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테오도르.”
“예, 폐하.”
“공작이 한 이야기를 조사해 보도록 해라. 어느 지역을 중심으로 보고가 있었는지 알아보고, 의전장관에게도 보고되었던 사항인지 알아봐. 규모와 빈도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 * *
루이제를 고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르사크로부터 대강 이야기를 전해 들은 루이제는 별로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수도에 유행 중인 혼수 품목에 대해 줄줄이 읊었다. 가구나 예복 같은 꼭 필요한 것들 이외에 미혼의 아가씨들이 많이 준비한다는 사치스런 장식품의 목록까지도 갖고 있었다.
“이게 뭐야? ‘상아와 루비로 장식한 설탕 그릇’, ‘에메랄드 양각의 보석함’, ‘최상급 진주가 사용된 머리빗 보관함’… ‘머리빗 보관함’이라고? 대체 머리빗 보관함이 따로 필요한 이유가 뭐야?”
“아이 참, 마마도. 꼭 이유가 있어야 물건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앞뒤가 안 맞잖아. 이유가 있으니까 물건을 구하는 거지.”
“이 방 안에만 해도 아무런 이유가 없는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게다가 이건 혼수라고요.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이유가 돼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잘 들으세요, 마마. 폐하께서 마마께 혼수를 맡기셨다는 건 마마의 안목과 센스를 보시겠다는 말일 거라고요. 심지어 로즈안나는 마마의 최측근 시녀이고, 또 이전에는 돌아가신 황녀님의 놀이 동무였다면서요? 그러면 더더욱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셔야 한답니다. 운트겔 가문에서 결혼식을 치른다면 방문하는 귀족들의 수도 어마어마할걸요? 게다가 이만저만 높은 귀족들이 아닐 테고요. 특히나 마마께서 관여하셨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시겠어요? 티스푼 손잡이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싶어 안달일 텐데, 로즈안나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도록 놔두실 거예요?”
얘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애였던가. 아르사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반쯤은 놀라고, 반쯤은 진짜 루이제가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말도 안 되는 투정 부리기 아니면 약혼자 자랑밖에 할 줄 모르는 것 같더니, 갑자기 달변가라도 된 듯한 모습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아무튼, 제게 물어보신 건 정말 현명한 선택이셨어요. 저는 말이죠, 내년 가을에 유행할 벨벳 구두의 디자인까지도 전부 다 꿰고 있다고요.”
조그만 콧대를 치켜들면서 우쭐거리는 루이제의 모습에 아르사크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대체 그런 건 어떻게 알아? 유행을 내다보는 마법이라도 부릴 줄 아는 거니?”
“그런 게 다 정보력이죠. 마마께서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으시니 잘 모르시겠지만, 조금만 신경을 쓰면 아주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다고요. 랜크버 백작 부인도 이런 것까지는 모르실걸요?”
아르사크는 새삼스럽게 루이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네가 에셴에 대한 건 또 어떻게 알고?”
“제가 수도에서 카른만 쳐다보면서 온종일을 보낸다고 생각하셨어요? 귀부인들이 차를 마시면서 무슨 이야기들을 주고받는지 아시면 놀라실걸요? 랜크버 백작 부인은 똑똑한 분일지 몰라도 좀 무서운 데가 있어서 수다나 떠는 작은 자리에는 초대받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어요. 하지만 전 다르죠.”
에셴도 아르사크에게 그 점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었다. 자신은 많은 정보망을 가지고 있지만, 귀부인들과 얕고 폭넓은 친분이 있는 편은 아니니 아르사크 쪽에서도 최대한 귀족들을 마주할 자리를 많이 만들어 두는 편이 좋다는 조언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몇 번 시도는 해보았지만, 아무래도 아르사크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몇 시간 동안이나 반듯한 자세로 앉아서 별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계속해야만 한다는 것 자체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널 좀 다시 봐야겠다. 어리숙한 철딱서니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야.”
“흥, 절 너무 무시하셨어요. 저, 이래봬도 후녀 심사의 마지막까지 남았던 사람인데.”
“난간 붙잡고 살려달라고 삑삑 울었잖아.”
“그거야 마마께서 사람을 막 쥐어패시니까 그랬죠. 아, 참. 맞다. 마마, 그 소식 들으셨어요?”
아르사크는 루이제가 팩 내던진 목록을 다시 주워들었다. 머리빗 보관함보다도 더 기가 막힌 것들이 그 아래로도 줄줄이 이어졌다. 과연 로즈안나가 이런 것들을 받고 기뻐할까? 싫어하진 않겠지만…….
“마마! 그 소식 들으셨냐니까요?”
“무슨 소식? 말을 해야 알지.”
