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왜 이렇게 늦었어?”
에리히의 말에 아르사크는 발끈한 표정을 지으며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예고도 없이 숨바꼭질을 한 게 누군데요?”
“숨은 곳을 가르쳐주는 숨바꼭질도 있나?”
“기가 막혀. 대체 왜 이런 곳에 혼자 와 있으신 거예요?”
에리히는 아르사크가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이쪽으로 오라는 듯이 가볍게 턱짓을 했다.
확 가서 무릎을 걷어차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르사크는 조심성이라고는 없는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에리히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오른편 뺨은 노을을 받아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 시기에 노을이 제일 잘 보이는 곳은 광장이 아니라 여기야.”
아르사크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과연 그의 말대로였다. 황궁은 광장보다도 지대가 더 높은 곳에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꼭대기 층까지 올라와 있었으니 하늘이 더욱 가깝게 보였다. 멀리, 물결처럼 겹겹이 앉은 산꼭대기 너머에서부터 타오르는 불처럼 몰려든 노을은 잠시 넋을 잃을 만큼 황홀했다.
아르사크는 그 하늘이 사막에서 보았던 저녁 하늘과 몹시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도 없고,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가 마차에 치일 걱정도, 소매치기를 당할 걱정도 없고.”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노을 진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피식 웃었다.
“요컨대 특별석이로군요. 퍽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다 마음에 안 드는 것만 있어서야 황제도 못 해 먹지.”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말투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여느 때처럼 딱딱하고 불친절한 말투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홀려버릴 것 같은 노을이 에리히 같은 냉정한 황제조차도 조금쯤 누그러지게 만들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 복도는 조용해서 좋아.”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복도는 여전히 묵직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지금처럼 안온한 빛깔이 들어올 때라면 모를까, 한밤중 혹은 새벽에 들어왔다면 분위기는 무척 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르사크는 불길에 뒤덮인 것처럼 보이는 에리히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습니다. 왜 아무도 없는 거죠?”
“누구든 이곳에 들어오는 걸 내가 금지했으니까.”
생각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아르사크는 대답을 기다리듯이 에리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시선을 돌린 에리히는 놀랍게도 꽤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채 아르사크를 보고 있었다.
“유레나와 어머니가 계시던 곳이야. 주기적으로 청소를 할 뿐, 아무도 이곳에 오지 못하지. 나를 제외하고는.”
“…그러면서 저를 여기로 부르신 이유가 뭔가요?”
“그러게. 왜 그랬을까?”
이런 대답도 에리히다운 것은 아니다. 아르사크는 그의 표정이 단순히 부드러워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순간 깨달았다.
정확한 말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굳이 표현하자면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황제의 금관도 가면도 벗어버리고, 그냥 에리히 클로츠로 존재하는 그는 뜻밖에 무척 약해 보이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그건 뭐지?”
그제야 아르사크는 자신이 여태까지 한 손에 가죽 주머니를 꽉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리히는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보여 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잠시 갈등하던 아르사크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에리히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안 그래도 드리려고 했습니다. 재촉하시기는.”
“주다니? 내게?”
“그럼 여기 폐하 말고 또 누가 있나요?”
주머니를 받아든 에리히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무심한 얼굴로 되돌아온 채 아르사크가 수놓은 무늬를 꼼꼼히 검사라도 하는 듯했다.
만듦새에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나처럼 얄미운 말 한마디도 하지 않자 되려 아르사크 쪽이 이상한 초조함에 평정심을 잃고 있었다.
“검집이나 화살집을 만들어 보려다가, 가죽을 만지지 않은 지 오래되어서요. 일단 작긴 하지만 주머니를 만들었으니 잃어버리기 쉬운 것들을 넣어두도록 하세요.”
아르사크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에리히는 별다른 대답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물었다.
“이 무늬들은 뭐지?”
“월계수, 연영초, 그리고 수레국화예요. 이전에 보고서 한 번쯤 수를 놓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대들이 자수를 놓을 때는 항상 무늬에 의미가 있다고 하던데.”
쓸데없이 별 걸 다 안다. 아르사크는 별안간 헛기침을 했다.
“네, 그래요. 의미가 있죠.”
“설명해 봐.”
에리히의 말에, 아르사크가 눈을 가늘게 뜨며 톡 쏘듯이 대꾸했다.
“‘설명 좀 해줄 수 있을까?’라고 공손하게 물어보시면 설명해 드리죠.”
순간 에리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아르사크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로 팔짱을 끼며 버티려는 자세를 잡자,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내가 아는 바가 적으니, 설명을 좀 해줄 수 있겠소? 황후.”
옆에 테오도르나 로즈안나가 있었더라면 놀라서 하늘을 다시 쳐다봤을 것이다. 아마 뒤집어진 땅이 거기에 가 붙어있을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
아르사크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의외로 순순하기만 해도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싶을 판에, 이건 난데없이 해가 네 개쯤 뜬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거예요?”
“뭐가 무슨 속셈이야?”
“왜 이렇게 공손해요?”
