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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28화 (128/191)

128화

“어서 오십쇼. 연인들만을 위한 마차! 타기만 하면 사랑이 철철 넘치게 되는 마차! 불타는 노을 아래서, 불길보다 뜨거운 사랑의 눈빛을 주고받을 수 있는…….”

“…타겠네. 얼만가?”

“…‘정열의 마차’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금화 한 닢에 이 부근을 아주 물길 타듯이 매끄럽게 돌아드리지요. 이 녀석들이 꼴은 이래도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황실에서나 다룰 법한 명마의 후예들…….”

테오도르는 마부의 능청스러운 사설을 끊고 그의 손에 금화를 쥐여 주었다. 솜이 다 죽어버린 쿠션과 너무 낮은 난간 때문에 불안하긴 했지만, 로즈안나는 테오도르의 손을 잡은 채 말없이 마차에 올랐다.

마부석에 앉은 마부는 아직 손님을 잡지 못한 다른 마부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휘파람을 불면서 마차를 출발시켰다.

“천천히 몰아주게.”

“염려 마십쇼. 이 녀석들은 빨리 달리려야 달릴 수가 없습니다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명마의 후예라더니 태연자약하게 말을 바꾸는 태도가 뻔뻔하다 못해 우습기까지 하다. 하긴 이런 것도 이 시기의 재미 중 하나이기는 했다.

테오도르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꼭 다문 로즈안나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명마의 후예라고 하지 않았나?”

“아, 물론 명마의 후예는 맞지요. 맞는데, 암만 명마라도 세월은 못 이기는 법이거든요.”

그러나 마부의 능청과는 달리 말들은 꽤 힘들이지 않고 천천히 잘 걸었다. 달각거리는 바퀴 소리와 약간의 흔들림, 길 너머로 보이는 외곽의 풍경과 산등성이 끝에서부터 밀려드는 노을로 황홀한 저녁이 시작되고 있었다.

로즈안나는 무릎 위에 양손을 가만히 포갠 채 막 깔리기 시작한 노을을 바라보다가 테오도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걸 보여주려고 제게 휴가를 내라고 하셨던 건가요? 테오도르 님.”

테오도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안나의 기분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정작 중요한 말을 꺼낼 만한 기회를 잡기가 힘들었다.

테오도르는 우물쭈물 망설이듯 입술만 하염없이 움직이고 있다가 무언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으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로즈안나.”

“네, 테오도르 님. 말씀하세요.”

“내가…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는데, 되도록이면 솔직하게…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구나.”

로즈안나는 무릎 위에 얹힌 손을 가만히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늘 호위기사로서 필요한 복장만을 갖춘 모습만 보다가, 오랜만에 그렇지 않은 차림을 한 테오도르를 보니 마치 어릴 때로 돌아간 것처럼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허리에는 여전히 검을 차고 있었지만, 에리히의 호위기사일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황제를 지키는 역할은 아무 일이 없더라도 늘 어딘가는 긴장을 하고 있어야 하므로, 에리히 옆에 서 있는 테오도르는 거의 대부분 단단한 껍질에 싸인 것처럼 다가서기 힘들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테오도르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물어보세요, 뭐든지.”

“로즈안나, 너는… 만약, 시간이 십 년쯤 더 흐른다면 그땐 어디서 뭘 하고 있을 것 같은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니?”

로즈안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일이 년이라면 모를까, 십 년 뒤의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쎄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아마 여전히 황궁에서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로즈안나가 말했다. 테오도르는 벌게진 뺨을 감추려는 듯이 손바닥으로 입가를 쓰다듬다가 공연히 시선을 돌렸다.

“나와 함께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그 순간, 마차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도,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노을을 보며 호들갑스럽게 감탄하는 소리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니, 실제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로즈안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함께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굳이 되물을 필요도 없었다. 설마 함께 일을 하자는 것은 아닐 테니까.

테오도르가 농담으로 로즈안나에게 그런 소리를 했다간 에리히와 아르사크에게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지고 한 대 더 맞을지도 몰랐다. 말은 안 했지만 테오도르도 왠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로즈안나는 마음과 달리 선뜻 그의 말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테오도르 님, 운트겔 가문은… 다른 어떤 귀족들보다도 고귀한 집안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알고 싶은 건 너의 마음이지.”

