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에리히는 코웃음을 치며 장난스럽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다지요. 진전이 있고 말고 할 사이가 애초에 아니었다는 건 숙부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요.”
“그래도 두 분 다 한창인 나이시고, 또 그 속내야 어떻든 부부로 지내시니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위든은 정말로 주책맞은 친척 어른처럼 끌끌거리고 웃었다. 원래도 분위기를 타면 허물없는 숙부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인물이긴 했지만, 에리히는 여전히 위든이 자신을 찾아온 목적에 대해 생각하느라 그 웃음을 마냥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차를 마시면서 잠깐 잊고 있었던 아르사크까지 떠오르자 더욱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르사크가 위든 앞에서 연기를 해줄 마음이 든다면 일이 좀 쉽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꽤 시끄러운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에리히 역시도 아르사크만큼이나 위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영지를 다스릴 때도, 혼란한 상황에서 대리청정을 할 때도 현명한 공정함을 잃지 않았던 그가 어째서 토르갈에 닥친 비극은 무시했는지.
당시 토르갈에서 제국에 요구했던 내용이 무엇인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전염병으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터무니없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여유나 있었겠는가? 단지 사람들을 구할 약과 치료사,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약간의 자금. 그 정도만으로도 족했으리라. 그토록 처절한 구조 요청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버린다는 것은 숙부답지 않았다.
그래서 에리히는 두 가지 의심을 했다. 하나는 토르갈의 요구가 모종의 사고나 음모로 인해 위든에게 닿지조차 않았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위든이 토르갈을 멸하기 위해 일부러 요구를 무시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말이 안 되는 일이야.’
그들이 제국에 보낸 구조 요청을 당시에는 몰랐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몰랐을 리는 없었다. 다른 부족이었으면 또 모르겠지만 토르갈은 선황과 두터운 친분이 유지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소식은 어떤 방법으로든 황궁에 전해졌을 것이고, 당시 국정을 총괄하던 위든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의심도 합리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위든이 토르갈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할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 제국을 위협할 만한 강력한 국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경계 지역을 얼쩡거리며 시비를 걸어오던 곳도 아니었으니까.
“폐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에리히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는 새로 찻잔을 채웠다.
“폐하께서는 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궁금하다 하셨지요.”
잔을 들려던 에리히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역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뤄진 방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라는 것이 너무도 뜻밖이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폐하께서는… 현재 황실 신관들과 수도원장들이 벌인 일을 장차 어찌 처리하실 생각이신지요?”
106장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 (7)
에리히는 순간적으로 미간을 확 찡그린 채 위든의 표정을 샅샅이 관찰했다.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질문을 하는지 짐작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에리히가 당황해서인지, 아니면 위든이 속내를 잘 갈무리한 탓인지, 담백하고 평온한 눈빛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 에리히가 의혹을 품은 점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것은 위든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제 겨우 황궁에 도착한 그가 에리히를 만나기 전에 신관들부터 찾아갔을 리도 없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그 일에 대한 것을 알아내어 대처를 묻는다는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에리히는 찌푸렸던 표정을 풀며 느긋하게 웃었다.
“숙부님께서 이렇게까지 귀가 밝으신 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대개 나이가 들면 귀가 어두워진다고 해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폐하께서도 저처럼 나이를 먹게 되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전해 내려오는 말들이 모두 다 진실은 아니었다는 것을요.”
위든은 그렇게 말하면서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는 듯이 유쾌하게 웃고는 찻잔을 기울였다.
에리히가 말했다.
“하지만 귀가 아무리 밝은 사람이라도 사막에서 모래알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듣기는 힘들겠지요.”
“폐하에 관한 일이 그토록 흔하고 보잘것없는 취급이어서야 쓰나요.”
“수도와 황궁은 그만큼 사람도 많고, 일어나는 사건들도 많지 않습니까? 숙부께서 어떻게 그 사실을 아셨는지 궁금합니다.”
에리히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의 동요가 묻어났다. 그러나 위든은 나직하게 웃는 소리를 내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손을 한번 내저었다.
“궁금해하시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리 대단한 이유는 아닙니다. 다만 여기까지 오는 사이 의전장관을 만났지요. 그가 폐하의 심기를 염려하며 제게 위로를 부탁하더군요.”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믿어도 좋을까? 에리히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위든과의 대화를 긴장된 상태로 이어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굳어진 입매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것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숙인 에리히는 입가를 빙긋이 당겼다.
