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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41화 (141/191)

141화

“에레벤나의 은총을 받으시고 모든 법과 군중 위에 군림하시는 황제 폐하께 인사를 드리나이다.”

잠시 후 나타난 듀터스는 속내야 어떻든지 간에 황제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예를 다했다. 에리히 역시 평소처럼 대놓고 그를 적대시하는 태도를 지우고 신관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기도하듯 절을 했다.

지켜보고 있던 신관들이 뜻밖일 정도로 유순해진 에리히의 태도에 놀라서 웅성거렸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여느 때와 달리 에리히와 듀터스가 서로에게 최대한 정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선 신관들이나 시종, 테오도르조차도 마음을 놓기 힘든 팽팽하고 엄숙한 긴장이 느껴졌다.

“폐하께서 저를 찾아오셨다는 것은 어떤 방향으로든 분명한 결정을 내리셨다는 의미겠지요.”

듀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에리히는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그들의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로 깍지 낀 손을 얹었다.

“그렇습니다.”

“어떤 결정입니까?”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 순간만큼은 에리히의 시종들보다도 신관들이 더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에리히가 결코 듀터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미리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지방의 수도원장들이나 수도사들이 신관들을 지지하긴 하지만, 그들 모두가 수도로 상경하여 함께 신전에서 농성이라도 해주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황궁 내부에서의 싸움이니만큼, 확실히 유리한 쪽은 에리히다. 그들도 듀터스와 마찬가지로 신앙심이 두터운 자들이었지만, 현실의 권력자가 내리는 판결이 신의 축복보다 훨씬 빠르다는 사실은 잘 인지하고 있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다음에 튀어나온 에리히의 말에 신관들이 놀란 것도 당연했다.

“그대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요.”

듀터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없는 그조차도 에리히가 이토록 순순히 백기를 내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리히는 뒤이어 말했다.

“단, 한 가지만입니다. 신관과 수도사들의 임명과 해임에 대한 명령권을 전적으로 최고 신관에게 위임하고, 황제를 비롯한 그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다.”

에리히는 자신이 방금 말한 것을 똑똑히 주지시키려는 것처럼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 안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관을 선택하는 데에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최고 신관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물론, 듀터스 님에 대한 나의 신뢰가 있기 때문이고요. 듀터스 님, 그대가 말씀하신 것처럼 에레벤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면, 내가 그대에게 가지는 이 신뢰 역시 신의 인도하심이겠지요.”

그것은 교묘한 말이었다. 듀터스조차도 에리히의 의중을 재빨리 판단하지 못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에리히는 방금 전과 달리 이번에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듀터스 님께서는 모든 것을 에레벤나의 뜻에 맡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에레벤나를 섬기는 모든 자들이 상기해야 하는 잠언이기도 합니다.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요구했던 모든 것들이 다 에레벤나의 뜻임을 증명할 수 있으십니까? 그 요구 사항에, 듀터스 님 본인의 사리사욕은 단 한 치도 섞이지 않았다고 신 앞에 맹세할 수 있습니까?”

듀터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에리히의 속셈을 이제야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소리 높여 주장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듀터스는 왜 에리히 쪽에서 스스로 자신을 찾아왔는지를 깨달았다.

이 상황 자체가 하나의 연출이었던 것이다. 에리히가 신전을 찾아와 듀터스 앞에서 보기 드물었던 예의를 갖추었던 것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제 쪽에서 먼저 그의 요구를 받아주겠다고 말한 것도.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에리히가 그런 결정을 내릴 것이라 기대한 사람은 없었다. 신관들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술렁거리는 것이 듀터스에게도 느껴졌다.

“대답하지 못하신다 하더라도 듀터스 님을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황제로서, 그리고 에레벤나를 섬기는 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듀터스 님께서 가지셔야 마땅한 권한을 존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 것도 어쩌면 에레벤나의 인도하심이겠지요.”

듀터스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했던 말이 그대로 덫이 되어 발목을 잡은 셈이다.

신앙이란, 현실적인 증명을 논하게 되는 순간부터 말 그대로 애매모호한 무언가가 되고 만다. 믿는 자들에게는 증명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한 일이지만, 믿지 않거나 잘 모르는 자들, 현실의 논리에 얽혀 있는 자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증명만이 정답이요, 해결책이다.

