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어라?’
뭔가가… 예상 밖이었다. 그것도 크게 예상 밖이었다. 테오도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로즈안나를 돌아보았다.
로즈안나도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듯, 눈을 둥그렇게 뜬 채 테오도르와 아르사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당장에 멱살을 잡고도 남았을 순간이 열두 번쯤 지나갔는데도 아르사크와 에리히 사이의 분위기는 평온했다. 아르사크가 에리히의 발등을 꾹 밟긴 했지만, 그걸로 전부였다.
때마침 시녀가 막 끓인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에리히는 태연스럽게 아르사크의 맞은편에 앉았다.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던 아르사크는 에리히 앞에 잔을 내리려다 말고 테오도르와 로즈안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희는 거기 서서 뭐 하는 거야? 둘 다 바보 같은 표정이나 짓고.”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로즈안나였다. 여전히 뭔가에 홀린 듯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얼른 테이블 옆으로 다가가서는 아르사크의 손에서 찻주전자를 받아 들어 두 사람의 잔을 차례로 채워주었다. 나른한 오후의 졸음을 깨우는 산뜻하고 새콤한 향기가 피어오른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에리히는 맞은편에 앉은 아르사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테오도르를 돌아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 뭐 해?”
“…두 분이야말로… 뭘 하시는 겁니까?”
테오도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사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에리히는 좀 더 삐딱하게 눈썹을 찡그렸으며, 마지막으로 로즈안나는 필사적으로 테오도르에게 그만 말하라는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눈빛으로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갑자기 정신을 어디다 놓고 오기라도 했어?”
“아니, 폐하께서 방금…….”
“방금 뭐?”
“왜… 아니,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102장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 (3)
테오도르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르사크는 찻잔 안에 설탕을 집어넣으며 에리히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시니까 그렇죠. 로즈가 놀랐잖아요.”
갑자기 자신을 끌고 들어가는 아르사크 때문에 로즈안나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입술을 뻐끔거리다 다른 방으로 후다닥 몸을 피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거니와, 도대체 이런 상황에 무슨 표정을 짓고 서 있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던 테오도르는 더 황당했다. 로즈안나가 자기만 내버려 두고 혼자 이 자리를 벗어난 것도 충격이라면 충격이었고, 진짜 놀란 건 자신이었는데 아르사크가 로즈안나 이야기만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테오도르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에리히를 노려보…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어디가 고장 난 인형처럼 어색하게 몸을 삐걱거리며 말했다.
“음, 저… 저는, 그러면… 두 분이 담소를 나누실 동안, 잠시…….”
“아, 안 돼. 잠깐 기다려.”
등을 돌려 나가려는 테오도르를 붙잡은 것은 아르사크였다. 당사자인 테오도르는 물론이거니와, 마주 앉은 에리히도 영문을 몰라 아르사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법 차분한 태도로 차를 한 모금 마신 아르사크는 잔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테오도르를 향해 느닷없는 질문을 했다.
“테오, 로즈안나에게 청혼했다지?”
“뭐?”
“예?!”
“아르사크 님!”
제각각 내뱉은 외마디 소리 끝에, 로즈안나의 외침은 쾅! 하는 요란한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 소리에 제일 놀란 것은 문이 부서져라 뛰쳐나온 로즈안나였으나, 불경하게도 황제 앞에서 소음을 만든 것 정도는 지금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르사크는 의외라는 눈으로 에리히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물었다.
“설마 폐하께선 모르고 계셨나요?”
에리히가 테오도르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테오도르는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했다. 로즈안나가 얼굴이 달아올라 울상이 된 채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테오도르는 안절부절못하며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그 대답에 에리히의 표정이 더 살벌해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테오도르는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로즈안나에게 더 빨리 마음을 고백하지 않은 과거를 조금 후회했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사실은 로즈안나의 혼수를 내가 준비할까 하는데, 그래도 괜찮을까?”
아르사크의 질문에 모두가 놀랐다. 로즈안나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이었고, 에리히는 테오도르를 쳐다보던 그대로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바보처럼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황후 마마께서 헤아려 주신다면 저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니, 잠깐만. 왜 나를 빼고 이런 이야기가 진행되는 건데?”
에리히가 대화를 끊고 끼어들자 아르사크는 핀잔하듯 말했다.
“폐하께서 꼭 이 이야기에 끼셔야 할 필요라도 있나요?”
에리히는 황당함을 숨기지도 못했다. 헛웃음을 터뜨린 에리히가 찻잔을 옆으로 밀었다.
“로즈안나의 혼사를 주관하겠다고 한 건 나야.”
“저는 들은 바 없어서요. 그리고 혼사를 주관하는 것과 혼수를 준비하는 건 다른 문제 아닌가요? 혼사야 이미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결정했으니, 남은 건 혼수 문제뿐이죠. 그리고 그걸 제가 준비하겠다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안 돼. 결혼식을 치러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소리야?”
