진 무기. 도적들이 가졌다기에는 지나치게 훌륭하다는 그 무기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마음에 걸리는 내용이었다.
한군데에서 보고된 것이라면 철을 실어 나르던 상단의 마차를 습격했거니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 연관도 없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똑같은 내용이 지속적으로 보고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 그들에게 의도를 갖고 무기를 제공하지 않는 이상에는.
이제는 수색과 치안 강화만이 전부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그들을 끌어내야 하는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에리히는 한 점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 * *
황궁으로 돌아온 위든은 무슨 이유에선지 예전보다 더욱 소란한 나날을 보냈다. 좀처럼 그런 일이 없었는데,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사람이 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여러 귀족들과 함께 어울리며 밤늦도록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들 중에는 위든을 진심으로 따르는 자들도 있었고, 아첨하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위든은 어느 쪽도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았다. 대하기 어려운 황족이자 디몰트의 공작이 자신들을 불러주는 것만도 황감해하는 귀족들은 줄을 이었으므로, 위든이 머무는 곳에서는 밤이 늦도록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만찬에 참석했던 라바트 남작 부처와 슈트르 남작 부인은 위든과 다른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니스 후작이 덜덜 떨었던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는 아르사크에 대한 경멸도 살짝 깔려 있었지만, 위든은 그것을 모른 척 웃으며 넘겼다.
“전하.”
웃고 떠드는 위든에게로 어떤 남자가 다가와 귀엣말을 했다. 그러자 위든의 입가에서 순간적으로 미소가 사라졌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채기도 전에 그는 여전히 유쾌한 표정을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소. 오래 걸리지 않으니 여러분들은 즐기고 계시오.”
“다녀오십시오, 전하.”
“전하를 위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남겨 두겠사옵니다.”
위든은 껄껄 웃으며 휘장을 돌아 건물의 뒤쪽으로 갔다. 횃불을 거의 다 꺼둔 회랑은 캄캄한 어둠에 잠겨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위든에게는 어둠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림자 속에 누군가 숨어 있었다. 로브와 두건으로 얼굴과 몸을 전부 가려서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위든은 잘 아는 사람인 듯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짤막하게 물었다.
“알아보았느냐?”
“예, 전하.”
대답하는 목소리는 굵직했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은데 목소리는 몹시 낮았다.
“폐쇄된 광산에서 북쪽으로 더 들어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양의 세버니트가 매장되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네페의 영주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그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위든의 입가에 잠시 비웃음이 지나갔다.
“그럴 테지. 그자는 광산에 대해 이상한 경외감을 품고 있는 자니까 말이다. 생산력이 떨어진 산을 더 파헤치는 것은 안 된다고 말했던 자였지. 우습군……. 이제 막 터져 나오기 직전에 제 손으로 불을 꺼버린 꼴이 되었으니 말이야.”
“명령을 내려주시면 따르겠습니다.”
로브를 입은 남자가 말했다. 연회장에서 위든을 불러낸 다른 남자도 어느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 가려진 위든의 눈이 늑대처럼 번득였다.
“처리해라. 전부 다.”
“잘 알겠습니다.”
112장 극의 전주곡 (3)
로즈안나의 결혼식 날은 금세 코앞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테오도르의 목이 기다림에 지쳐 떨어지기 전이었다.
결혼식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운트겔 저택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공식적으로는 귀족이 아닌 무인 집안인 운트겔에서는 어지간히 큰 행사, 그러니까 지금처럼 결혼식이라든지 하는 일이 아니고서야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이 일절 없었다.
그래서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은 운트겔 가문과 친분이 있든 말든, 집 구경을 하고 싶어서라도 기꺼이 초대에 응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결혼식은 만 하루 뒤였지만, 이미 올 만한 손님은 다 와 있는 상태였다. 먼 곳에서 온 이들은 운트겔 저택에 머물기도 하고, 또는 수도에 친분이 있는 사람의 집이나 친척의 집에 머물며 나름대로 여행을 즐기거나 운트겔 가문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고자 무던히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날 때부터 무인 집안의 기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모조리 물려받은 가문의 주인은 그런 사람들의 접근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매우 정중하면서도 엄격하게 손님들을 대했다. 예외는 없었다.
아니, 예외가 하나 있긴 했다. 테오도르는 왠지 의기양양한 태도로 손님방의 한 곳을 차지하고 있는 에리히를 보며 이유 모를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뭐야? 내일이면 결혼하는 녀석이 웬 한숨을 쉬고 그래?”
무엇 때문인지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인가. 테오도르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에리히가 테이블 위에 얹힌 빈 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른 손을 병으로 뻗으려는 순간, 테오도르는 이미 가까이에 다가와 병의 마개를 따고 술을 따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리히가 픽 웃으며 말했다.
“집주인이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습관이 돼서 그렇잖습니까. 식은 내일인데, 폐하께서 왜 여기 머무십니까?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황궁이 있는데 말입니다.”
“불만이라도?”
있어도 없다고 대답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말을 하는 대신에 온 얼굴을 실룩여서 대답을 하고는 에리히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