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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31화 (131/191)

131화

주임 신관들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입도 벙끗하지 못한 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듀터스와 함께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 사람은 자신들이 아니라 대수도원장인 제르마노였다.

그러나 그는 듀터스가 미리 전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결국 입궁하지 않았다. 소심하고 겁 많은 인간인지라,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황후는 신도, 신관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소. 그저 황후일 뿐이지. 그대들은 황후가 고대의 무녀라도 되는 양 말하는데, 내가 듣기에는 그저 우습기만 하군. 황후가 정말로 에레벤나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면 내가 황제일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에레벤나께서 모든 것을 굽어살피실 텐데 정치는 다 무슨 소용이지? 황후를, 아니, 황후에게만 은혜를 내리는 에레벤나를 모셔다 앉혀놓고 손바닥만 비비고 있으면 제국은 곧 융성해지겠군.”

“폐하! 그것은 지나치게 불경한 말씀이십니다. 폐하께서도 제국의 황제로서 즉위하실 때 신의 이름 아래 무릎을 꿇고 맹세하셨던 것을 잊으셨습니까?”

101장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 (2)

듀터스는 처음의 여유로운 태도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흥분해서 언성을 높였다. 심리적인 상황이 뒤집어졌음을 감지한 에리히는 그를 약 올리는 것처럼 희미한 미소를 띠며 나란히 앉은 신관들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내 말에 틀린 곳이 있나? 그대들은 황후를 통해 에레벤나의 힘이 증명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앞으로 국가의 모든 일을 황후의 손에 맡기는 것이 옳겠지. 그대들은 에레벤나의 힘이 아니었으면 국가가 존재하지도 못했으리라 주장하는 이들이 아닌가.”

신관들은 에리히의 말에 충격받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당혹스런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에리히의 말은 신관들을 비롯한 에레벤나 신앙 전체를 황실과 분리시키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건국 시기에 기록된 역사서에는 에레벤나의 기적을 암시하는 구절이 새겨져 있었고, 그것은 제국에서 에레벤나 신앙의 근본을 견고하게 하는 강력한 증거였다.

황제인 에리히가 신앙을 부정한다는 것은, 제국이 세워진 근간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다.

“폐하께서는 방금 하신 말씀에 대한 책임을 인지하고 계십니까? 이것은 더 이상 저희 신관들의 권한과 관련된 문제만이 아닙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제국의 초석을 다진 수많은 분들의, 폐하께는 선조가 되시는 분들을 모독하셨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감히 내 앞에서 선조들에 대한 모독을 논하는가? 그것은 오히려 그대들과 같은 신관들에게 물어야 하는 죄가 아니겠소?”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씀이십니까!”

듀터스는 당황해 목소리를 높인 주임 신관 한 명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에리히의 기세에 말려들어 한마디 말실수라도 했다가는, 지금까지 계획한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신관들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에리히는 테이블 위에 얹은 손끝을 가만히 움직여 톡, 톡 두드리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카툴라는 나의 선조들의 피와 의지로 세워졌고, 또한 수없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바쳐 그 영광을 닦아온 나라다. 그러나 그대들은 대중에게 무엇을 가르치지? 험난한 전쟁 속에서도 나라를 지키고 융성한 대제국으로 길러낸 그들의 노력을, 고작 ‘신의 도우심이었노라’는 말로 납작하게 눌러버리지 않는가?”

이제 더 이상 보통의 협상이 아니게 되었다. 주임 신관들은 물론이거니와, 에리히의 뒤에 서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테오도르마저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에리히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황제가 즉위할 때 신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설마 역대 선황들이 경건한 신앙 때문에 그러한 의식을 치렀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분들은 그러한 의식을 통해 자신이 짊어진 관의 무게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지. 백성들에게는 쌀과 옷, 집과 돈이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에 언제고 위안이 될 수 있는 존재다. 황제는 다스리고 보살피되 다정할 수는 없는 자,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위안이 될 존재가 필요하지. 신의 존재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얼음으로 만든 못처럼 서늘하기만 한 에리히의 말에 주임 신관들은 차마 대꾸도 하지 못했다.