“공손하게 물어보라며. 시키는 대로 해줘도 난리로군.”
“적당히 공손해야지, 사람을 겁주라는 말은 아니었다고요. 맙소사, 오늘 꿈에도 나오겠네.”
“그래서 설명은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아르사크는 어깨를 부르르 떠는 시늉을 하며 에리히에게로 좀 더 가까이 다가섰다.
에리히는 진저리 치는 아르사크를 얄미워 죽겠다는 눈으로 흘겨보다가 주머니 위의 무늬로 시선을 옮겼다.
“월계수는 명예로움을 상징하죠. 명예를 아는 황제가 되시라는 의미에서 수놓은 무늬입니다.”
“이건?”
에리히의 손끝이 연영초를 짚었다. 그의 손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아르사크는 새삼스럽게도 그의 손끝이 무척 단정하고 매끄럽게 깎인 조각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연영초는… 깊고, 고요하고, 그리고 간절한 마음을 전할 때 자주 쓰는 꽃이에요.”
깊고, 고요하고, 그리고 간절한 마음.
에리히의 눈은 이제 주머니의 무늬에 가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아르사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레국화의 의미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행복한 인생을 약속하고 또 소원하는 꽃이었다. 제국의 황제와 황후가 결혼을 하고 신행을 떠날 때도, 마차가 황궁의 뜰을 다 벗어날 때까지 길 위에 수레국화를 점점이 뿌렸다.
에리히는 희미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아르사크는 전부 잊었겠지만, 에리히는 잊지 않고 기억하는 장면이었다.
거친 바위와 낮은 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바람과 자신과 그리고 어린 아르사크만이 존재하는 것 같던 그 조용한 곳에서 한참 동안이나 하늘을 올려다본 기억이었다. 그때는 아이들의 머리 바로 위에 해가 떠 있었고, 평화로운 고요함은 잠깐뿐이었다.
그러나 그 기억 속의 고요함은 에리히에게 있어 최초라고도 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의 그림자만이 가득한 이 복도에 혼자 머물 때, 에리히는 그때 그 바위 사막에서 경험했던 아득한 침묵을 떠올릴 때가 있었다.
멋대로 풀어 헤친 머리칼을 휘날리면서, 자신이 선 곳보다 훨씬 높은 바위 위에 당당하게 서서 바람을 맞고 있던 아르사크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가만히 더듬어 생각하기도 했다.
“폐하?”
아르사크가 고개를 들었다. 에리히는 무표정하게도 보이는 얼굴로 아르사크의 뺨을 손바닥으로 살짝 감쌌다.
그 정도의 접촉은 이제 서로에게 있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만큼의 거리에 서로를 두기까지는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무척 찰나의 일인 것 같기도 했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뺨을 감싼 채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검은 비단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그 사이에서 반짝이는 가느다란 금빛 장신구들, 뿌리 깊은 나무의 영혼이 깃든 것 같은 눈동자, 고집 세고 강인한 입매와 가늘고 곧게 뻗은 목, 단단하고 아름다운 선.
그 모든 것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르사크가 그렇듯, 에리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눈부신 빛무리에 둘러싸인 채 자기 자신조차 잃어가는 듯하던 아르사크를 보았을 때, 에리히는 신의 권능에 두려움을 느끼기는커녕 분노를 먼저 느꼈다.
무엇이 되었든, 신이든 인간이든, 혹은 알 수 없는 괴물이든, 그 누구라 하더라도 아르사크를 앗아간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가장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없애버릴 것이었다.
정신을 잃은 아르사크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면서 에리히가 했던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 땅이 뒤흔들리고 불길이 치솟는, 도저히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비규환의 한복판에서 아르사크를 향해 그토록 절실하게 외쳤던 한 마디였다.
‘부탁이야. 이리로.’
‘내게로 와.’
에리히는 자신이 이미 균형을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몸이 기울어지기 이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아니, 아르사크가 자신에게 주머니를 건네주었을 때부터다. 그것도 아니면 아르사크가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에리히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지 몰랐다.
아르사크는 천천히 가까워지는 에리히의 얼굴을 보면서도 눈을 감지 않고 있었다.
뺨을 감싼 에리히의 손끝에 아주 약하게나마 낯선 힘이 들어갔다는 것을 겨우 알아차리고서야, 입술 아래에 와 닿는 따뜻한 호흡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균형이 깨지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아르사크가 눈을 감자, 에리히의 온기 어린 부드러움이 입술 위로 겹쳐졌다. 그 감촉은 낯선 것이었지만, 뒤미처 흘러드는 향기는 무척이나 익숙했다.
“…….”
부드럽게 맞닿은 입술 사이로 한숨 같은 호흡이 새어 나온다. 뺨 위를 어루만지는 에리히의 손끝이 미지근하게 더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르사크는 어색하게 들어 올렸던 양팔로 그의 어깨를 휘감듯 껴안았다.
온 하늘을 새빨갛게 뒤덮었다가 푸르스름하게 꺼져가는 노을 뒤로 때 이른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