“듀터스 님께서는 일전에 제게 황후에 대해 논하시며 에레벤나께서 그녀를 특별히 보살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황후에 대하여 에레벤나의 현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나 저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에레벤나께서는 신앙으로 섬기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또한 특별히 여기시는 신입니다. 듀터스 님께서 제게 직접 가르치셨던 부분이니 아마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황후 한 사람만이 에레벤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말씀은 앞으로도 부디, 삼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황후는 에레벤나의 광휘 아래 보호를 받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일 뿐,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며, 에레벤나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존경과 신임을 받는 듀터스 님께서 확신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셨다가, 다른 이들의 오해라도 받게 되신다면 크게 곤란한 일일 테니까요.”

이로써 더 이상 아르사크를 끌어들일 수 있는 길도 묘연하게 되었다.

에레벤나는 은혜롭고 공평하며, 또한 정의로운 신이라 알려져 있었다. 제국의 어머니가 될 황후를 직접 선택하는 것도,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가장 현명한 자를 대신 가려준다는 의미일 뿐이지 특별히 황후가 될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힌 그 예식의 진정한 의미를 에리히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틈도 없었다. 듀터스는 에리히가 자신에게 대답을 요구하며 침묵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분하지만, 선택지는 두 개뿐이었다.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싸울 것인지. 결론은 간단했다.

“폐하의 말씀을 잘 알겠습니다. 에레벤나의 지혜를 빌려 현명한 판단을 하셨습니다. 신을 모시는 자들을 대표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내게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자들이 신의 은총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듀터스 님의 직분이고, 그 직분을 누구보다 잘 수행하시리라 믿고 있으니까요.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에리히는 신전에 들어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일어섰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침묵하는 듀터스를 내려다보는 표정에는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지막에 그가 말한 ‘신의 은총’이 에레벤나를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듀터스 혼자뿐이었다. 원하는 것을 일부 얻었으나, 그에게 남은 감정은 수모뿐이었다.

에리히가 돌아간 후, 듀터스는 신관들을 모두 물리고 자신의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황제의 오만함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는 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관이었다. 개인적인 복수나 음험한 모함 같은 것은 듀터스의 천성과 어울리지 않았다.

신 앞에서 불경한 자에게 신의 벌이 내리기를 기도하며 저주의 말을 퍼부을 수는 있어도, 직접 칼을 들고 달려들어 그의 목에 꽂지는 못할 그런 사람인 것이다. 어쩌면 그의 타고난 선량함, 불가해할 정도로 꼿꼿한 도덕심조차도 신의 안배일지 몰랐다.

시중을 드는 어린 신관이 다시 듀터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방문자가 또 있다는 소식이었다.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신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 날이다. 그러나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찾아왔는지 듣자마자 듀터스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전하께 에레벤나의 끝없는 은총의 빛이 함께하시기를.”

듀터스는 기도하듯이 손을 모으는 인사로 방문자를 맞았다. 그를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위든이었다. 위든은 에리히와 달리 진심을 담은 정중한 몸짓으로 신관을 향한 인사를 한 뒤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아침 일찍 신전을 다녀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현명하신 폐하께서는 앞으로 신관과 수도사를 임명하는 중요한 임무에 대한 책임을 제게 주셨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감사드릴 일이지요.”

“그렇군요. 저로서는 폐하께서 더 오래 고집을 부리실 줄 알았는데 이토록 빠른 결정을 내리셨다니 에레벤나와 신관분들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입니다.”

위든의 말에 듀터스는 뭔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그가 어떻게 자신과 에리히 사이에 오간 협상의 내용들을 다 아는 듯이 말한단 말인가?

신관들은 기본적으로 황궁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일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디몰트의 공작이자 에리히의 하나 남은 숙부인 그가 황궁에 도착한 지 이제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듀터스는 위든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정치 세력의 판도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일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듀터스 자신이 권력이나 힘의 논리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힘을 가진 자에게 아첨하지 않고, 천하고 약한 자를 모질게 대하지 않는 듀터스는 인간의 내면을 다른 사람들보다도 잘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가 신 앞에서 오만불손한 에리히를 이제껏 참고 넘어가 준 것도 어느 정도는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에리히는 신에 대한 존경심이라곤 한 톨도 없지만, 탐욕스럽게 실리를 따지는 부패하고 잔인한 황제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위든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에리히의 것과 성질이 달랐다. 듀터스는 그의 평온하고 현자 같아 보이는 얼굴 아래에 미처 헤아릴 수도 없는 무시무시한 욕망이 몸을 숨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욕망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까지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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