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아르사크는 얼른 아기를 달랠 때처럼 입술을 내민 채 어르는 시늉을 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어구, 그래. 그 카른인지 뭔지가 잘못했네. 요 귀여운 루이제의 청혼을 왜 재깍 받아주지 않고 말이야. 어떠니, 루이제? 그 녀석을 데려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두들겨 패줄까?”
“마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때리실 거면 저부터 때리세요!”
“그래? 너부터 때리라는 말이지?”
“꺄악! 싫어요!”
방 안에 있는 시녀들에게는 이 소동이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짜증이 날 대로 난 황후 앞에서 감히 소리 내어 웃을 수는 없는데, 있는 힘을 다해 웃음을 참고 있자니 아랫배가 당기고 코가 벌름거릴 지경이었다.
루이제가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지른 순간, 이를 꽉 깨물며 버티던 시녀 한 명은 더는 참지 못하고 흐느끼는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그녀는 접시를 새로 끓여 오겠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주워섬기면서 건너편으로 달아나버렸다.
아르사크는 지친 주정뱅이마냥 팔다리를 사방으로 뻗으며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몸을 기댔다. 그러는 동안 벌써 네 장째의 손수건을 축축하게 만든 루이제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진짜 저랑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거면 어떡하지요?”
“대체 뭐가 걱정이야? 그 사람이 아니어도, 네가 그럴 마음만 먹으면 결혼하겠다는 남자들이 줄을 설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건 싫어요. 전 카른이랑 결혼할 거란 말이에요.”
“그럼 가서 멱살이라도 잡고 결혼하자고 해.”
“숙녀가 그렇게 난폭한 짓을 어떻게 해요?”
“황후인 내 앞에서 울고불고 패악을 부리는 건 괜찮고?”
“마마는… 저, 저는 마마의… 친, 친구 같은 거니까요.”
이건 또 뭐야.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아르사크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루이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루이제는 뒤늦게서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아르사크는 별달리 화를 내지는 않았다. 만약 아르사크가 아니었더라면 당장 쫓겨나거나 심하면 황실을 모독했다는 죄목을 덮어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아르사크는 갑자기 산뜻한 표정으로 턱을 괴면서 말했다.
“좋아. 그럼 네 친구로서 조언을 하나 해주지. 잘 들어, 루이제.”
“무… 무슨 조언, 이신데요?”
“네가 할 일은 딱 하나야. 그리고 연기를 아주 잘해야 돼.”
루이제는 얼른 고개를 끄덕거리며 착한 학생처럼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했다.
“제가 할 일이 뭔데요, 마마? 얼른 알려주세요.”
“네가 할 일은 ‘무관심한 척하기’야.”
루이제는 순간 아르사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으며 반복하듯 되물었다.
“무관심한 척하기…요? 카른에게요?”
“그래. 약혼 운운하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너무 신경 쓰지도 말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거야.”
“왜… 왜 그래야 하는데요? 그러다가 만약 카른이…….”
“토 달지 말고 일단 해보고 나서 이야기해. 만약 이 방법이 안 먹혀서 그 남자가 너랑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내가 훨씬 더 나은 신랑감을 골라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르사크는 장담을 했지만, 루이제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카르반테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이제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관심한 척을 하라니, 당장 지금도 카르반테를 보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릴 지경인데 그게 가능이나 할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루이제는 미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가 말씀하신 대로… 해볼게요.”
“그래. 절대로 연기 중이라는 걸 들키면 안 돼, 알겠어?”
“알겠어요.”
루이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엉망이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대강 닦고 일어섰다. 나붓한 자세로 절을 하는 자세를 보니 도대체 언제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를 부렸는가 싶게 우아한 데가 있었다.
“그런데요, 마마.”
문밖으로 나서려던 루이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르사크는 내던졌던 자수를 다시 집으려다 말고, 이번에는 또 뭐냐는 얼굴로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왜?”
“마마께서도 폐하께… 저기, 그런 방법을 쓰셨나요?”
“…뭐?”
“그게, 폐하께서는… 마마를 무척, 음…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전 사실 마마께서 후녀로 오셨을 때, 하루도 못 되어 쫓겨나실 줄로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폐하께서는 마마가 뭘 하시든 그냥 넘어가시잖아요? 그런 걸 보면…….”
“셋 셀 동안 얼른 가, 루이제. 하나, 둘…….”
아르사크가 소파에서 일어나려는 시늉을 하자, 루이제는 꺅 소리를 지르며 허둥지둥 복도를 따라 내달렸다. 아르사크는 짐짓 숨 돌리는 시늉을 하면서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무례한 것. 다음에 또 패악을 부리러 오면 그땐 엎어놓고 엉덩이를 때려야지.”
시녀들은 그제야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르사크는 일부러 엄격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팽개쳤던 자수를 다시 한 땀 한 땀 놓기 시작했다.
