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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35화 (135/191)

135화

“마마! 듣고 계세요?”

“어… 그래. 듣고 있단다.”

“참, 좀 진지하게 들어주시란 말예요! 마마도 제가 혼수를 전부 준비하는 건 실례라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카른은 사실…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요. 뭐, 저도 제 몫의 재산은 많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새로 신혼집을 꾸밀 정도는 있거든요. 그래서…….”

아르사크는 이마에 얹었던 천을 팽개치며 벌떡 일어났다. 루이제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가 왜 그러냐는 듯한 눈으로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루이제, 혼수는 네가 준비해. 그까짓 걸 가지고 실례는 무슨? 쪼잔하게 그런 걸로 따지고 들면 엉덩이를 걷어차 버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전 카른의 엉… 아무 데도 걷어차지 않을 거예요, 마마!”

“그럼 내가 걷어찰게. 그 대신 너한테 부탁할 게 좀 있으니 날 도와줘야겠다.”

이거다. 아르사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을 위해 실종된 루이제를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 * *

에리히는 금방이라도 눈앞에 놓인 찻잔을 내던지기라도 할 것처럼 부르르 떨리는 손끝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다 시종에게 눈짓을 해 찻잔을 치우도록 했다.

쨍그랑!

총총히 다가서던 시종이 놀라서 흠칫 멈춰 선다. 테오도르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고는 유리 조각을 치우라는 명령을 내린 뒤 에리히를 불렀다.

“폐하.”

에리히는 대답하지 않고 이마를 짚으며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슬픔이나 두려움이 아닌, 오로지 분노 때문에 그는 떨고 있었다. 격렬한 떨림 다음에는 언제나 무시무시한 피로감이 엄습했다. 까딱 정신을 놓치기라도 하면 죽음 같은 잠 속으로 끌려들어 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두 나가라.”

에리히의 목소리는 탁하게 들렸다. 테오도르는 방 안 곳곳에 서 있는 시종들을 모두 내보낸 뒤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에리히 님,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조금 쉬시는 것도…….”

“쉬어? 지금 이 상황에 무슨 수로 쉴 수 있단 말이냐? 너도 이걸 한번 읽어봐라.”

아무렇게나 펼쳐진 두루마리를 휙 내던지며 에리히가 씹어뱉듯 거칠게 말했다.

테오도르는 종이 뒤에 덧대어진 검은 비단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듀터스는 이런 사소한 요소에까지 공을 들여 에리히를 사정없이 압박할 작정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정갈한 글씨체로 길게 적힌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테오도르의 얼굴이 어둡게 그늘졌다.

“폐하, 저들은 폐하께서 첫 번째 요구에 응해주지 않아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저들의 요구를 일부분이라도 수용하신다면…….”

“아니, 절대로. 나는 절대로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테오도르. 그들의 제안은 그 어떤 것도 듣지 않아. 왜인 것 같으냐?”

테오도르는 미간을 좁힌 채 잠시 할 말을 생각했다. 그러나 에리히는 잠깐도 참을 수 없다는 듯 테이블을 쾅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며 말했다.

“왜냐하면,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물러선다면 그 이후로는 끝도 없겠지. 듀터스가 어떤 자인지는 아주 잘 알아. 그는 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는 자다. 그가 판단하는 인간의 가치란 신앙이 있는가 없는가, 또한 그 신앙이 얼마나 신실하고 깊은가, 단지 그것뿐이야. 그런 자에게 야금야금 권한을 주며 끌려다니면, 이 나라 전체가 언젠가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 그 이상, 그 이하도 되지 않을 거다.”

“그러나 폐하, 이대로 아무런 명분도 없이 신관들과 충돌한다면 부차적인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관들을 함부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까요.”

에리히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듀터스는 제국의 신앙심이 약해졌다고 탄식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에게 온몸과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 그의 기준일 뿐이었다.

오히려 시민들은 사는 것이 힘들어질 때마다 황제나 귀족보다는 신을 더 의지했고, 악랄하게 세금을 갈취하던 영주가 급사하거나 병을 얻으면 신의 벌을 받았다며 조롱하고 침을 뱉었다.

바로 그런 점이 에리히에게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아무리 필요할 때만 발휘되는 신앙심이라 해도, 시민들에게는 황제보다 신관이나 수도사가 더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지방의 수도원에는 대체로 평민 출신인 수도사들이 더 많았으므로 친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리히가, 단지 신관들이 황제에게 ‘몇 가지 요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벌을 준다면, 심각한 비난과 원성을 피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테오도르, 내가 황제가 된 것이 올해로 몇 년째지?”

