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대부분의 귀족들은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두려워해 그 싹을 근본부터 잘라내고자 했다. 그들은 위든을 은밀히 죽일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천성이 부드러웠던 선황은 아무런 죄도 없는 동생을 죽일 수는 없다며 그들의 말을 일축했던 것이다.
그다음은 다른 나라로 위든을 내보내는 것이었는데, 말은 번드르르했지만 사실상 멀리 떨어진 곳에 유폐하자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원래 직계 황족은 비록 자신이 보위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그대로 황궁에 머물 수 있는 권리가 있었기에, 위든을 다른 나라로 내쫓는다는 것은 그에게 잠재적인 낙인을 찍는 것과도 같았다.
선황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민하고 있을 때, 뜻밖에 그럴듯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위든 본인이었다. 그는 스스로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그다지 가치가 없는 디몰트를 자신의 영지로 줄 것을 청했다.
어차피 선황이 황제가 된 순간 그에게는 자동적으로 공작의 작위가 주어졌으므로 따로 영지를 하사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동안 위든은 황궁과 수도 안에서 나가본 적이 없었고, 그때까지 미혼이어서 스스로 영지를 다스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선황은 위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부 귀족들은 강경하게 반대했지만 그들이 다른 수를 쓰기도 전에 위든은 디몰트를 영지로 하사받은 그날로 황궁을 떠났다.
디몰트는 제국의 경계 지역 가까이에 위치해 있어 민심이 온화하지도, 썩 풍요롭지도 않은 지역이었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날수록 위든은 귀족들의 기억 속에서 느리게 지워져 갔다. 원래 황자였을 때도 존재감이 없다시피 했으니 그런 일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선황은 위든과 이따금 서신을 주고받고, 처음 몇 해 동안은 디몰트로 몰래 사람을 보내어 근황을 감시하기도 했지만 위든은 공작치고는 터무니없이 작은 영지를 다스리며 평화롭게 살았다.
위든은 결혼한 지 이 년 만에 아내를 잃었다. 원인은 산고였고, 그 뒤로 그는 다른 사람과 재혼하지도, 후계자를 입양하지도 않은 채 혼자 살았다.
선황은 공작 부인의 죽음에 대해 성심성의껏 조의를 표했고, 위든과의 관계도 거기서부터 급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선황은 위든을 친형제처럼 신뢰했고, 귀족들도 점차 그의 능력과 됨됨이를 칭찬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 선황이 갑작스레 세상을 뜨고 위든이 대리청정을 하는 일에 아무도 반대하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에리히 님. 왜 아르사크 님께는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응접실로 가는 도중 테오도르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위든은 지위상으로는 에리히를 섬겨야 하는 공작이지만, 그의 숙부였으므로 당연히 황후도 그를 찾아가 만나보는 것이 도리였다.
그러나 에리히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위든은 토르갈의 비극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에리히가 위든을 추궁할 수는 없었지만, 아르사크에게 지난 감정을 내려놓으라고 종용할 수도 없었다.
“아주 만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쓸데없이 힘을 빼는 건 최대한 늦을수록 좋으니까.”
에리히가 응접실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든이 안으로 들어왔다. 테오도르의 말마따나 마치 근처를 지나다 들르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차림이었다.
위든은 에리히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예를 갖춰 짧게 절을 했다.
“갑작스레 찾아뵈었습니다, 폐하.”
“놀랐습니다, 숙부님. 전갈을 보내주셨더라면 좀 더 걸맞은 예의를 갖추고 맞아드렸을 텐데.”
“국사로 바쁘신 폐하께 그런 자잘한 걱정까지 끼쳐드릴 수는 없지요.”
자신이 찾아온 일 자체는 에리히에게 아무런 부담이 될 것이 없음을 강조하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에리히는 내색하지 않고 그에게 앉기를 권했다.
“사실은 떠나셨을 때도 좀 놀랐습니다. 돌아오니 이미 숙부님께서는 디몰트로 떠나신 후였더군요.”
에리히가 말했다. 위든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를 꽤 오랫동안 비워두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황궁에 제가 너무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일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숙부님이신데 감히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모두가 다 폐하의 마음 같지는 않지요. 잘 아실 텐데요.”
에리히는 이상하게도 그와의 대화가 핵심을 일부러 피해 빙빙 돌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전에도 이따금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지만, 오늘은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에리히는 위든이 뭔가 목적을 가지고 황궁을 방문했음을 직감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차차 알아내야 할 일이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차로군요.”