애초에 연애사 같은 한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살아온 아르사크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도 아닌 루이제의 연애사를 골치가 다 아프도록 듣고 있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무슨 일만 있으면 매번 이렇게 찡얼거리러 오느니, 차라리 예전처럼 눈에 빤히 보이는 염탐을 하러 오는 편이 더 편할 지경이었다. 그건 적어도 두통거리는 아니었으니.
아르사크가 자수를 거의 다 완성해 갈 때쯤이었다. 황제의 시중을 드는 시종장이 아르사크의 방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황후 마마,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나를? 왜?”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서둘러 준비해 주십시오.”
아르사크는 시종장의 말을 들으면서도 바늘을 움직여 수를 놓으며 대꾸했다.
“곧 간다고 전하게.”
시종장은 다시 한번 허리를 깊게 숙인 뒤 물러났다. 아르사크는 좀 더 빠르게 손을 움직여 마지막 무늬를 완성했다. 그러고는 약간 뿌듯한 표정으로 완성된 것을 가만히 매만졌다.
한 뼘을 조금 넘는 크기의 주머니 위에 월계수와 연영초, 그리고 수레국화 무늬가 섬세하게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98장 각자의 방식 (3)
마차에 탄 로즈안나는 내내 얼떨떨한 기분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기만 했다. 느닷없이 휴가를 내고 나오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하긴 했는데, 테오도르는 로즈안나를 마차에 태우기만 했을 뿐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지, 오늘 만남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마차에 오르기 전에 용건부터 물었겠지만, 상대가 테오도르이니만큼 로즈안나도 멍하니 마음을 놓았던 것이다.
“저어… 테오도르 님.”
창틀에 팔꿈치를 괸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테오도르는 무엇에 찔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가 앉은 자리가 순간 덜컹거렸을 정도다.
로즈안나는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고는 별안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테오도르 님, 혹시…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가요?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든지……?”
“응? 아… 아니, 전혀. 그런 게 아니야.”
“하지만 아까부터 안색이 조금…….”
“아냐, 괜찮다. 아무 일 없어. 음, 오늘은 이렇게… 나를 만나러 나와줘서… 음, 고마워.”
로즈안나는 점점 더 분위기가 수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 테오도르에게서 볼 수 있는 차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무슨 도박 빚이라도 지고 달아나는 사람마냥 계속 안절부절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휴가를 내라고 한 건 자신이면서, 만나러 나와줘서 고맙다니? 도통 앞뒤가 맞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그러나 테오도르는 대강 얼버무리기만 할 뿐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로즈안나는 점점 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침묵 속에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멈춘 곳은 시가지 외곽이었다. 이따금 상단의 짐마차가 지나다니는 것 외에는 한산한 곳이었으나, 시기가 시기다 보니 그곳 역시 여느 때와는 달리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 부근의 길은 수도의 주변을 따라 막힌 곳 없이 매끄럽게 뚫려 있어서, 노을이 한창 타오르는 시간에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걷거나 마차를 타고 한가롭게 산책하기 좋았다.
그래서 시가지 안쪽에서 좋은 목을 잡지 못한 노점상이나 점술가들은 이곳에라도 자리를 잡고 좌판을 벌여 놓고 잡다한 것들을 팔거나 점을 봐주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여기는……?”
로즈안나는 이번에야말로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눈으로 테오도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뉘엿뉘엿 기울어지기 시작한 느긋한 햇빛 때문인지, 테오도르의 뺨은 평소보다 좀 더 붉어 보였다.
“테오도르 님, 왜 여기로 오신 건가요?”
“어, 그게… 음, 너는… 노을 주간에 축제 구경을 해본 적이 있을까 해서. 광장 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북적거리고 정신이 없을 테니 좀 조용한 곳으로… 온 건데,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니?”
로즈안나는 눈치가 빨랐다. 아니, 눈치가 아무리 없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테오도르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는 건 불가능했다.
달아오른 뺨을 가릴 새도 없이, 테오도르는 조심스럽게 로즈안나의 손을 잡았다. 숨이 가빠지고, 차마 마주치지 못하는 두 사람의 시선이 이리저리 방황한다.
테오도르는 로즈안나의 손을 잡은 채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로즈안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그를 따라 걷고 있는데, 테오도르가 말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걸으면, 꼭 울린 것 같잖아.”
무슨 영문인지, 그 순간 로즈안나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빨개졌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로즈안나를 데리고 줄지어 선 이두마차 한 대 앞에 섰다. 이동할 때 타고 다니는 보통의 마차들과는 달리 지붕이 없는 마차였다. 염료로 칠을 하고 어설프게 금박도 붙여놓았지만 원래 용도는 수레였을 법한 그것은 노을 주간에, 그것도 이 구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테오도르와 로즈안나가 고른 마차의 앞뒤로도 수십 대나 되는 비슷비슷한 마차들이 손님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개중에는 말이 아니라, 어디로 보나 노새나 나귀인 녀석들도 있었는데, 굴레를 쓴 채 연신 콧김을 뿜으며 길가의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