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에리히와 아르사크, 위든, 그리고 황궁의 몇몇 귀족들이 다 함께 참석한 만찬 자리는 화기애애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주로 위든이었다. 그는 술을 마셔서인지 평소보다 말이 많았고 다가가기 쉬운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왠지 위든의 그런 행동이 꾸며낸 것 같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조그만 잔에 담긴 복숭아술을 마지막으로 식사가 모두 끝났다. 이제 밤이 깊을 때까지 삼삼오오 모여 카드 게임을 하거나, 정치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면 피아노 연주를 하며 가벼운 술을 즐기는 모임이 이어질 차례였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참석을 사양했다. 위든과 계속해서 같은 공간에 있다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예상치 못했던 말이 튀어나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길고 텅 빈 복도를 따라 혼자 걸으면서 아르사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지, 또한 자신이 누구인지를 점차 잊어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목덜미가 쭈뼛하게 저려 왔다.
만찬장에서 황후의 침전으로 가는 복도에서는 별궁의 서쪽 측면을 볼 수 있었다. 맨 위층 창문에서 아르사크의 시선이 멎었다.
유리 아래쪽에 장난스럽게 붙어있던 색유리의 알록달록한 색깔을 떠올리자마자 에리히의 얼굴도 뒤따라 떠올랐다. 홀릴 만큼 강렬하게 타오르던 노을에 자신도, 에리히도 꼼짝 못 한 채 휩싸여 있었다.
마주쳤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아르사크는 불안과 설렘이 동시에 자신을 덮치는 듯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마치 원치 않는 물건이 들었음을 아는 선물의 포장을 풀기 직전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틀림없이 허탈해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상자의 뚜껑을 열어버리고 말 때처럼.
아르사크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을 물리는 동안, 에리히도 멀어지는 아르사크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반쯤 후회하고 있는 듯한 표정 역시도 둘 다 비슷했다.
‘굳이 변명하지는 않겠어.’
에리히는 그렇게 말했다. 아르사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실, 어떤 말이었다 해도 그 상황에서는 모두 부적절했을 것이다.
영원할 것처럼 길던 노을이 물러가기 시작하면서, 에리히의 오른쪽 뺨 위에서부터 서서히 그늘이 드리우는 것이 아르사크의 눈에도 보였다.
에리히는 이어 말했다.
‘왜 거절하지 않았는지 따져 묻지도 않을 거고. 내가 그대를 사랑하게 된 데에 그럴싸한 이유를 붙일 수 없듯, 그대가 나를 밀어내지 않은 데에도 아마 정확한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것은 아르사크가 평소 들어왔던 에리히의 목소리와 아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것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이제 와서 약속을 없던 일로 해달라고 하진 않을 테니 그건 안심해도 좋아.’
약속. 그렇다. 아르사크는 새삼스럽게 그때의 기분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가볍게 떨었다.
자신은 어차피 떠나야 할 사람이었다. 에리히에 대한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하든 말든, 이전과 달리 에리히가 낯선 애정 표현을 보이든 말든, 그런 것은 결국 아르사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지금의 아르사크는 잠시 황후의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에 불과했다. 그리고 또한 관객이기도 했다.
약속된 시간이 모두 끝난 뒤에는 배우도, 관객도, 무대를 뒤로한 채 떠나는 것이 규칙이다. 극이 끝난 극장에 더 머무른다고 해봐야 텅 빈 무대에는 불이 켜지지 않을 것이었다.
희극도 비극도 아닌 이 연극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가장 고대하는 사람은 아르사크 자신이다. 일단 막이 내려오고 나면, 남은 관객들이 아무리 애타게 자신을 부른다 하더라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이 극장을 떠나버리리라.
하지만 그 생각을 하면 어느 순간 마음이 아릿해짐을 느꼈다. 조금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나는…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아르사크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쳤다. 자신의 방에서는 별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잰걸음이었다가, 나중에는 아예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황후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는 아연실색하며 우왕좌왕 그 뒤를 따랐다.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았던 것이다.
철컥거리는 발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챌 듯 가까이에서 들리고, 병사들이 연신 아르사크를 불렀지만 아르사크는 그중 어떤 것도 듣지 못했다.
황궁의 복도는 너무 길었다. 마침내 별궁의 귀퉁이마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르사크는 단 한 번을 쉬지 않았다.
“마마.”
시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자신의 시중을 드는 아이 중 한 명이었다. 아르사크는 그제야 앞뒤로 모여든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앞에는 시녀들, 그리고 뒤에는 병사들.
“다들 물러가. 아무 일도 아니니까.”
“하오나 황후 마마…….”