테오도르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 사람처럼 로즈안나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그렇지 않아도 꺼내기가 그토록 힘들었던 마음이다. 에리히 앞에서는 담담한 척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거절당하고 싶지 않았다. 로즈안나가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거라면 마음이 찢어질 것 같더라도 수긍할 수 있었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테오도르는 결코 로즈안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로즈안나는 노을이 비쳐 능금빛으로 빛나는 테오도르의 눈동자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의 부모님이 자신의 출신을 이유로 박대하거나 결혼을 반대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운트겔 부인은 로즈안나가 어릴 때도 몇 번 만난 적 있었는데, 선황후로부터 로즈안나의 처지를 전해 듣고는 테오도르를 통해 크고 작은 선물을 따로 보내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로즈안나는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테오도르와 결혼을 하게 되면, 오래전에 절연하다시피 한 자신의 친부가 운트겔 가문과의 친분을 위해 뻔뻔스럽게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친부와 의붓어머니는 로즈안나의 인생을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하지만, 만약 로즈안나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다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찾아오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나도 알고 있어.”

테오도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로즈안나의 눈가에는 눈물이 촉촉하게 고여 있었다. 테오도르는 머뭇거리듯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려 로즈안나의 눈가를 문질러 닦아주었다.

“폐하께서 네 혼사를 주관해 주신다고 했다. 굳이… 상대가 내가 아니어도 말이야.”

로즈안나의 얼굴에 단박에 당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그만큼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테오도르는 열에 들떠 따끈따끈해진 로즈안나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러니, 너를 내친 그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라면 하지 않아도 돼.”

“테오도르 님, 그건… 저는 정말…….”

“내가 폐하를 졸라 일이 그렇게 된 게 아니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폐하께서 먼저 꺼내신 말씀이니, 아마 예전부터 네 혼사도 염두에 두고 계셨을 거야.”

에리히가 유레나를 생각해서라도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각별하게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런 부분까지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복잡한 심정에 가만히 눈물만 떨어트리고 있던 로즈안나는 빨개진 코끝을 찡그리면서 홧홧한 이마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러니까 네 뒤에는 황제께서 계신 셈이지. 만약에 로즈안나, 네가 내… 마음을 받아준다면, 오히려 우리 집안에서 너를 황송하게 생각해야 할걸.”

테오도르는 능청을 떨던 마부처럼 짓궂어 보이는 웃음을 띠었다. 로즈안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노을을 등진 채 테오도르의 무릎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가, 어깨를 숙이면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같았어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딴전을 피우고 있던 테오도르는 로즈안나의 그 말에 고개를 홱 돌렸다.

“뭐라고 했어?”

“…저도 테오도르 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요.”

그 순간, 테오도르는 로즈안나를 와락 끌어안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갑자기 움직였다가는 이 위태롭기 짝이 없는 마차가 옆으로 기울어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대신 테오도르는 로즈안나의 손을 꽉 붙잡았다.

“…테오도르 님.”

“어, 응?”

“저기, 손이 좀 아파요.”

99장 각자의 방식 (4)

테오도르가 로즈안나와 노을을 배경으로 마차를 타고 있을 때, 아르사크는 에리히를 찾아 별궁의 계단을 오르면서 씩씩대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거추장스럽게 휘감기는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또 한 손에는 조금 전 자수를 완성한 가죽 주머니를 든 채로.

어디로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늘 그랬던 것처럼 서재나 집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에리히는 둘 중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자주 쓰는 침실도 차례대로 찾아가 보았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일곱 번째 허탕을 치고 기어이 인내심이 바닥난 아르사크가 도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시종장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에리히가 별궁에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머물 사람이 없는 별궁은 지나다니는 시종들이나 몇몇 귀족들 이외에는 조용하기만 했다.

아르사크가 부글부글 끓는 눈으로 시종장을 돌아보았을 때, 그는 마치 자신이 죄라도 지은 양 눈치를 살피면서 에리히가 별궁의 꼭대기에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도대체 이런 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별궁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계단의 수가 쓸데없이 촘촘하고 많아서 거추장스러웠다. 아르사크는 두 단, 세 단을 한꺼번에 훅훅 뛰어오르다가 꼭대기를 반 층 남겨놓고 숨을 골랐다.

에리히가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이런 데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더니 덥지도 않은데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에리히는 아무도 없는 복도에 혼자 서 있었다. 아르사크는 그제야 꼭대기 층의 복도 전체가 완전히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궁에서는 이런 곳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아르사크도 알고 있었다.

어떤 곳이든, 주인 없이 빈방이라도 청소를 하거나 관리를 하는 시종들이 늘 상주하기 마련이었고, 아무리 외진 곳이라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한둘은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아무리 꼭대기 층이라고는 하지만 오가는 시종들도 없고 문 닫힌 방 안에서는 어떤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빈 복도의 창가에 에리히는 서 있었다. 아치형의 아름다운 창문으로 저녁 무렵의 저물어가는 햇빛이 스며들어 융단은 단풍이라도 깔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어떤 빛은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이기도 했다.

아르사크는 그것이 창문의 유리에 덧붙여진 얇은 색유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장식이라기보다는, 누군가 몰래 장난을 치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저기에 두서없이 붙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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