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수도원장님께서도 이런 불미스러운 사안을 그냥 묵과하실 생각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듀터스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르마노는 진심으로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에는 듀터스의 말에 혹해 어영부영 그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황제가 전면으로 듀터스와 맞서는 이상 줄을 잘 서는 것만이 오래 살 수 있는 길이었다.
“아니, 하지만… 폐하께서 그토록 강경하게 불가하다고 하시는데, 무얼 더 어떻게…….”
“이쪽에서도 결코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드립시다. 폐하께서 강경하게 나오신다면, 우리는 더 강경하게 나가야만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니, 잠시만… 대사제님, 진정하고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듀터스는 ‘대사제’라는 호칭을 듣자마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것은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아주 오래된 존칭으로, 신관의 지위가 황제의 지위보다 더 높다고 여겨졌던 시절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건국 초기에만 허락되었던 셈이다.
이후 계속해서 사람들이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황실은 물론이거니와 귀족들까지도 에레벤나를 하찮은 전설 정도로 치부하게 된 이후로는 감히 황제보다 신관을 더 높여 부를 수는 없다는 이유로 아무도 부르지 않게 된 과거의 유물이었다.
그런데 이런 때에, 이런 자리에서, 굳이 ‘대사제’라는 존칭을 쓰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듀터스 정도나 되는 사람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런 호칭은 너무 부담스럽군요. 그냥 듀터스라고 하십시오.”
듀터스가 신랄한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그런 태도 역시 평상시의 그였더라면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이 치졸한 수도원장 앞에서까지 발휘할 인내심이 없었다.
제르마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연신 진땀을 닦았다.
“듀터스 님이라 하겠습니다. 아니, 이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일단 진정하십시오. 폐하가 어떤 분인지 아시잖습니까? 내로라하는 귀족들도 하루아침에 작위를 박탈하거나 수도 밖으로 추방시키는 분입니다. 물론 그런 부분을 마냥 칭찬할 수만은 없지만, 폐하께서 하신 일들을 생각해 보시지요. 사리사욕을 우선시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탐욕에 눈이 어두운 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저나 듀터스 님은 신을 모시는 자들로서 폐하를 객관적인 눈으로 봐오지 않았습니까. 그분이 어렸을 때부터요.”
“물론 그랬지요. 그랬기에 저는 지금의 폐하께서 황태자의 자리에 계실 때도, 그분의 신앙심에 대해 의혹을 품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선황께서 신앙이 깊은 분이셨기에, 그분의 아들이신 황태자께서도 언젠가 황위에 오르시면 신에 대한 의무를 깨달으시리라 믿고 이날까지 기다린 겁니다. 그러나 지금 황제께서는 어떠하십니까? 아예 신을 부정하고 계십니다!”
“아니, 꼭 부정하신다고 표현하실 것까지는…….”
제르마노로서는 이 상황이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다른 문제도 물론 그랬겠지만, 특히 신앙과 관련된 사안에서만큼은 듀터스는 매우 완강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러니 이전의 최고 신관이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던 볼핀 후작과 결탁했음을 알자 대놓고 비난하고, 심지어는 부정을 고발하려는 시도까지 했던 간 큰 인물이다. 덕분에 그는 내내 황실의 신관들 사이에서 배척을 당해왔다.
자다가 암살을 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런 상황에서 듀터스는 끝내 살아남아 신관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이 모든 일이 에레벤나의 큰 뜻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사크는 에레벤나가 듀터스를 위해 보낸 축복과도 같은 존재였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자신의 이상향, 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견고한 제국을 만들기 위한 첫 번째 돌이 아르사크였다.
“대수도원장님께서는 모든 수도원에 연락을 취해주십시오.”
듀터스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자, 제르마노는 뒷말을 듣기도 전에 거절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듀터스는 제르마노에게 더 이상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신관들과 수도원장, 그리고 모든 수도사들이 하나가 되어 폐하께 정식으로 사죄와 약속을 요구해야 합니다. 신관들의 권한을 더욱 확대하며 침범하지 않겠다고 보장해주셔야 하며, 에레벤나 신전 앞에 무릎을 꿇고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하신 일에 대해 반성하는 뜻을 보이셔야 할 것입니다.”
“듀터스 님!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튈브리크에서 일어난 난리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내란이라도 일으키자는 겁니까!”
제르마노는 창백해진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그러나 듀터스는 무서우리만큼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국이 무사 평안하기만을 신께 기도드리는 사제입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폐하께서 이토록 무분별하고 오만하시다면, 제국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을 견고히 하십시오, 수도원장님. 에레벤나 신께서는 바로 여기, 우리 곁에 계십니다.”