“저도 일단은 결혼한 몸입니다만? 그새 잊으셨나요?”
“앉아만 있어도 알아서 식이 진행된 걸 갖고 경험이 있다고 할 수 있나? 운트겔 가문은 작위가 따로 없을 뿐, 다른 나라였다면 공작에 버금가는 위치의 공신 집안이야. 어설프게 준비해서는 이쪽도 실례라고.”
“정말 잔소리도 많아. 누가 어설프게 준비한다고 했나요? 제가 로즈안나와 폐하, 두 사람 중 누구를 더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존심 상하긴 하는데 아마 로즈안나겠지. 하지만 신경을 쓰는 것과 실질적인 준비를 하는 건 차원이 다른 얘기거든.”
테오도르는 두 사람의 말다툼—인지 애정 과시인지—에 끼어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로즈안나의 옆으로 가 섰다.
자신이 화제의 중심이다 보니, 로즈안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의 혼수를 맡아주겠다며 다투는 이런 광경을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했다.
“두 분이서 반씩 나누시는 건 어떨까요?”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옥신각신하던 아르사크와 에리히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테오도르는 슬그머니 목을 움츠리면서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폐하와 마마께서… 두 분 다 로즈안나의 혼수를 준비해 주겠다고 하시니… 차라리 두 분이 반씩 나눠서… 준비하시는 것도 괜찮으실 거라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테오, 너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결혼이 장난도 아니고, 혼수에 뭐가 들어가야 하는지도 모를 황후에게 무슨 생각으로 이걸 반이나 맡겨?”
“아니, 그럼 폐하께서는 혼수에 뭐가 들어가야 하는지 다 아신단 말씀이신가요? 그럼 어디 한 번 읊어보시든지요.”
“설마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수작에는 안 넘어가.”
“그렇게 자신만만하시면 ‘꼭 챙겨야만 하는 것들’은 폐하께서 준비하세요. 저는 로즈안나에게 ‘꼭 필요할 것들’을 준비할 테니까요. 테오도르도 그렇게 말했으니, 이 정도면 불만 없으시겠지요?”
‘챙겨야만 하는 것들’과 ‘필요할 것들’이라는 두 마디에 불필요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는 걸 에리히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비웃듯이 입술을 한번 실룩이고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좋아, 어디 얼마나 훌륭하게 해내는지 보도록 하지. 명색이 황후가 살핀 혼수인데, 설마하니 볼품없는 것들은 아니리라 믿겠다.”
“폐하야말로, 얼마나 세련된 안목을 가지셨는지 똑똑히 봐 드리지요. 명색이 황제께서 내린 혼수인데 촌스러운 것들만 늘어놓으시는 건 아니겠죠?”
둘은 으름장을 놓듯 말하고는 코웃음을 치며 서로를 외면했다.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서 멀거니 떨어진 채 서 있던 결혼 당사자들은, 본인들의 의사와는 별 관계도 없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 가는 사실을 보며 복잡한 눈빛을 공유하고 있었다.
* * *
대수도원장인 제르마노는 냉랭한 듀터스 앞에서 송구스럽기 그지없다는 얼굴로 연신 땀을 찍어내고 있었다.
병을 핑계로 방문을 물리쳤음에도 기어이 개인 침실까지 밀고 들어온 듀터스는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굳건한 평정심을 잃는 법이 없던 그가 이토록 흐트러진 모습은, 연로한 제르마노조차도 당혹한 민망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황제의 자리에 계신 분께서 어찌 그토록 분별력이 없으신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듀터스가 씹어뱉듯이 읊조렸다. 그의 요구가 황제의 침실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는 소식을 은밀히 전해 들은 제르마노는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던 사실을 솔직히 다행스럽게 여겼다.
조금 치졸하고 소인배 같은 행동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권위를 가진 수도원장들로부터 동의 서명을 받아다 준 것만으로도 할 일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제르마노 역시 신을 믿는 사람으로서 에리히의 태도를 지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황제다. 다소 오만하게 들릴 수 있는 발언이라고는 해도, 에리히는 충분히 그럴 만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논리적인 말이기도 했다.
신이란 초월적인 존재, 인간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별 의미를 갖지 않는 불가해한 존재이므로 신일 수 있었다. 아무리 전능한 존재라 할지라도 인간들의 일 하나하나에 모두 개입한다면, 그것을 더 이상 신이라 부르기는 애매해지지 않겠는가 말이다.
에리히가 이 나라의 모든 신관들을 전부 다 사형대로 보내버린다고 해도 에레벤나가 에리히를 벌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애초에 아르사크가 오기 전에는 내내 침묵만 하고 있던 신이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지상에 발이 묶여 있는 이상, 신관들도 실은 권력자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기도도 신앙도, 신실한 수도사들을 길러내며 느낄 뿌듯함도, 일단 목숨을 잃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서 제르마노는 듀터스의 분노를 이해는 하되 거기에 공감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