위든이 말했다. 에리히는 위든과 어딘지 닮아 보이는 희미한 미소를 띠면서 찻잔을 들었다. 마치 잘 익은 곡식처럼 짙은 금빛으로 빛나는 차였다. 한 모금 머금으면 약간 쓴 듯한 맛이 잠시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 그 안에 녹아든 달콤함이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하는 독특한 차였다.
“황궁을 떠나 있으면 가장 그리운 것이 바로 이 차입니다.”
“디몰트에서도 찻잎은 충분히 구하실 수 있을 텐데요.”
“이 찻잎은 수도 근방의 영지에서만 재배하는 것이지요. 그것도 시기를 잘 맞춰 수확해 제대로 관리해야만 이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디몰트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 이동하는 도중에 찻잎이 반은 상해버립니다.”
“안타깝군요. 숙부님께서 그토록 이 차를 즐기신다니,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서든 언제나 즐기실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은데.”
위든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뽀얀 김이 희끄무레하게 피어오르며 그의 눈동자를 덮듯이 가렸다. 위든은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천천히 차를 음미하고는 에리히를 바라보며 말했다.
“구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에 이토록 귀하고 아깝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에리히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에리히도 역시 양손을 깍지 낀 채 입가를 가리고 있어 표정이 다 보이지 않았다.
“만약 언제나 이 차를 맛볼 수 있다면 그때는 더 이상 맛있다고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슬픈 일이니, 아쉽더라도 아주 가끔씩 즐기는 것이 차라리 나을 테지요.”
“숙부께서는 언제 보아도 인내심이 많은 분이십니다.”
에리히가 말했다. 위든은 자신도 동의한다는 듯이 웃으면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들이 차를 반쯤 마셨을 때, 시종이 새로운 접시를 하나 더 가지고 왔다. 이제 슬슬 차의 쓴맛 때문에 입 안이 텁텁해질 때였다. 요리장이 그 때를 맞춰 달콤한 과자를 내놓은 것이다. 처음부터 과자를 곁들여 마시면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차라서 그런 것 같았다.
위든이 접시 위에서 길쭉한 쿠키 하나를 집어 들더니 말했다.
“이 과자를 보니 옛날 일들이 생각나는군요.”
에리히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떴다. 위든은 에리히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소 장난기 섞인 웃음을 띠었다.
“폐하께서도 어렸을 때 이 과자를 무척 좋아하셨지요. 기억나십니까?”
위든의 물음에 에리히도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자를 한 입 베어 문 위든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이 왠지 불필요할 정도로 뚜렷하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이 과자를 좋아하십니까?”
에리히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아주 오랜만에 보는 과자입니다. 언젠가부터 그리 손이 가지 않더군요. 너무 달아서 물렸나 봅니다.”
“단맛을 내는 재료가 많이 들어간 것이라,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기 전에 이 과자가 간식으로 나오는 경우도 많았지요. 저도 어렸을 때는 자주 먹었지만 조금 자라고 난 후부터는 잘 먹지 않게 되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아… 맞아요, 그랬습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자주 먹었지요. 이제야 기억이 납니다.”
“유레나 황녀님도 이 과자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에리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위든이 유레나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은 유레나가 죽은 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에리히도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유레나는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식사보다 간식을 더 좋아하는 아이여서, 돌보던 유모나 시녀들이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하도 좋아하니 에리히도 자기 몫으로 나온 간식을 몇 번이나 유레나에게 주곤 했다. 접시째 주면 들킬 수 있으니 두어 개 넣어두었다가 모르는 척 건네주면 유레나는 해맑게 웃으면서 키득거렸다.
“…숙부께서 유레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제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슬하에 자식이 없지요. 유레나는 저의 조카이지만, 그보다 더 사랑스러운 아이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아 마땅한 아이였고요.”
그런 말을 하면서 위든은 다소 서글픈 표정을 띠었다. 유레나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큰 비극이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 중에서 슬퍼하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것이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위든 역시 유레나를 특별히 아끼고 사랑했다. 황궁에 올 때마다 체통이나 체면도 잊고 유레나와 놀아주고, 생일이나 특별한 날이면 인형이나 장난감, 책, 드레스 따위의 선물을 산더미처럼 보냈다. 때로는 직접 가지고 올 때도 있었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아득하게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는 빛나던 시절들이.
위든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남은 반쪽의 과자를 입 안에 털어 넣고는 차를 한 잔 더 마셨다.
“그런데 황후 마마께서는……?”
위든이 먼저 아르사크의 이야기를 꺼내자, 에리히는 경계라도 하듯이 반사적으로 미소를 꾸며냈다.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따로 인사를 하시면 되겠지요.”
“황후 마마와 폐하의 관계에 진전은 좀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