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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25화 (125/191)

125화

“제가 받아드리겠습니다. 조심해서 내려오십시오.”

“받긴 뭘 받아? 저리 비켜. 깔려도 모른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다치실지도 모릅니다, 마마.”

“안 다친다니까.”

그러고는 디디고 있던 나뭇가지를 붙잡은 채 몸을 아래로 훅 떨어트렸다. 가지를 붙잡고 길게 매달린 아르사크는 해맑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나 몰골은 눈 뜨고는 못 봐줄 지경이었다.

“아르사크 님, 얼른 내려오세요! 세상에, 옷이……! 누가 보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어서요.”

로즈안나의 말에 옆에 있던 테오도르도 벌게진 고개를 돌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뭇가지에 걸리고 쓸려 오른쪽 소매 하나는 아예 팔꿈치까지 찢어졌고, 치맛자락도 여기저기 긁히고 찢어진 자국투성이다.

아르사크는 흡, 하고 숨 들이마시는 소리를 내고는 가지를 쥐었던 손을 놓았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땅을 툭 디디며 가볍게 착지한다.

시녀들조차 전부 물리고 나온 것이라 걸쳐줄 옷도 여의치가 않았다. 결국 로즈안나는 급한 대로 테오도르가 두르고 있던 맨틀릿을 풀어 아르사크의 어깨에 숄처럼 둘러주었다.

“어서 들어가세요, 아르사크 님. 이러시다 폐하의 눈에라도 띄시면…….”

“잔소리나 좀 듣고 말겠지. 뭘 그렇게 걱정하니?”

“제발 좀 그냥 가세요.”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등을 꾸역꾸역 밀다시피 하며 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테오도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테오도르 님! 그 사과 바구니 좀 가지고 와주시겠어요?”

그 말을 듣고서야 바닥에 굴러다니는 바구니에 생각이 미쳤다. 테오도르는 떨어진 사과를 주워 바구니 안에 담고는 로즈안나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나가는 길에 만나러 가볼까 하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는데.’

사실 테오도르가 휴가를 얻은 이유는 로즈안나 때문이었다. 에리히가 부추겨서—거의 비난조에 가깝긴 했지만— 그렇다기보다는, 그도 역시 더 이상 지지부진한 마음가짐으로 로즈안나 곁을 서성거리기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로즈안나의 정확한 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기거나 싫어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한발 더 나아가고 싶었다.

테오도르가 로즈안나를 봐온 시간은 한두 해가 아니었다. 어릴 때는 단순히 안쓰러운 여동생 같았지만, 그저 천진난만하기만 한 시선으로 로즈안나를 대할 수가 없게 된 지 이미 오래였다.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인정하고, 로즈안나에게 부담이 가지 않을 방향을 고민하느라 몇 년의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았다. 우물쭈물하다가 어리숙하게 마음을 들켜 관계가 어색해지는 것만은 사양이었다. 게다가 혹시라도 로즈안나가 다른 사람과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96장 각자의 방식 (1)

아르사크가 옷을 갈아입고,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정돈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시녀들 두 명이 시중을 드는 동안, 로즈안나는 기다리고 있는 테오도르를 위해 밖으로 나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차분한 표정으로 되돌아왔지만, 왠지 머쓱한 기색이었다.

“죄송해요, 테오도르 님. 보기 흉한 꼴을 보여드렸네요.”

“뭐? 아니, 그렇지 않아. 저, 이건……?”

테오도르가 사과 바구니를 가리키자 로즈안나는 다른 시녀를 불러 사과를 씻어오게 했다.

테오도르가 그래도 가지 않고 멋쩍다는 듯이 미적거리자, 로즈안나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말했다.

“맨틀릿은 나중에 세탁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냥 내게 줘도… 괜찮은데.”

“그럴 수야 있나요. 괜찮으시면 잠시 기다리셨다가 아르사크 님과 함께 차를 드시고 가세요. 사과도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아냐, 그럴 것 없어. 나는… 괜찮아.”

“그러세요?”

로즈안나는 그제야 테오도르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쩔 줄 몰라 불안정하게 서성거리는 것이 평소와는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시선은 자꾸만 아르사크가 있는 쪽의 문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로즈안나는 테오도르가 왜 그러는지를 알아차렸다.

“저, 테오도르 님.”

말을 꺼낼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로즈안나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자 테오도르는 내심 깜짝 놀랐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즈안나는 왠지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일은… 폐하께는 보고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르사크 님께서… 이렇게, 음… 자유분방하게 행동하시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폐하께서 굳이, 꼭… 아셔야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둘러대려다 보니 왠지 말이 이상하게 꼬인다. 테오도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로즈안나를 내려다보다가 깨달았다. 로즈안나가 어색해하는 이유는 자신이 에리히에게 아르사크에 대한 일을 일러바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양쪽 다 서로를 완전히 오해한 셈이었다.

“난 그러려던 생각은… 없었어.”

“정말이신가요? 다행이네요.”

단장을 마쳤는지, 문 너머에서 부산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다급해진 테오도르는 돌아서려는 로즈안나의 손목을 가볍게 움켜쥔 뒤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말했다.

