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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43화 (143/191)

143화

드레스 한 벌로 손을 뻗으려던 아르사크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녀는 로즈안나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오랫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숨처럼 작게 말했다.

“돌아오신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방금 소식을 듣고 왔어요.”

“겨울은 길이 얼어 마차가 다니기도 쉽지 않은데 어딜 다녀오신 걸까? 로즈, 너는 짐작 가는 데가 있니?”

아르사크가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고 로즈안나도 그것을 알기에 침묵을 민망해하지 않았다.

가을 축제가 시작되기 얼마 전, 그러니까 아직 늦여름의 기운이 남아 있을 무렵 위든은 황궁을 떠났다. 영지로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뜻밖에도 여행을 떠날 예정이라고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 그 목적지도 정확하지 않았다. 에리히에게는 제국을 둘러보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새삼스럽게 뭐 하러 그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은 할 수 없었다. 제국은 무척이나 넓었고, 황제인 에리히조차도 지명은 속속들이 알되 아직 가보지는 못한 영지가 아직 많았다.

실제로 귀족들 중에는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제국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런 여행을 하면서 진귀하고 희귀한 볼거리나 상품들을 즐겼고, 수도로 돌아오면 연회를 열어 여러 번 여행담을 자랑하곤 했다.

위든은 황자였을 무렵에 제국의 절반 정도를 여행한 전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신분 때문에라도 섣불리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황실의 일원이되 이제는 먼 영지의 영주로서 보다 자유로워진 지금, 더 늙어 기운이 떨어지기 전에 기억에 남을 만한 여행을 하고 싶다는 숙부를 막을 이유는 없었다.

에리히는 허가했고, 위든은 그대로 수도를 떠나 겨울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따금 먼 곳에서 편지가 도착할 때도 있었지만, 수도와 워낙 멀리 떨어진 곳이라 보낸 날짜와 받은 시기가 며칠 이상씩 차이가 났다.

에리히가 그의 안위를 확인했을 때쯤에 이미 그는 그곳에서 훨씬 떨어진 곳까지 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는 데마다 들러 편지를 보내지도 않았다.

그런 위든이 지금 돌아왔다. 아르사크는 그가 없는 사이 잊고 있었던 긴장과 떨림이 다시금 몸속을 꽉 채우는 것이 느껴졌다.

에리히와 약속한 대로, 아르사크는 십 년 전 위든이 토르갈을 외면했던 일에 대해 그의 앞에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황실의 일원으로서 예를 갖추어 대했고, 위든에 대한 것을 몰랐을 때처럼 그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없었다.

위든 역시 아르사크와 과하게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을 서로가 모른 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걸로 해야겠다.”

아르사크는 푸른 남청색 드레스를 골랐다. 여름에 지은 것과 비슷한 색깔이었지만 겨울용으로 좀 더 따뜻하게 만든 것이었다.

로즈안나는 지체 없이 다가와 아르사크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등 뒤의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는 로즈안나는 말없이 조용했다.

“로즈.”

“네, 아르사크 님.”

“사소한 불행이 너를 짓누르게 놔두지 마.”

아르사크는 고개로 돌리지 않은 채 단지 그 한마디만을 했다. 그러나 로즈안나의 손은 이미 조용히 떨리고 있었다.

결혼식이 가까워질수록 로즈안나가 우울한 사람처럼 말수를 잃어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르사크뿐이었다.

로즈안나는 평민처럼 자신의 성을 대지 않았지만 신분상 여전히 귀족의 서녀였다. 그리고 그 부모들이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초대장을 보내기는 해야 했던 것이다.

로즈안나도 테오도르도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테오도르의 부모님인 운트겔 장군 부처의 생각은 달랐다. 어떤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결혼과 같은 중요한 일은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로즈안나는 어쩔 수 없이 오래전에 떠나온 집으로 결혼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뜻밖의 대답을 받았다. 결혼식에 아버지와 의붓어머니가 참석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로즈안나는 두려웠다. 그들이 결혼식에 참석하려는 이유는 뻔했다. 운트겔 가문에 줄을 대기 위해서일 것이다. 운트겔은 대대로 정치에 크게 관여하지 않으며 황제와 황실, 그리고 제국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온 집안이었다.

그러나 로즈안나의 아버지가 그런 것을 따져가며 예의를 차릴 사람은 아니었다. 로즈안나가 결혼식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당연했다.

“네가 왜 그들을 두려워해? 이제 그들은 너에게 아무 짓도 하지 못해.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네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어. 테오도르는 물론이거니와 폐하께서도 그걸 허락지 않으실 테니까.”

“하지만 아르사크 님, 저는… 전, 그분들이 아직도 무섭습니다. 아버지도… 그리고 어머니도요. 그분들은…….”

“로즈, 내 말 잘 들어.”

아르사크는 몸을 돌려 로즈안나의 양손을 잡았다. 눈물이 흘러 떨어지는 로즈안나의 뺨은 불안함 때문에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로즈안나가 고개를 들자, 아르사크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내가 너를 보호할 거야. 아무도 그날의 네게 해를 끼칠 수 없도록 내가 그 자리에 있을 거야. 너는 행복하게 결혼하는 거야.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고 단지 행복함을 즐기기만 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

“아르사크 님…….”