103장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 (4)
신관들과 에리히가 기싸움을 하고 있을 무렵, 루이제는 수도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카르반테와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사실 기싸움이라는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왜냐하면 카르반테는 루이제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을 주간이 거의 끝나가는 이 시기에, 루이제는 갑자기 카르반테를 잘 찾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 카르반테는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문득 최근에는 루이제가 세안을 도와달라는 핑계로 아침부터 자신을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게다가 벌써 며칠째, 루이제 쪽에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억지로 붙여가며 어떻게 해서든 말을 걸어오던 루이제였다.
카르반테가 좁은 후원에서 혼자 검술 연습이라도 하고 있으면, 햇볕에 살이 타겠다고 칭얼거리면서도 꿋꿋하게 바깥 테라스까지 나와 쉴 새 없이 종알종알 떠들었다.
검을 휘두르느라 카르반테가 제대로 된 대꾸를 해주지 못하면 신경질을 팩 내기도 하고, 검이 더 좋냐 내가 더 좋냐 하는 등의 황당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카르반테가 사과를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시시 웃으면서, 마음 넓게 이해해 준다는 표정을 하고선 어서 연습이나 마저 하라고 새침하게 말하곤 했다. 카르반테에게는 그런 모습들도 다 사랑스러웠다. 그것이 지금은, 마치 전생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대체 왜일까.’
루이제가 부르지 않았는데 자신이 먼저 그녀의 방에 방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무뚝뚝한 카르반테의 머릿속에는 없는 선택지였다. 혹시라도 루이제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양쪽이 다 낭패만 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그녀가 살았던 홀드빅 가문의 본저택은 지금 이 집의 수십 배는 되는 규모였을 것이다. 그토록 넓은 집에서, 혼자 있을 공간이라고는 겨우 침실 정도가 전부인 이런 곳으로 왔으니 루이제가 얼마나 답답할지는 예상이 갔다.
그러니 루이제가 자신을 마주치기 싫어한다면, 그녀의 눈에 띄는 곳에서 최대한 벗어나 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고백한 사이라고는 하지만,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면 자신은 루이제의 식객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만약, 루이제가 정말로 나를 더 보고 싶지 않은 거라면…….’
카르반테는 자신의 방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루이제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아가 연인이 되기로 한 것 자체를 후회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
상식적으로는 그녀가 굳이 매몰찬 소리를 할 필요가 없도록 스스로 떠나야만 했다. 집에 머무는 손님을 억지로 내쫓는 행동은 귀족들 사이에서 굉장히 천박하고 예의 없는 짓 취급을 받았다.
만약 루이제가 카르반테를 쫓아냈다는 소문이라도 퍼지게 된다면, 이 넓고 복잡한 수도의 사교계에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루이제가… 그런 일을 겪게 해서는 안 돼. 내가 떠나야 한다.’
카르반테는 굳게 결심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미처 서너 걸음을 걷기도 전에 그의 발은 꼼짝도 못 한 채 멈추고 말았다.
왠지 속이 답답했다. 루이제를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고 숨을 쉬기가 힘든 기분이 들었다.
카르반테는 얼굴을 찡그린 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덟 살 이후로 그는 아무리 험한 일을 당해도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만 있다면 루이제 앞에서 울고 싶었다. 왜 갑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느냐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묻고 싶었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그건 루이제를 곤란하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되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설득할 수 있다면…….’
카르반테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성미였다. 우드하우스 저택에서 친아버지와 의붓어머니로부터, 그리고 의붓형제들로부터 무수한 모멸을 당하면서도 버텨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냉담하고 차가운 눈길조차도 지금은 전혀 꺼림칙하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카르반테가 두려워하는 것은 루이제가, 애원하는 자신을 곤란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해야만 한다. 카르반테는 멈춰 선 채 숨을 몇 번 고른 뒤 천천히 문을 열었다. 집은 작아서, 루이제의 방은 카르반테의 방에서도 고개만 들면 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카르반테가 혼자 무슨 고민에 빠져있는지도 모른 채, 루이제는 초조한 표정으로 방 안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해? 카른이… 카른이 아직도 아무 말도 안 하잖아. 어떡하면 좋아! 아, 황후 마마의 말 같은 건 듣지 말걸!”
아르사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루이제에게 부채든 총채든 휘둘렀을 것이다.
루이제는 속상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무릎에 이마를 묻었다.
“아무리 무관심한 척을 해도 안 통하잖아! 약혼을 청하기는커녕 나하고 말도 안 해! 난 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