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높이 솟구쳤던 공이 하나씩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기대에 찼다. 그때 갑자기 공들이 팡! 하는 소리를 내며 터지더니 조그만 꽃송이가 되어 광대의 손바닥 위로 하나씩, 하나씩 내려앉았다.
예고도 없이 벌어진 마술 같은 광경에 모여든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광대는 높은 구두를 우스꽝스럽게 휘청거리며 절을 하고는 앞줄에 선 이들에게 꽃을 한 송이씩 나누어주었다.
루이제도 꽃 한 송이를 받았다. 기분이 좋아진 루이제는 바람잡이의 손에 금화를 세 개나 쥐여 주고는 뺨 옆으로 꽃을 들어 보이며 카르반테를 올려다보았다.
“어때?”
“아주 예뻐요.”
카르반테의 부드러운 표정을 본 루이제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카르반테는 루이제의 손가락 사이에서 꽃을 빼내어 그녀의 귓가에 살짝 꽂았다. 짙은 보랏빛 꽃잎이 반짝이는 머리 장식 사이에서 새침하게 어울렸다.
귓가에 카르반테의 손이 닿았다 떨어지자 루이제의 얼굴은 곧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리던 루이제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다시 카르반테의 팔을 붙잡았다.
두 사람이 인파를 벗어나 한산한 길가로 접어들려는 찰나, 갑자기 누군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루이제?”
루이제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장식이 달린 모자와 드레스, 그리 더운 날씨가 아님에도 양산까지 받쳐 쓴 화려한 차림의 젊은 여자가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트루다 바인!”
상대가 까르르 웃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모습이 어렸을 때와 똑같았다.
트루다가 말했다.
“트루다 바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도 오랜만이야. 이제는 결혼해서 트루다 팔레로네가 됐거든. 이쪽이 남편인…….”
“볼프 팔레로네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홀드빅 남작.”
루이제는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생긋이 웃으며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친분은 없지만, 팔레로네라는 성을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트루다는 자연스럽게 루이제의 팔짱을 끼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네가 작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버님도 굉장히 심각해하셨어. 너희 아버님이랑 그래도 친분이 있으셨잖아, 옛날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난 네가 무사해서 참 기뻐.”
루이제는 잠시 애매한 몸짓으로 고개를 기울였다가 트루다를 돌아보았다.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거니와, 어릴 때도 그다지 친밀하게 지냈던 관계는 아닌데 갑작스럽게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냥…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러니까, 나중에…….”
“그러지 말고, 나랑 내 남편이랑, 셋이서 어디 가서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 좀 해. 이렇게 만난 게 얼마 만이니?”
“셋? 저기, 난 일행이 있거든. 이 사람이야.”
루이제가 카르반테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트루다는 깜짝 놀란 시늉을 하며 손끝으로 입가를 가렸다.
“어머, 네 일행이었니? 미안해, 난 또 호위인 줄 알았지 뭐야. 실례지만 어느 가문의 분이시지요?”
트루다의 질문에 카르반테는 잠시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곧 평소대로의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귀족이 아니므로, 감히 가문이라 언급할 만한 성은 없습니다. 이름은 카르반테라고 합니다.”
카르반테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이제는 팔을 감고 있던 트루다의 손이 슬그머니 풀어지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트루다는 남편의 얼굴을 한번 돌아보고는, 어색한 웃음을 띠면서 루이제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루이제… 이 사람은, 음… 네 호위가 아니라면 설마 하인이니?”
결혼하지 않은 젊은 귀족 여성들 중에는 대개 얼굴이 잘생기고 예절 교육을 받은 남자 하인들을 보호자 겸 자랑삼아 대동하고 다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트루다는 카르반테가 성이 없다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 하인이라고만 생각한 것이었다.
루이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트루다가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는 찰나, 루이제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돌아볼 만큼 크게 소리를 질렀다.
“말조심해, 못생긴 게! 이 사람은 내 약혼자야!”
97장 각자의 방식 (2)
부쩍 더워진 날씨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짜증이 나는 판인데, 아르사크는 짜증을 급속도로 돋우는 소음에 한숨을 푹푹 쉬면서 손끝에 힘을 주어 바늘을 움직였다.
그러나 미처 세 땀도 놓기 전에 빽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에 어깨의 힘이 쭉 빠졌다. 아르사크는 들고 있던 가죽과 바늘을 패대기치듯이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코앞에서 엎어져 울고 있는 루이제의 정수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루이제 홀드빅, 당장 그치지 않으면 병사들을 시켜 널 끌고 나가게 할 거야.”
눈을 부릅뜨며 위협해 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더 크게 우는 소리뿐이다. 아르사크는 두통이 도진 사람처럼 손끝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말했다.
“누가 얘 좀 데리고 나가. 시끄러워 죽겠네.”
