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100장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 (1)
“테오도르가 청혼을 해?!”
말을 타고 있던 아르사크가 갑자기 고함을 치자,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아 깃을 고르던 소르흐가 놀라서 삑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르사크는 얼른 소르흐를 쓰다듬어 진정시키고는 로즈안나를 휙 돌아보았다.
로즈안나는 얼굴을 홍당무마냥 물들인 채 아르사크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못했다. 적어도 아르사크에게는 먼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꺼낸 이야기였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했다.
“대체 언제, 어쩌다 그렇게 된 건데?”
시위에 화살을 걸면서 아르사크가 말했다. 로즈안나는 과녁을 향해 천천히 활을 겨누는 아르사크의 등을 바라보다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저, 그게… 어제.”
탁!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 그러나 평소 아르사크의 실력과는 달리 중앙으로부터 터무니없이 빗겨 난 자리였다. 아르사크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로즈안나를 돌아보았다.
“어제?”
“네, 어제요.”
“그래서 로즈 너한테 휴가를 내라고 한 거야? 그 이야기를 하려고?”
“아마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르사크가 헛웃음을 쳤다. 그 순간 아르사크의 어깨에 앉아 있던 소르흐가 들쥐라도 발견했는지 동그란 머리를 까딱거리며 노란 눈을 빛냈다.
아르사크는 소르흐를 홰로 옮겨놓은 후 말에서 뛰어내렸다. 로즈안나는 저도 모르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아르사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다음에 벌어진 일 때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르사크 님.”
“너를 위해 기쁜 일이야.”
아르사크는 로즈안나를 꼭 껴안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친언니처럼 다정하고 벅찬 목소리였다.
어린 시절, 로즈안나가 황궁에 들어오기 전까지 무척 마음고생을 하며 살았다는 것을 아르사크도 알고 있었다.
부모들도 애정을 주지 않았고, 기댈 곳도 없이 천덕꾸러기처럼 살았던 로즈안나가 마음을 둔 누군가와 결혼한다는 것은, 이제야 비로소 로즈안나에게도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것이었다.
로즈안나는 울 듯 말 듯 한 표정을 한 채 쑥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이제 막 펼쳐진 새로운 행복에 겨워 붕 뜬 기분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 아르사크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아직 정확한 건 정해지지 않았어요. 서로 이야기만 나눈 상태니까요.”
“테오도르는 이미 몸이 달아서 어쩔 줄 모를걸? 눈 깜빡할 사이에 드레스며 마차까지 네 앞에 대령해 놓을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렴.”
아르사크는 마치 자신이 청혼을 받은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로즈안나는 웃기만 했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뺨이 좀처럼 식지 않았다.
* * *
최고 신관인 듀터스와 그를 보좌하는 주임 신관 두 명은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접견실로 들어갔다. 황궁 안에는 접견실이 여럿 있었는데, 듀터스는 이곳이 가장 규모가 작고 비밀스러운 접견실임을 알고 있었다.
동쪽을 정방향으로 마주 보는 창밖으로는 후원에 심어놓은 오래된 호두나무의 굵다란 가지들이 싱싱하게 뻗쳐 있는 것이 보였다.
창틀 바깥의 아래쪽에는 벽을 타고 올라온 담쟁이 넝쿨의 가느다란 줄기가 숨바꼭질을 하듯 고개를 내밀고, 유리를 통해 들어온 햇빛이 흑단목 테이블 위를 따뜻한 빛으로 물들였다.
그러나 아늑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신관들은 긴장한 표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정확히는 주임 신관 두 사람은 그랬다. 이 협상의 총책임자라고도 할 수 있는 듀터스는 속내를 매끄럽게 감춘 채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에리히는 주임 신관 두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듀터스만을 빤히 응시하다가 의례적인 손짓을 하며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앉으시오.”
듀터스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뒤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과 같은 재질의 나무로 견고하게 짠 의자의 등받이에는 산호를 물결 모양으로 깎아 만든 장식이 붙어있었다.
에리히가 앉은 의자는 물결의 윗부분에 금테를 두른 장식을 더했고, 등받이의 폭이 더 넓어서 앉아 있는 사람에게 위엄을 부여하는 듯했다.
“그대들이 내게 올린 문서는 이미 읽어보았소.”
에리히는 듀터스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의외로 평온하게 말했다.
에레벤나에 대한 시민들의 신앙심을 확대하고, 신성한 임무를 맡은 사제들이 세속적인 인물들과 결탁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황실 신관들의 권한을 확대해 달라는 요구 사항이 적힌 문서였고, 에리히는 그것을 읽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그 사실을 듀터스가 알 리 없었지만, 가끔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빤히 알 수 있는 일들이 있는 법이었다.