듀터스 역시 평정을 잃어 푸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황실의 모든 신관들과, 제국에 존재하는 모든 사제들을 총괄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이대로 순순히 물러난다면 체면도 말이 아니거니와, 신앙이 독실한 그에게 에리히의 발언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신께서는 모든 이들을 위로하고 살피십니다. 그러나 또한 그분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전능한 힘을 행사하십니다. 인간은 결코 신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그분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도 감히 논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제국의 그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앉으신 황제라 하더라도, 신 앞에서는 그저 한 명의 인간일 뿐,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 그대의 말대로라면 나도 분명 신 앞에서는 기어 다니는 개미처럼, 그저 찰나를 살아가는 한낱 하찮은 존재일 테지. 그러나 잊지 마시오. 하찮은 인간인 나는 언제든지 그대들의 죄를 물을 수 있지만, 전능한 에레벤나께서 반드시 그대들을 구원하리라 약속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에리히의 마지막 말은 단조롭게 들렸지만 어떤 소음보다도 날카롭게 그들의 귀에 박혔다. 말을 마친 에리히는 듀터스와 신관들을 남겨둔 채 방을 나섰다.

“폐하, 어디로 가십니까?”

아무런 말도 없이 화난 사람처럼 복도를 내달리듯 걷는 에리히를 뒤쫓던 테오도르가 물었다.

고개를 홱 돌린 에리히는 애꿎은 테오도르를 성난 눈으로 노려보고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걷는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테오도르, 네 생각에는 듀터스가 이대로 물러날 것 같나?”

테오도르는 쉽사리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듀터스는 결코 순순히 물러날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에리히를 압박할 더 효과적인 수단을 기를 쓰고 찾아낼 것이다.

신관들이 이토록 강력하게 에리히를 압박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들이민 적은, 그가 즉위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간 계속해서 신관들의 권한을 축소하고자 했던 에리히였으므로 만만찮은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다.

“황후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은 그 어디에도 없지. 나조차도 그것을 ‘불가해한 일’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으니까. 그런 좋은 미끼를 놓칠 리가 없을 것이다. 저들은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어떻게 해서든 황제보다 더 큰 권한을 쥐고자 할 거야. 대중을 설득하는 데에 있어서도 황후는 아주 요긴하게 쓰이겠지.”

“만약, 황후 마마께서 직접 저들에게 의사를 전달하신다면…….”

“말이 돼?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황제와 신관들의 권력 다툼이 문제가 아니게 된다. 저들이 황후를 인정하는 이유는 오로지 에레벤나의 권능을 목격 가능한 형태로 재현했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만약 황후가 에레벤나를 부정하려 나선다면 저들은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황후를 끌어내리고 짓밟으려 할 것이 뻔해.”

에리히는 갑자기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에 바짝 마른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숨을 돌렸다.

듀터스와 신관들 앞에서는 그럴싸하게 여유로운 태도를 꾸며냈지만, 그들의 입에서 아르사크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부터 냉정한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더 이상 관계없는 자들의 허울 좋은 대의에 아르사크가 끌려들어 가는 것을 에리히는 결코 원치 않았다.

테오도르도 역시 에리히의 그런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당장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한 것 같았다. 단순한 권력 싸움이 아니라 분석도, 협상도 불가능한 신이라는 존재가 가운데에 끼어 있기 때문이었다.

에리히가 향한 곳은 아르사크의 방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미 아르사크에게 해코지라도 했을 것 같은 기분 때문에,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발걸음도 초조하게 빨라졌다.

그래서였는지,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아르사크의 태연한 모습에 에리히는 공연히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예고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에리히 때문에 당황한 것은 로즈안나와 시녀들이었다. 허둥지둥 절을 한 그들은 종종걸음을 치며 다급하게 움직여 차를 끓이고, 다과를 준비하고, 닦느라 흐트러졌던 화병의 위치를 바로 놓느라 바빴다.

에리히는 황급하고 조용한 방 안의 풍경을 슥 돌아보고는, 아르사크를 향해 곧바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아!”

아르사크는 황당한 표정으로 에리히를 올려다보았다. 의자에 앉은 아르사크를 향해 허리를 숙인 그가 볼을 꼬집은 것이다. 살짝 손끝만 갖다 댄 수준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저절로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볼을 죽 늘리기라도 할 듯 가볍게 잡아당겼다가 툭 놓으며 말했다.

“어울리지도 않게 엄살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아르사크가 입술을 깍 깨물며 무릎을 걷어차려 했으나, 아슬아슬한 차이로 에리히가 한발 먼저 다리를 뒤로 물림으로써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테오도르와 로즈안나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본 순간, 에리히가 불쑥 허리를 굽혔다. 그러고는 자신이 꼬집었던 아르사크의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대었다 떼었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깔렸다. 로즈안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제 곧 육탄전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테오도르도 로즈안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아르사크가 에리히의 멱살을 잡아채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달려 나가려던 순간, 그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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