“가. 그냥 답답해서 한번 뛰었을 뿐이야. 그건 그렇고, 보초들이면 발이 좀 더 빨라야 하는 것 아니야? 나도 앞지르지 못해서야 제대로 경비를 설 수나 있겠어?”
아르사크는 짐짓 화난 표정으로 꾸중하는 시늉을 했다. 병사들은 사색이 되어 저희들끼리 눈치를 보고 있다가 후다닥 흩어지고, 시녀들은 숨을 몰아쉬는 아르사크를 황급히 방으로 부축해 들어갔다. 물을 떠 오고, 수건을 차갑게 적셔오고, 편한 옷을 가져오느라 법석이었다.
아르사크는 소파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에리히의 얼굴, 위든의 얼굴,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차례로 눈앞을 맴돌다 빙빙 돌며 까만 점이 되었다.
108장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 (9)
아르사크는 꿈을 꾸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르사크는 어렸고, 이제 막 말타기를 배워 겁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더 큰 말의 등에 올라탄 채 아르사크는 한참을 신나게 달렸다. 푸른 풀밭과 시원하고 넓은 강, 끝도 없이 펼쳐진 것 같은 바위 사막이 한데 뒤섞인 곳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단지 무척 기분이 좋았다. 이대로 계속 달리면 언젠가 땅이 끝나는 곳에도 닿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삐를 쥔 채 정신없이 말을 달리던 아르사크는 멀찌감치 떨어진 강가에 혼자 오도카니 앉아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얼핏 보기에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소년인 것 같았다.
아니다, 소년이라니? 아르사크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이미 어른인데, 어떻게 소년과 나이가 비슷할 수 있단 말이지?
그제야 고삐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다본 아르사크는 깜짝 놀라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자신의 손이 너무도 작았다. 팔목도 가늘었으며 키도 조그마했다. 나뭇가지처럼 가느다란 손목에는 어린아이들의 건강을 비는 색실로 된 액막이 팔찌도 감겨 있었다.
아르사크는 순간적으로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생각만 했던 것이 곧장 입을 통해 말이 되어 튀어나왔다.
“말도 안 돼.”
그 순간 강가에 앉아 있던 소년이 벌떡 일어나더니 아르사크를 향해 돌아섰다. 황금빛의 결 좋은 머리카락이 살랑이는 바람에 흔들리고, 눈동자는 강물을 길어다 부어놓은 것처럼 파르라니 빛나는 소년이었다.
꼭 다문 입매는 고집스러운 것 같지만, 올올이 섬세한 속눈썹 때문인지 그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아르사크는 그 소년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히 알고 있었을 텐데.
그때 소년의 발밑에서 강물이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니 풀밭도, 바위 사막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소년이 서 있는 곳은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아니, 마치 그가 땅 밑으로 서서히 꺼져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르사크는 말을 재촉해 그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에게 단 한 걸음도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안 돼!”
아르사크는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이제 머리밖에 보이지 않는 소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섭게 불어난 강물은 소년을 중심으로 소용돌이가 되었다.
아르사크는 자신의 손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는 것을 보았다. 소년의 어깨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아르사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에리히!”
그리고 그 순간 아르사크는 생각했다. 아, 이건 꿈이로구나.
소스라치며 눈을 뜬 아르사크는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으로 짚어보니 누웠던 자리가 축축했다. 시트가 몽땅 젖을 만큼 식은땀을 흘린 것이다.
아르사크는 황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이 깔려 고요한 침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가로놓인 선반 위에 밝혀놓은 양초에서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이따금 무거운 침묵을 헤집어놓았다.
아르사크는 협탁을 더듬어 물병을 찾으려 했다. 그러다 그만 손을 헛짚고 말았다. 챙! 하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위쪽으로 튀어 오른 물방울이 아르사크의 손끝에도 닿았다.
“마마, 무슨 일이세요?”
요란한 소리를 들었는지, 아르사크가 침대에서 내려가기도 전에 시녀가 촛대를 든 채 들어왔다. 그녀는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에 불을 비추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마마. 지금 바로 치우겠습니다.”
“…아니야, 어두우니 내일 아침에 치우도록 해. 다른 방에서도 잠은 잘 수 있잖아.”
“그래도 마마…….”
“손이라도 다치면 내일 불편하잖니. 그만 돌아가서 자도록 하렴. 나 혼자서도 괜찮으니까 따라오지 말고.”
시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성거리고 있다가 아르사크에게 새 촛대를 건넨 뒤 문을 열어주었다.
야밤에 황후를 혼자 나가게 하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아르사크가 한 번 됐다고 말하는 것은 그대로 따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