남작이 울고불고하는 것은 못 본 체할 수 있지만, 황후가 하는 말은 못 들은 체할 수 없는 시녀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곁눈질했다.
루이제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든 채 소리를 빽 질렀다.
“뭐예요, 마마! 너무하시잖아요! 이렇게 우는데 좀 달래주시란 말예요!”
“아니, 내가 너를 왜 달래줘야 해? 정신이 있어, 없어? 여기가 네 집 안방이야? 왜 여기 와서 울고불고 난리야, 난리가!”
“황후는 모두에게 자애롭고 인자해야 한다는 건 기본 상식이라고요!”
“난 상식이 없어. 뚝 그치지 않으면 이대로 널 들어다 폐하의 서재 앞에 갖다 놓을 거야. 황제야말로 모든 백성에게 자비로워야 하니 거기서 울든지 말든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절 죽이시려는 거예요?”
조금만 더 울면 나도 널 죽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겨우 삼킨 아르사크는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툭 숙였다. 로즈안나라도 있었으면 로즈안나에게 떠맡겨보련만, 어제 반일 휴가를 승낙한 탓에 이미 궁을 나가고 없었다.
“울지 말고 똑바로 말을 해야 얘기를 듣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야.”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러자 루이제는 또다시 서러움이 복받쳤는지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음을 터뜨리려 했으나, 눈을 부릅뜬 아르사크가 손끝으로 루이제의 뺨을 꾹 눌렀다. 물고기처럼 불쑥 튀어나온 입술을 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뜬 루이제가 아예 목 놓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엉, 흐윽… 하르니…….”
“하르니? 하르니가 뭐야?”
“하유니 혀랑 야호 아하거가바여…….”
‘이걸 확 나무에 매달아 버릴까 보다.’
“뭐라는 거야? 똑바로 이야기해!”
아르사크가 다그치자, 루이제는 신경질이 난 강아지처럼 조그만 머리를 파르륵 흔들면서 아르사크의 손을 뿌리쳤다.
“카른이 저랑 약혼하기 싫은가 봐요! 으앙!”
카른은 또 누구야. 아르사크는 진이 쭉 빠진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면서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그래… 왜 그 사람이 너랑 약혼을 하지 않으려고 할까? 너 설마 그 카른인가 카드인가 하는 사람 앞에서도 이렇게 울고불고 난리를 친 거니?”
“카른! 카른이라고요! 카르반테! 그리고 이렇게 울지 않았어요!”
“아, 근데 왜 여기 와서는 이 난리야! 걔 앞에 가서 울어!”
“카른 앞에서 이렇게 울었다가 진짜로 저랑 약혼하기 싫어지면 어떡해요! 황후 마마는 저랑 약혼 안 할 거니까 괜찮아요!”
“대체 어느 머저리가 이런 애한테 작위 같은 걸 준 거지?”
“마마의 남편요!”
아르사크는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는 단지 두통이 올 것 같다는 기분만 들었는데, 이쯤 되니 진짜로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애가 무려 황후 후보였다니. 차라리 루이제가 황후가 되도록 도왔더라면, 제국이 망해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구경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카른이… 흑, 어제… 어제 제가, 흡, 카른을 제 약혼자라고 했는데… 실수긴 했지만요, 그래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카른이, 카른이 저한테 아무 말도 하질 않아요. 숙녀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으면, 당연히 정식으로 약혼을 청하는 게 맞잖아요! 그쵸? 마마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다.”
아르사크는 이 화제에 별 관심도 흥미도 없다는 티를 있는 대로 냈으나, 루이제는 어제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길게도 설명했다.
그 와중에 트루다 팔레로네인지 뭣인지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나 장황하게 험담—어릴 때부터 아닌 척 심술부리기로는 걔가 1등이었다는 둥—을 늘어놓는지, 듣다가 질린 아르사크가 귀를 막는 시늉을 하고서야 겨우 본론이 나왔다.
“그러니까… 그 카르반테라는 남자와 네가 연인 관계라 이거지?”
“네, 맞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루이제는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하고서도 자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르사크는 루이제의 바보 같은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미간을 누르듯 문질렀다.
“그런데 어제 네가 일방적으로 약혼자라는 말을 해버렸고.”
“맞아요, 아니… 그렇지만 완전히 일방적인 건 아니에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르사크가 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자, 루이제는 변명하듯이 손끝을 꼼지락거리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그, 그런 말이… 정식으로 오간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 연인 사이니까, 언젠가는 결혼을 할 거잖아요!”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사귀면 다 결혼하니?”
“전 그럴 거예요!”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냥 너랑 잠깐 연애를 하고 싶을 뿐일 수도 있지. 안 그래?”
그 말을 하자마자 보인 루이제의 표정에 아르사크는 곧바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뱉은 말이다. 둘 다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으아앙!”
‘죽겠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