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아르사크는 바로 옆의 침실로 건너갔다. 황궁 안에는 수도 없이 많은 방이 있었다. 침실, 서재, 응접실, 그 이외에도 용도가 다양한 크고 작은 방들이 어딜 가나 존재했으므로 어디서 잠을 잘 것인지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빈방이었지만 깔끔하게 치워져 있는 데다가 언제, 누가 들어와도 괜찮도록 정돈이 되어 있었다. 창문을 열자 눅눅하긴 해도 밤바람이 불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이상한 꿈이었다. 아르사크는 문득 소스라치며 깰 만큼 악몽을 꾼 것도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물. 처음에는 분명 눈이 부실 만큼 푸르른 강물이었는데, 그를 다 삼킬 즈음에는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아르사크는 자신의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주먹을 쥐었다. 꿈속에서 한순간 그를 붙잡았다가 놓쳐버렸을 때의 감각이 떠오르자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꿈속의 에리히는 아직 어렸다. 열두어 살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물속으로 끌려들어 가면서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겁을 내는 기색도 없었다. 왜 그랬을까. 역시 꿈이었기 때문에?
가장 그럴싸한 이유였지만 아르사크는 왠지 기분이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왠지 에리히를 구하지 못한 그 꿈이 현실인 것만 같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지금의 현실이 꿈인 것처럼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도로 침대에 눕지 못한 채 방을 서성이던 아르사크는 촛대조차 잊고 바깥으로 나갔다. 정원에 켜놓은 횃불들의 붉은 그림자가 창문가에 어른거렸다.
에리히의 침실은 늘 같은 곳이었다. 암살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머무는 곳을 불규칙하게 바꾸는 황제가 많았지만 그는 무슨 고집에선지 좀처럼 다른 곳에서 자는 경우가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이따금 아르사크의 방으로 찾아올 때가 전부였는데, 그런 때에도 그는 혹시나 모를 위험한 상황 같은 것을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 뼘 정도의 거리에서 등을 돌린 채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르사크는 이따금 손을 뻗어 뺨을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양초 하나 켜지 않은 어두컴컴한 방이었지만 아르사크는 창문에 비친 달빛만으로도 에리히의 얼굴을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문간에서 아르사크를 들여보낸 병사들 이외에는 아무도 그녀가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르사크는 에리히가 익숙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에 일단 안도했다. 그의 방 어디에서도, 함부로 흐른 물 한 방울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에리히는 깊은 잠에 빠졌는지 숨소리도 고요했고, 이따금 천천히 솟았다 다시 꺼지는 어깨의 움직임을 제외하면 움직임도 없었다.
아르사크는 침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앉은 자리가 푹신하게 아래로 가라앉는다. 달빛 때문인지 창백해 보이는 뺨으로 손을 뻗어본다. 손끝이 코 아래에 닿자 간지러울 만큼 작은 호흡이 느껴졌다.
아르사크의 손이 입술 위를 살짝 스치고 턱 가까이에 닿은 순간, 깊게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에리히의 눈이 갑자기 번쩍 뜨였다. 번개같이 손목을 잡아챈 에리히는 놀란 표정의 아르사크를 보자마자 허탈한 한숨을 짧게 내쉬며 미간을 찡그렸다.
“…사람 좀 그만 놀래켜. 간 떨어지겠군.”
“보기보다 엉큼한 구석이 있으시군요. 완전히 곯아떨어지신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얼마나 담이 커야 이런 방에서 마음 편히 곯아떨어질 수 있지? 믿기지가 않는데.”
아르사크는 그 말의 의미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에리히는 마음 놓고 잠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이다. 자신의 침실에서 잠을 잘 때조차 편하게 쉴 수 없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에리히는 잠이 달아난 얼굴을 한 채 아르사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뭔가 고민하는 것처럼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갑자기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아르사크는 무심해 보이는 눈으로 에리히를 내려다보다가 그의 가까이로 가 다리를 뻗고 누웠다. 허공에 떴던 팔이 약간 어색한 동작으로 아르사크의 몸을 감싸 안았다.
“안 자고 여긴 왜 왔어?”
“잠이 안 와서요.”
“따뜻한 물이라도 가져오라고 할까?”
“아뇨.”
고개를 젓고 나니 왠지 기분이 착잡했다. 분명 꿈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꿈속에서 느꼈던 무력감과 두려움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에리히도 아르사크의 불안을 감지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평소의 그녀와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가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탓이었다. 강하고, 두려움이 없고, 어떤 것에도 맞설 수 있는 황후는 지금 여기, 이 자리에는 없었다. 그 대신 무엇 때문인지 심하게 겁에 질린, 연약해진 아르사크만이 존재했다.
에리히는 어설프게 안았던 팔을 풀면서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왜 그러지?”