“너는 혼자가 된 나를 처음으로 돌봐준 사람이야.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나를 믿어주고, 내 말이라면 뭐든 따라주었지. 토르갈은 복수도, 은혜도, 결코 허투루 하는 법이 없어. 너는 나를 먼저 믿어줌으로써 내게 은혜를 베풀었지.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갚을 거야. 그러니까 너는 울 필요 없어. 무서워할 필요도.”

로즈안나는 고개를 숙이며 터져 나오려는 흐느낌을 겨우 삼켰다. 아르사크는 그제야 다정해진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로즈안나의 어깨를 살그머니 안아주었다.

111장 극의 전주곡 (2)

만찬 자리는 위든을 위해 열린 것이 틀림없었다. 참석한 귀족들은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모두 여행을 좋아하기로 사교계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인물들이라는 것을 아르사크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특히 니스 후작이라는 사람은 커다란 마차를 스스로 개조하여 그 안에서 식사도 하고, 심지어 발을 뻗고 편하게 누워 잘 수 있도록 침대까지 들여놓고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아르사크는 니스 후작의 마차가 궁금하긴 했지만 별로 신기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늘 이동을 하며 살아가는 유목민들도 역시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니스 후작의 마차처럼 푹신한 깃털 침대를 갖고 다니지는 않지만, 어쨌든 말을 타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 예를 들면 어린아이나 노인, 그 밖의 약자들을 위해 이동을 할 때 사용하는 커다란 마차가 따로 있었다.

그러나 때마다 사는 곳을 옮길 일이 없는 제국의 사람들에게는 마차란 그저 앉아서 타고 다니는 수단일 뿐, 그 안에서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하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여행을 할 때는 숙박할 곳을 찾아 머무르는 것이 기본이었다. 귀족들이라면 말이다.

“그것참 훌륭하군. 니스 후작이 여행을 각별히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은 바 있소. 이번에는 이동 중에 겨울이 되어서 숙박 문제가 참으로 절실했는데, 그럴 줄 알았더라면 떠나기 전에 후작가에 잠시 들를 것을 그랬군.”

위든이 농담하듯이 말하자, 니스 후작은 마치 다른 귀족들에게 과시라도 하듯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

“그래 주셨다면 염치불구하고 전하의 여정에 함께 따라갔을 것입니다. 겨울 여행이라니, 저도 생각만 해보았지 아직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했지요. 자칫 사고가 난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될 테니까요.”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함께 가도록 하지. 후작의 독특한 마차를 구경해 보고 싶군.”

위든도 굳이 이 화제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는 듯 함께 웃었다. 화기애애한 만찬이었다. 오가는 이야기도 모두 가벼웠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마치 체한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다. 위든에 대한 것을 함구하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그와 동석하는 식사 때는 늘상 느끼는 기분이었다.

“황후 마마께서도 분명 여행을 즐기시겠지요?”

니스 후작이 갑자기 아르사크를 돌아보며 말했을 때, 아르사크는 체리 소스를 뿌린 고기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다소 멍한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에리히가 작은 숨소리를 냈다. 그런데 여간해서는 들리지도 않았을 그 소리가 어디론가 달아난 것 같던 아르사크의 정신을 순식간에 되돌려 놓았다.

“그렇소.”

아르사크는 적당히 대답했다. 눈치를 보니 완전히 말도 안 되는 대답은 아닌 것 같았다. 니스 후작은 황후가 자신의 말에 대답을 했다는 사실이 기쁜 건지, 아니면 단순히 말이 많은 성격인 건지 잘도 떠들었다.

“그러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역시 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 많이 있겠지요? 저도 기회가 된다면 경계를 벗어나 사막 지역을 돌아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야만족이 많다 보니 좀처럼…….”

제 흥에 겨워 떠들던 후작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너무 늦게 깨달았다. 다른 귀족들, 심지어 위든마저도 모조리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 니스 후작의 얼굴은 보기에도 불쌍할 지경으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식기를 와장창 떨어트리며 당장 식탁 아래에 무릎이라도 꿇을 듯이 덜덜 떨었다.

“요, 용서를… 황후 마마, 제가 그만, 해, 해서는 안 될 실언을… 했습니다. 부디… 부디 용서를…….”

“사막을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소.”

아르사크는 한쪽에 놓여 있던 냅킨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입가를 닦으며 조용히 말했다. 분노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웃음기도 없었다. 그 알 수 없는 무표정함이 더욱 두려웠다.

니스 후작은 후들후들 떨면서 경우에도 맞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사크는 냅킨을 내려놓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만약 떠나게 된다면 언제라도 입을 닫을 수 있도록 단추라도 꿰어 가는 것이 좋겠군. 그대가 말하는 ‘야만족’들은 남의 모욕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니 말이야. 그들이 모욕의 대가를 어떻게 돌려주는지 궁금하지 않나? 입조심을 하라는 뜻에서 가르쳐 주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니스 후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르사크를 쳐다보기만 했다. 상호 간의 예의인 경어조차 쓰지 않고 있는데도 누구 한 명 새삼스레 쳐다보지도 못했다.

아르사크는 손끝으로 입술의 한쪽 끝을 살짝 짚었다가, 그대로 귀까지 죽 긋는 시늉을 했다. 무엇을 뜻하는 동작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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