“폐하께서 미리 읽어보셨다니 다행입니다. 저를 비롯한 신관들과 대수도원의 제르마노 수도원장, 그리고 각 지방의 주요 수도원에서 에레벤나를 모시는 책임 사제들과 수도원장들의 공통된 요구입니다. 폐하께서 현명하게 헤아리시어 저희들의 뜻을 능히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왜 그대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지부터 설명하는 것이 순서인 것 같은데?”
주임 신관들이 움찔하는 것이 듀터스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나 듀터스는 전혀 주눅 들지 않은 기세로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당한 말씀이십니다, 폐하.”
“그럼 최고 신관인 그대가 한번 말해보시오. 내가 왜 신관들의 권한을 여기서 더 인정해 줘야 하지?”
“황후 마마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에리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은 몹시 날카롭게 변했다. 관계없는—에리히가 생각하기에— 자들의 입에서 이 이상 아르사크의 이름이 함부로 거론되는 것을 그냥 묵과할 수 없었다.
“세속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신관이 어째서 함부로 황후의 존재를 운운하지?”
“세속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저희들이, 황후 마마의 누명을 벗겨드리기 위해 나섰던 일은 잊으셨습니까?”
“지금 그 일을 빌미 삼아 나를 협박하자는 수작이라면, 그대는 목숨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오.”
주임 사제 중 한 명은 놀란 나머지 의자에 앉은 채로 엉덩이를 들썩거리다 테이블 아래에 무릎을 쾅 부딪혔다. 그는 자신을 향하는 에리히와 듀터스의 시선을 동시에 받고는 아픈 무릎을 어루만질 새도 없이 석상처럼 굳어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신을 모시는 자는 남을 협박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올바르고 고결한 일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듀터스가 말했다. 에리히는 속으로 능구렁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심드렁하고 무관심한 티를 내며 비뚜름한 자세로 턱을 괴었다.
“그럼, 뜬금없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황후를 거론한 이유가 뭐지?”
“황후 마마께서는 이 나라의 누구보다도 에레벤나 신의 은총을 받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순간 에리히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듀터스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음 말을 이었다.
“황후 마마께서는 처음 그 자리에 오르실 때부터 에레벤나의 손길 아래 보호를 받으신 분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제국의 시민들은 안팎의 여러 문제에 짓눌려 에레벤나에 대한 믿음은 지속적으로 약해지기만 했습니다. 그 때문에 수도원은 게으른 귀족들의 도피처가 되었고, 신관들 중에서도 타락한 자들이 넘쳐났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폐하께서 더욱 잘 아시겠지요.”
생각해 볼 것도 없는 문제였다. 이미 몰락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볼핀 후작, 그가 득세했을 시기에는 황실 소속의 최고 신관마저도 그와 내밀한 결탁을 맺고 귀족들 사이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에리히는 볼핀 후작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사제와 귀족의 결탁은 신앙심의 문제라기보다는 사제 개인의 도덕성과 관련된 문제가 아닌가? 신관들을 더욱 엄하게 단속한다면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오.”
“외람되오나 폐하, 그것은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합니다. 신을 모시는 자들의 마음속에도 권력과 부에 대한 탐욕은 시시각각 깃들며, 인간의 힘으로는 그것을 다 통제할 수 없습니다. 상벌로만 올바른 인간을 키워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그렇다면 더더욱 그대들의 요구를 이해할 수 없군. 엄격한 법의 통제로도 불가능한 것을 고작 증명되지 않은 신앙심에 의존하여 해결하겠다? 지나가는 어린애도 안 믿을 소리라는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겠소?”
“그렇기에 황후 마마께서 계시는 지금이 적기인 것입니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 에레벤나의 보살핌을 받고 계시며, 그분께 에레벤나의 신탁이 내렸음을 모두가 목격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신앙심이 깊은 자를 신관들이 직접 선발하여 길러낸다면, 시민들의 흐려진 신앙심을 복구할 수 있습니다. 신을 모시는 자들에 대한 믿음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폐하께서 먼저 신을 경외함을 보여주셔야 함이 마땅하지요.”
“그대의 말은 우습고 얄팍하군. 신앙심의 모범을 보이기 위한 방법이 신관들의 독립적인 권한을 인정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오. 또한, 황후와 관련하여 불가해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겠소. 그러나 그것이 꼭 에레벤나 신과 관련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
“외람된 질문이오나,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힘의 근본이 신에게만 있음을 부정하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것이 황후 마마께서 가진 어떤 권능이라고 믿으시는 것입니까? 세속의 인간은 결코 그러한 신성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물며…….”
“황후에 대한 언급은 삼가도록 하시오. 이 일에 황후를 핑계 삼을 생각 같은 것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좋을 테니.”
에리히는 듀터스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강경했다. 신관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대체로 엇비슷한 태도를 취해왔지만, 아무래도 황후가 연관되어 있어서인지 평소보다도 더욱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막무가내로 반대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말마따나 황후에 대해 섣부른 말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목숨이 오락가락할 것처럼 첨예하고 팽팽한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