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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42화 (142/191)

142화

“전하께서 이렇듯 에레벤나를 섬기는 자들을 헤아려 주시니, 그들을 대표하여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듀터스가 짤막하게 인사를 하자 위든은 예의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신께서 우리의 곁에 함께하시는데 그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면서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도 언젠가는 이 점을 깊이 깨닫는 날이 오실 것입니다. 그것을 앞당기기 위해 듀터스 님께서 하실 일이 아주 많겠지요.”

듀터스는 위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비로소 그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위든을 바라보았다.

이자는, 황제의 숙부는, 자신으로 하여금 황제를 계속해서 압박할 것을 권고하고 있었다. 차분하고 인자한 표정에는 단 한 가닥의 균열도 없었다.

110장 극의 전주곡 (1)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다. 카툴라는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찬 바람이 불어오기 직전에 열흘의 기간 동안 큰 축제를 벌이는 풍습이 있었다.

카툴라는 겨울이 찾아옴과 동시에 한 해가 끝난다고 믿었다. 그리고 다음 봄이 찾아와야 비로소 다시 새로운 해가 시작된다. 인근의 여러 나라들이 열두 달, 혹은 열세 달로 한 해를 나누는 기준에 맞추어 생각해 본다면 카툴라의 한 해는 고작 아홉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카툴라에서 겨울은 없는 시간이었다. 눈이 내리고 춥고, 해가 떠 있는 시간은 무척이나 짧고 두려운 밤은 길었다. 그래서 제국의 사람들은 겨울을 나는 동안 자신들이 잠시 죽어 있다고 생각하는 오랜 풍습이 있었다. 일상은 아무런 변화 없이 계속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춥고 차가운 겨울을 삶의 일부분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결혼식이 열리지 않았다. 겨울에 맺어진 이들은 평생을 불행과 불화 속에 살게 된다는 속설을 누구나가 의심 없이 믿었다. 그래서 카툴라의 겨울은 흔히 ‘침묵하는 겨울’이라 불렸다.

침묵하는 겨울은 황실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그런 속설이 있다는 것을 로즈안나에게 전해 듣고서도 딱히 개의치 않았다.

아니, 개의치 않을 뿐만 아니라 희미하게 비웃기까지 했다. 아르사크가 생각하기에 침묵하는 겨울이란 풍요로운 이 땅에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말은 제국의 경계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그곳을 고향으로 삼아 살아가는 자들에게 훨씬 더 어울릴 법한 말이었다.

속설이 어쨌든 시간은 내버려 두기만 하면 그대로 흘러간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음을 가장 먼저 알리는 것은 낮의 길이였다.

조금씩, 조금씩, 해가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음을 느낀 사람들은 마치 겨우내 웅크렸던 작은 짐승들처럼 서서히 몸을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농사를 짓는 지역에서는 파종할 씨앗을 준비하고, 겨우내 연인과 애타는 눈빛만 주고받았던 이들은 환희로 가득 찬 봄의 햇살 아래 새로운 가족이 될 기대에 들뜨기 시작했다.

테오도르와 로즈안나도 그런 연인들 중의 하나였다.

“마마! 저 왔어요!”

소파에 나른한 자세로 앉은 채 장인이 내놓은 물건들을 하나씩 살피고 있던 아르사크가 고개를 들었다.

앳된 얼굴은 그대로지만, 옛날처럼 머리를 풀어 내리지 않고 하나로 땋은 다음 위쪽으로 둥글게 틀어 올려 한결 차분해 보이는 루이제가 명랑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를 곁에서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시녀들은 루이제의 거침없는 태도에 속으로 기함했지만 아르사크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태연히 그녀를 맞았다.

“왜 이렇게 늦어? 네가 늦는 바람에 우리 둘이서 이 많은 걸 다 보고 있었잖니.”

루이제는 배시시 웃고는 아르사크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에셴 랜크버 백작 부인에게도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집안의 위세로 따지면 루이제는 에셴에게 그보다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게 마땅했지만, 에셴도 그런 것을 시시콜콜 따지는 성격이 아니었거니와 애초에 상대가 루이제인만큼 정중한 태도를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다.

“와, 굉장히 훌륭한 상품들이네요.”

루이제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렇게 말하자, 아르사크와 에셴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의미심장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과연 이런 일에는 루이제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적어도 그들 셋 중에서는 말이다.

루이제는 테이블 위에 빈틈없이 놓인 수많은 장신구와 부채, 그리고 보석함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로즈안나의 혼수 중 마지막으로 결정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브로치는 무조건 열 개 이상은 가지고 있어야 해요. 차차 수를 늘려 가면 되지만, 그래도 무조건 열 개예요. 이 이하로는 안 돼요.”