에리히가 묻자 아르사크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러나 에리히는 그런 얕은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아예 자세를 고쳐 앉더니 방금 전에 누운 아르사크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앉혔다.
비슷한 모양의 흰 잠옷을 입은 성인 남녀 둘이, 나란히 무릎을 맞댄 채 한밤중에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은 퍽 우스웠으나 에리히의 표정은 심각했다.
“오늘따라 왜 이상하게 구느냐고.”
“제가 뭘 어쨌기에?”
“그건…….”
추궁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문은 열었는데 막상 할 말이 궁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실제로 아르사크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평소와 좀 다른 점이라면 에리히가 자는 동안 그의 방 안에 몰래 들어온 것과, 잠든 얼굴을 만지려는 것처럼 손을 뻗은 것, 그리고 순순히 품에 안겨 온 것 정도일까.
아니, 역시 이상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몰라도.
“다 이상해.”
하지만 표현할 말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아르사크는 별 웃기는 소리도 다 듣겠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혹시 어릴 때 물에 빠지신 적은 없었나요?”
뜬금없는 질문에, 에리히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건 갑자기 왜 묻지?”
“대답이나 해주세요.”
“없는 것 같은데. 아, 한 번 있었군. 분수대에서 장난을 치다가 미끄러져서 빠진 적이 있지.”
“강물에 빠진 적은요?”
에리히는 점점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없어. 한 번도.”
“혹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말끝을 흐린 아르사크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에리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리히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는 순간, 아르사크가 그의 무릎을 짚으며 몸을 약간 기울였다.
“나를 불러요. 반드시.”
“…그대가 물의 요정이라도 되나? 물에 빠졌다고 이름을 부르게?”
“요정은 아니지만 당신을 구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니 나를 불러요. 조용히, 혼자 가라앉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에리히는 문득 아르사크의 눈동자가 기이한 색으로 빛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그런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신은 항상 우리의 곁에 계심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폐하.’
왜 이런 때에 듀터스의 말이 생각나는 걸까? 그것도 자신이 아주 어렸을 적에 그로부터 들은 말이다. 그때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 지금도 믿지 않는 것은 여전하지만, 에리히는 한순간 달라 보였던 아르사크의 눈빛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속 깊숙한 곳,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어딘가에 박혀버린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에리히는 여전히 신은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있더라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르사크 역시도 에레벤나의 현신 따위가 아니다. 인간의 이해로는 판단할 수 없는 일이 그녀의 주변에서 벌어졌다 하더라도 순간의 일일 뿐.
그러나 아르사크가 겪어야 하는 모든 일은 현실이었다. 그녀가 겪어온 일도, 앞으로 겪어야 할 일도. 신이 아르사크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아르사크를 지켜줄 수 있는 존재는 신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르사크는 무엇 때문에 고통을 겪었단 말인가?
“약속하지. 그러나 그대도 나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줘야겠다.”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와 계약한 기간이 다 끝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디로도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해. 설령 에레벤나가 그대를 부른다고 해도 뿌리치고 돌아오겠다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르사크는 조금 놀랐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 듯 모를 듯, 무디고 어렴풋한 짐작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문득 아르사크는 오늘 밤, 에리히도 자신과 비슷하게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약속하지요. 어디의 어떤 신이 부른다고 해도, 설령 나를 신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해도, 폐하와의 첫 약속을 마치기 전까지는 아무 데도 가지 않겠어요.”
109장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 (10)
아침 일찍, 에리히는 최고 신관인 듀터스를 찾았다.
황실 신관들이 머무는 에레벤나의 신전은 황궁 안에 있으면서도, 또한 없는 취급을 받았다.
규칙상 에레벤나께 기도를 올리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언제든 신전을 드나들 수 있었지만, 황궁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 신전에까지 들러 기도를 올리는 사람이 극히 드문 탓이었다.
시종들은 자신들보다 까마득히 높은 위치에 있는 신관들보다 차라리 한 달에 한두 번 휴가를 얻어 수도사들을 찾아가는 게 마음 편했고, 귀족이나 황족들은 대체로 평상시에도 신전에서 기도를 올릴 만큼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이 없었다.
에리히가 제 발로 신전을 찾아온 것은 즉위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황태자였을 시절에도 장난삼아 몇 번 기웃거려 본 것이 전부일 뿐, 기도를 하기 위해 신전을 찾아온 일은 없었다.
그러니 신전의 신관들이 에리히의 모습을 보고 한순간 얼빠진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했다. 심지어 지금은 양쪽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듀터스조차도 에리히가 먼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펜을 들고 있던 손을 가만히 멈추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총기가 흐려진 적 없는 눈동자가 노회한 협상가의 그것처럼 잠깐 번득였으나 소식을 전하러 온 나이 어린 신관은 미처 듀터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