“그러셨군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저는 괜찮습니다, 숙부님.”
“듀터스는 만만하게 볼 자가 아닙니다, 폐하. 그처럼 신앙심이 투철한 자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지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정치를 하다 보면 이런 상황에 자주 부닥치게 되지요. 나의 대의와 다른 사람들의 대의가 서로 충돌하는 경우 말입니다. 서로 물러설 자리를 확보한 뒤 칼을 겨누는 것과, 물러설 자리가 없는 상태에서 칼을 겨누는 것은 싸움에 임하는 자세부터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듀터스 같은 자는 제 손으로 물러설 자리를 없애버리는 자입니다. 자신의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죽음조차도 기껍게 받아들일……. 그런 자와 싸울 때는 똑같은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이 싸움에 사활을 거실 생각이십니까? 그들은 신이 자신들과 함께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이성과 논리에 결코 꺾이지 않습니다.”
에리히는 위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위든은 신앙심이 깊은 자였지만, 듀터스처럼 맹목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발언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신에 대한 견해는 에리히만큼이나 냉정한 데가 있었다. 다만 황족으로서, 또한 귀족이자 영주로서 반듯한 모범이 되기 위해 마치 규칙적인 습관처럼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만약 제가 듀터스만큼 사활을 걸 생각이 없다면, 이번에는 물러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에리히가 물었다. 위든은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그의 눈빛이 뜻하는 바는 이미 명확했다.
“폐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냉철한 논리를 사랑하는 분이셨지요. 저 역시 그리 독실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듀터스와 같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신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죽은 뒤에는 폐하나 저나 꽤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겠지요.”
위든이 농담을 했지만 에리히는 그다지 웃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위든이 계속 말했다.
“그러나 폐하, 정치란 논리와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배자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미끼로 회유하는 방법과 때를 아는 것입니다.”
“회유가 필요한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이 있습니다, 숙부님. 저는 이번 안건에 대해 어떤 협상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요구를 일부라도 받아주게 된다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신전과 수도원을 새로 짓고, 에레벤나를 기리는 기념물 같은 것을 건축하자고 요구할지도 모르지요. 아니,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노동과 비용은 누구로부터 나옵니까?”
“폐하께서 제국의 백성들을 생각하시는 마음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폐하께서 이대로 한 걸음도 물러나 주시지 않는다면, 저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폐하를 오해하게 만들 수도 있는 자들입니다. 그 점을 간과하셔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에리히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알면서도 억지로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위든이 조목조목 짚어냈기 때문이다.
신관들과 반목한 황제는 에리히 이전에도 더러 있었지만, 결과는 언제나 황제 쪽에서 신관들에게 어느 정도 숙여주는 것밖에 없었다. 실제로 반란을 도모하거나 죄가 확실하지 않은 이상, 신관이나 수도사를 함부로 처벌하면 그 반발이 심상찮기 때문이었다.
“숙부께서 하시는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저도 생각을 좀 더 해볼 작정입니다.”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은 가장 그럴싸한 한 가지… 이를테면 신관이나 수도사들의 임명과 해임에 관련된 문제를 듀터스에게 맡기는 것 정도가 좋겠군요. 그는 외골수 기질이 강한 인물이니 사리사욕으로 사람을 고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편이 폐하의 부담을 더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리히는 대화를 마치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킨 위든은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에리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 같은 표정이었지만, 에리히는 그 미소 너머에 뭔가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피로하실 텐데 저녁 만찬 전까지 잠시 쉬시며 여독을 푸시는 게 좋겠습니다, 숙부님.”
“예, 저도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참,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수도로 오는 길에 다른 영지들을 지나쳐 왔는데, 최근 곳곳에서 도적떼의 출몰이 지나치게 잦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그들을 마주치지 않았으나,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으니 폐하께서도 조사를 해보심이 어떨까 싶습니다만.”
“…잘 알겠습니다.”
위든은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짧게 고개를 숙인 뒤 응접실을 나갔다.
에리히는 그의 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가 입술을 짓씹으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들이닥쳐 머릿속이 텅 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