아르사크와 에셴은 왜 열 개인지 되묻지도 않았다. 그들은 언젠가부터 이런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루이제의 의견을 그냥 따르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굳이 절약할 필요가 있다면 모를까, 로즈안나를 위해 황녀에 버금가는 예단을 마련하기로 이미 결정이 난 상태다. 그렇다면 평소 아르사크와 에셴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금액을 아낌없이 써야 했는데, 그들 둘 다 사치품을 사들이는 데에는 익숙하지 못했지만 루이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가장 비싸고 가치 있는 것을 고르는 데에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수도 없이 많은 물건을 한꺼번에 가지고 와도 정확한 안목으로 남들의 부러움과 경탄을 살 만한 것들을 귀신같이 골라내는 재주가 있었다. 심지어 그 작업을 피로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부채는 당장은 많이 필요하지 않으니 예닐곱 자루 정도면 돼요. 때마다 유행하는 재질이 바뀌니까 차라리 새것이 꼭 필요한 시기가 되면 그때 가장 유행하는 걸 사는 게 맞죠. 하지만 뭐가 유행하든 늘 뒤떨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거든요.”

루이제는 누가 듣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재잘거리면서 장인이 내놓은 부채를 하나씩 유심히 살폈다. 로즈안나의 인상과 취향을 고려해 고른 다섯 자루의 부채는 주로 깃털과 레이스로 장식된 것들이었다.

아르사크나 에셴이 보기에는 비슷해 보였지만 루이제의 말에 따르면 세공 방식도, 재료의 출처도, 그리고 사용하기 좋은 장소나 계절도 모두 다른 것들이었다.

“남작이 계셨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제 동생은 혼수가 다 갖춰지기만 목 빠지게 기다리다 홀로 늙어 죽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건을 고르는 일이 끝나고 차를 마시면서 에셴이 한 농담이었다. 누나가 동생에게 하는 농담치고는 좀 지나친 감이 있다 싶었지만, 아르사크는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루이제조차도 에셴의 그런 성격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상태였다.

루이제는 이미 결혼을 해서 더 이상 ‘루이제’라는 이름만으로 불리지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백작 부인께서는 늘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네요.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지요?”

“다행히 혼수는 다 갖출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제 문제는 본인의 인내심이지요. 어찌나 안절부절못하는지, 언젠가 한번은 아버지께서 그 애를 타이르셨습니다. ‘좋은 일을 앞두고 그렇게 초조해하면 들어오려던 기쁨이 질려 달아나고 만다.’고 말이에요.”

“그게 정말인가요?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초조해지는걸요.”

“그걸 참을 수 있어야 진정한 기쁨이 온다는 뜻이겠지. 뭐든 너무 많이 기대하면 나중에 실망스러운 법이잖니.”

아르사크가 말했다. 루이제는 그런 격언을 이해하기에 아직도 너무 철이 없었다. 하지만 철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죄는 아니고, 루이제는 오히려 그렇게 천진난만한 모습이 더 잘 어울렸다. 당장만 해도 에셴이 했던 말은 까맣게 잊은 듯이 열심히 종알거리고 있었다.

“날씨가 완전히 풀리면 카른과 함께 위트레트로 여행을 가기로 했어요. 아! 물론 위트레트만이 목적지인 건 아니죠. 거긴 정말 조용하고 지루한 곳이거든요. 하지만 카른의 고향이기도 하니까 이참에 둘러보고 오려고요. 무엇보다도 제 영지잖아요? 길을 돌아서 위트레트로 갈 거예요. 가는 길에 멋진 휴양지들도 잔뜩 있대요. 얼마나 신날지 벌써부터 여행 준비를 하느라 잠도 안 올 지경이에요.”

성큼 다가온 봄기운에 마음이 들뜨는 것은 평민들이나 귀족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르사크와 에셴, 루이제는 곧 다가올 로즈안나와 테오도르의 결혼식에 대해 시답잖은 담소를 나누고 헤어졌다.

황제와 황후가 모두 관여하여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이라는 결혼식의 주인공, 로즈안나는 여전히 황궁에서 아르사크의 최측근 시녀로 일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결혼식을 기다리다 목이 빠질 지경이라는 테오도르에 비하면 그녀는 식이 치러지는 날짜가 다가올수록 점점 더 차분하고 조용해졌다. 예전에도 루이제처럼 명랑하게 떠드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조용해지니 왠지 우울해 보인다는 의견도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일 결혼, 그것도 모자랄 것 없이 빼어난 상대를 두고 로즈안나가 왜 근심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지 아무도 진실을 몰랐다.

“아르사크 님, 만찬 때 입으실 옷으로 갈아입혀 드리겠습니다.”

책을 읽고 있던 아르사크는 로즈안나를 올려다본 뒤 뒤이어 몸을 일으켰다. 아르사크는 별다른 일도 없는데 때마다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을 아는 로즈안나가 굳이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별다른 일’이 오늘은 있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황궁에서 산 것도 벌써 일 년의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아르사크는 많이 변했다. 중요한 것은 그대로였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큼은 처음 왔을 그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옷을 고르는 일을 직접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그 달라진 점 중 하나였다. 로즈안나는 더 이상 아르사크에게 이럴 땐 이런 옷, 저럴 땐 저런 옷 하는 식으로 조언을 해주지 않아도 되었다.

“만찬에 누가 참석하지?”

드레스를 바라보며 아르사크가 물었다. 로즈안나의 대답은 곧장 나왔다.

“라바트 남작 부처, 니스 후작, 슈트르 남작 부인, 그리고 디몰트의 공작께서 참석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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