“황후 마마께 말씀드려서 내일 오후에 반일 휴가를 써. 점심때가 지나면 별궁 쪽의 남문 앞에서 기다려. 마차를 보낼 테니.”

“…네? 테오도르 님, 갑자기 그게 무슨…….”

“설명은 내일 하마. 알겠지? 알겠다고 해줘.”

안 하면 울기라도 할 것 같다. 당황한 로즈안나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테오도르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아르사크에게 인사를 전해달라는 말을 남긴 채 쌩하니 밖으로 나갔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어째선지 뒤가 켕기는 사람 같은 태도였다.

시녀가 사과와 차를 가지고 왔다. 풋사과는 싱싱하고 맛있어 보였다. 아직 덜 여물어 과육까지도 희미한 연둣빛을 띠고 있는 것이 보기만 해도 상큼하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아르사크는 접시 위에 썰어놓은 사과를 보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맛있겠다. 향기도 굉장히 좋은걸?”

“어서 드셔보세요. 그렇게 위험천만한 곡예까지 하셨으니 더 맛있을 겁니다.”

“아직도 화난 건 아니지, 로즈? 너도 하나 먹어봐. 자, 어서.”

아르사크는 일을 하고 있는 시녀들까지도 불러 골고루 사과를 나누어주었다. 졸지에 방 안이 왁자지껄해진다.

풋사과는 여름에 나오는 과일 중에서도 값이 비싼 편에 속해서, 어지간해서는 좀처럼 맛보기가 힘든 것이었다. 가을에 먹는 사과와는 씹는 맛도 다르고, 혀끝에 감도는 풋내가 떫은 듯하면서도 달콤했다.

“저, 아르사크 님.”

“응, 왜?”

“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혹시 내일 오후에 반일 휴가를 써도 괜찮을까요?”

아르사크는 로즈안나를 힐끔 돌아보고는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어?”

“아뇨, 급한 일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다녀올 곳이 좀 있어서요.”

왠지 테오도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워 로즈안나는 대강 얼버무리고 말았다. 다행히 아르사크는 별다른 말 없이 로즈안나의 휴가를 허락해 주었다.

로즈안나는 시녀가 들고나온 아르사크의 찢어진 옷가지 중에서 테오도르의 맨틀릿을 슬쩍 골라내어 숨기고는, 시치미를 뗀 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썼다.

* * *

축제가 있는 주간이 되면 가장 붐비는 것은 역시 시가지의 대형 광장이었다. 이때만큼은 튈브리크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이곳으로 와 좌판을 펼치고 장사를 했다.

거리는 마차와 사람으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고, 대낮부터 분수대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거나 남의 눈 같은 것은 알 바 아니라는 듯 꼭 붙어있는 젊은 연인들이 넘쳐났다.

루이제는 기분이 좋았다. 그냥 좋기만 한 게 아니라 아예 한껏 들떠서 발이 땅을 디디는지 허공을 디디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였다. 한 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옆에서 걷는 카르반테를 올려다보느라 자꾸만 돌부리에 구두 끝이 걸렸지만 여느 때처럼 짜증도 내지 않았다.

반면 카르반테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뻣뻣한 표정으로 자꾸만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루이제를 붙드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루이제, 앞을 잘 보고 걸어야지요. 그러다 넘어지겠습니다.”

“괜찮아, 팔을 붙잡고 있잖아.”

그러면서 루이제는 은근슬쩍 카르반테의 가까이에 더 다가섰다. 둘의 키 차이는 거의 어른 머리 두 개만큼이나 나서, 얼핏 보기에는 마치 응석받이 여동생과 쩔쩔매는 오빠처럼 보였다.

“카른, 구경해 보고 싶은 곳 있어?”

형형색색으로 혼잡한 광장을 둘러보며 루이제가 말했지만, 사실 카르반테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인파와 소음에 정신이 쑥 빠질 지경이었다. 위트레트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집집마다 키우는 돼지나 소, 동네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도둑고양이까지 다 모아놓아도 지금 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절반만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저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루이제가 가보고 싶은 곳으로 가요.”

“그럼 저기로 가보자. 뭔가 재미있는 걸 하는 것 같아.”

루이제가 카르반테의 손을 끌고 도착한 곳은 떠돌이 광대들이 익살스러운 묘기를 부리는 놀이판이었다. 우두머리 광대가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채 알록달록한 공 여러 개를 번갈아 던졌다 받았다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어설픈 분장을 한 꼬마들이 바이올린을 켜고 악기를 두드리며 연주를 하고 있었고, 발치에는 바람잡이 한 명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구경 값으로 던져 준 동전을 줍고 있었다.

“저것 봐! 엄청 높이 던졌어!”

광대의 손에서 빠져나간 공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높이 날아가자 루이제가 카르반테의 어깨를 두드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카르반테는 어린애처럼 신난 루이제를 바라보다 슬그머니 미소를 띠었다. 그토록 제멋대로에 다루기 힘들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지금의 루이제는 그저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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