에리히가 그것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테오도르는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올해 겨울이면 정확히 오 년째입니다, 폐하.”

“오 년이라, 우습구나. 적어도 오십 년은 이 자리에 있었던 것 같아.”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자세를 흐트러뜨린 에리히는 목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테오도르는 여느 때와 달리 무척이나 수척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안쓰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에리히가 엄살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은 감히 할 수 없었다. 그는 실제로 많은 황제들이 십 년, 이십 년에 걸쳐 계획하고 실행할 일을 오 년 만에 해냈다. 피로를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선황이 정치를 못 했던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 황제였던 에리히의 조부 역시 역사서에 남을 만한 일은 해내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탁월하게 일을 처리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리히가 이토록 피로를 느끼는 이유는 제국이 세워진 지 그만큼 오랜 시간이 흐른 탓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작품일지라도 영원히 보존할 수는 없다. 강성하고 풍요로웠던 나라도 언젠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당연했다.

카툴라 역시도 번성했던 시기를 이미 지나쳐 이제는 끝없는 보수 작업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없는 일에 쉴 새 없이 매달려 있는 것이 지금의 에리히였다.

“너, 빨리 결혼할 날짜 잡아라.”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테오도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에리히는 눈을 감은 채 숨죽인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 내가 이 귀찮은 것들을 무시할 합당한 이유가 생기잖아. 로즈안나의 혼수 준비나 하면서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를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만… 폐하, 그때는… 아르사크 님과 곧 다투실 것 같기에 급한 대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로즈안나에게 필요한 것들은 저와 저의 집안에서 준비해도 괜찮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로즈안나의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를 거다. 혼례 예복과 혼수품도 황녀와 같은 대우에서 준비할 테니 그렇게 알아.”

테오도르는 당황했다. 황제가 혼사에 관여해 주는 것만으로도 로즈안나뿐만 아니라 테오도르 자신, 그리고 그의 집안에도 큰 명예였다. 황녀 대우라는 것은 듣고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폐하, 그렇게는…….”

“나는 로즈안나에게 절대로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어. 하나뿐인 내 동생의 마지막을 지켜줬는데, 황제이자 그 애의 오빠인 내가 로즈안나에게 그 정도도 해주지 않는대서야 말이 되지 않아. 너 역시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로즈안나와 결혼하고자 한 것은 아닐 것 아니야?”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럼 너는 입 다물고 기대만 하고 있으면 되는 거다.”

그것이 에리히가 로즈안나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였고 마음일 것이다. 에리히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테오도르가 더 말을 보탤 수는 없었다.

앞으로 결혼식을 치르는 날까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이 있었지만, 어쩐지 이제야 실감이 나고 마음이 붕 뜨는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은 에리히가 자세를 바로 하고 앉은 잠시 후, 시종 한 명이 헐레벌떡 문을 두드렸다. 멀리서부터 뛰었는지 이마에 땀이 맺힌 채였다.

“폐하, 전하의… 마차가 지금 막 궁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전하라고?”

“예, 폐하. 디몰트의 공작께서 오셨습니다.”

에리히와 테오도르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런 예고도 없었던 뜬금없는 방문이다. 에리히가 신행에서 돌아온 후 이미 황궁을 떠나고 없던 그의 숙부, 위든 공작이 온 것이었다.

105장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 (6)

“숙부께서 갑자기 무슨 일이시지?”

테오도르는 에리히의 표정이 그다지 반가운 기색을 띠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반갑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든의 방문에 의혹을 품고 있는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응접실로 공작을 모셔라. 그리고 황후에게도…….”

에리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종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고쳤다.

“황후에게는 내가 알리도록 하지. 너는 공작을 모실 준비만 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시종은 종종걸음으로 부리나케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러고서도 에리히는 여전히 뭔가를 고민하는 듯이 이맛살을 찡그리고 있었다.

“전갈을 받지 못했는데. 게다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이상한 일이군.”

“어쩌면 근처를 지나시던 길에 들르신 것인지도 모르지요.”

“디몰트가 여기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지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해? 우연히 들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거리다.”

에리히의 말이 맞았다. 마차를 타더라도 꼬박 열흘 가까이 걸려야 도착할 수 있을 만큼 디몰트와 수도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위든이 그토록 외딴곳에 떨어진 영지를 다스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뜻이었다.

즉위 초, 이복형제들의 반란으로 황위와 목숨을 둘 다 잃을 뻔했던 선황은 반란을 일으킨 첫째와 넷째 형제를 제거한 후 고민에 빠졌다. 그즈음 이미 다른 나라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려버린 다섯째 황자는 그렇다 하더라도, 남은 셋째인 위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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