“힐데트로스 양에 대한 소식 말이에요. 기억하시죠? 볼핀 후작의 딸이요. 그 사람이 글쎄, 로크로몬서의 왕비가 되었대요. 제국의 옆에 붙어있는 조그만 나라이긴 하지만, 볼핀 후작의 명성이 땅바닥에 처박히다시피 했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로크로몬서의 왕을 구워삶은 걸까요?”
107장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 (8)
힐데트로스에 대한 소식은 분명 놀라운 것이긴 했지만 아르사크의 관심이 거기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볼핀 후작과 힐데트로스가 자신을 해치려 한 것은 맞지만, 아르사크는 반드시 그들을 죽여야만 한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세를 떨치던 후작 본인이 세력을 전부 잃고 추방된 마당에, 그 딸이 이웃 나라의 왕비가 되었기로서니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싶었다.
아르사크는 루이제가 두고 간 목록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었다. 되도록이면 로즈안나는 모르게 준비하고 싶었으므로, 외출로 자리를 비운 오늘이 기회였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걸 필요로 할까 싶은 말도 안 되는 물품들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사이 해가 졌다. 로즈안나에게는 오늘 저녁 시중을 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으니 오지 않으리라.
아르사크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을 때였다.
“이건 다 뭐야?”
에리히였다. 테이블 위에는 루이제가 주고 간 각종 팸플릿이며 종이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아르사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얼른 종이를 챙겨 그가 볼 수 없도록 접어버렸다. 에리히가 또 웬 수상한 짓을 하느냐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아르사크는 태연히 눈만 깜빡였다.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아닌데 왜 숨겨?”
“숨기다뇨? 이젠 필요가 없어져서 치웠을 뿐입니다.”
“입에 침이라도 좀 바르고 거짓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
그러자 아르사크는 정말로 혀를 날름 내밀어 입술을 핥는 시늉을 했다. 평소였더라면 약이 바짝 오른 에리히가 심술궂은 말을 몇 마디 더 했으련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한숨만 쉴 뿐 아르사크의 태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르사크가 몸을 조금 당겨 소파에 자리를 내어주자, 에리히는 그러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왜 그러시죠? 오늘따라 좀 이상하네요.”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 것 같은데?”
“어디서 비라도 쫄딱 맞고 온 불쌍한 강아지 같기도 하고요.”
에리히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곁눈질을 하며 입술을 삐딱하게 올렸다.
“감히 날 개에 비유하다니.”
“닮은 걸 어쩌라고요?”
“좀 덜 솔직해져 봐.”
“열흘 굶은 고양이 같다고 하면 기분이 좀 좋아져요?”
에리히는 입꼬리를 좀 더 비스듬히 올렸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천천히 문질렀다. 개에 비유하건 고양이에 비유하건, 어쨌든 자신이 피로한 안색을 전혀 감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손가락 사이로 살짝 드러난 에리히의 눈동자가 파르스름하게 빛났다. 에리히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이마에서부터 입술까지 길게 드리웠던 피곤한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숙부께서 오셨어.”
에리히의 말에 아르사크의 표정이 변했다. 벌떡 일어나려는 것처럼 움찔거린 몸이 들리지 않는 거친 호흡으로 들썩였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갑작스런 방문이시군요.”
“무척 갑작스럽지. 게다가 심심풀이 삼아 오신 게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하고 말이야.”
“제가 만나 뵈어도 되겠습니까?”
“만나야만 하지.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말을 미처 다 듣기도 전에 아르사크는 에리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았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얼굴이 한동안 말없이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때의 일에 대해서… 그대는 당분간 모르는 체하도록 하는 게 좋겠어.”
역시나. 아르사크의 입술이 모멸감으로 가볍게 떨렸다. 아르사크는 매서운 눈으로 에리히를 노려보며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럼 그대의 마음대로 해도 좋아. 다만 진실은 영영 떠나보내게 되는 거지.”
아르사크의 표정이 약간 혼란스럽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설마 에리히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뭔가 한 가지라도 알아낸 사실이 있다면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을 리 없었다.
말해주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아직 확증이 없거나, 아니면 위든을 보호하고 싶기 때문에.
아르사크는 에리히와 위든의 관계, 그리고 카툴라 제국에서 위든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 그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고—어쩌면 황제인 에리히보다도 더— 있으며, 그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선황이 세상을 떠난 후 에리히가 성인이 될 때까지 대리청정을 맡은 적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또한 그는 에리히에게 남은 유일하게 가까운 혈육이었다. 하지만 정말 위든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만약 제가 이번에 폐하의 말을 들어드린다면, 폐하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의 전말을 밝혀주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으신가요?”
질문하는 아르사크의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자기 자신도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든 것 같았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와 눈을 마주친 채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하겠어. 약속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