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조금 갑작스러운… 이야기로군요. 그러니까 폐하께 신관들의 권한을 늘려달라고 요구하신다는 말씀인데…….”
“그렇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차차 더 늘려갈 생각입니다. 저는 결코 속세의 권력이 신을 모시는 신관들을 함부로 통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제국은 에레벤나 신의 은혜와 함께 건국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귀족이란 자들은 욕심에만 눈이 멀어 파렴치하게도 신관들까지 매수하고, 신관들도 역시 성심으로 신을 모시는 것보다는 다른 일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차차 수도사나 신관을 뽑는 방식도 바꿔나가야 합니다. 지금은 요청만 있다면 아무나 수도사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는 진정으로 신실한 자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폐하께서… 그러한 요구 사항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실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기대가 되지 않습니다만…….”
제르마노는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에리히라면 그 요구 사항을 들어주기는커녕, 아예 듀터스를 최고 신관의 자리에서 쫓아내고자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듀터스는 뜻밖에도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제르마노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제게도 패는 있습니다.”
“패…라니요?”
“황후 마마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95장 변화의 조짐들 (6)
제르마노는 얼빠진 사람처럼 눈만 껌벅거리며 듀터스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이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의 눈빛은 이런 질문을 하는 듯했다.
“수도원장님도 아시다시피, 황후 마마께서는 에레벤나 신이 제국을 수호하며 돌보고 계심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분이 아니십니까? 황후 마마를 통해 에레벤나께서 기적을 보이신 일이 벌써 두 번째입니다.”
한 번은 황후를 선택하는 최종 예식, 그리고 나머지 한 번은 튈브리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제르마노도 듀터스도 튈브리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그 일을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그날 인근에 있던 사람들은 튈브리크에서 눈이 멀게 할 듯한 오색찬란한 빛이 솟구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 하지만 황후 마마를 어떻게……? 황후 마마께서 신관들을 대변해 주려 나서실까요?”
“황후 마마께서 굳이 직접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분이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에레벤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으니까요. 허울만 남은 종교도 아니고, 신이 늘 우리를 굽어살피고 계신다는 것을 폐하께서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셨을 텐데 어찌 신관들을 박대하시겠습니까?”
논리적으로 따지면 듀터스의 말은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그의 말대로만 된다면 제르마노에게도 나쁠 것은 없었다. 그가 아직 대수도원의 수도원장으로 있는 시기에 신관들의 지위가 올라가고 권한이 확대된다면 에레벤나 신앙을 더욱 널리 전파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 그렇다면, 제게 의논하실 것이라 함은……?”
“노을 주간이 끝난 후, 정식으로 폐하께 면담을 요청하여 이러한 사항을 말씀드릴 생각입니다. 그 자리에 수도원장님께서도 함께 참석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수도원은 수도의 시민들뿐만 아니라 중앙 귀족들도 기도를 드리러 오는 중요한 곳이 아닙니까? 사실 황궁에 소속된 신관들보다 수도원장님께서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주셔야지요. 제국의 시민들 곁에서 항상 에레벤나 신의 뜻을 몸소 행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제르마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탐욕스럽거나 악랄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소심하고 속이 좁았다. 잘 풀린다면 이득이겠지만 조금이라도 일이 꼬일 경우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에 선뜻 발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들 리 없었다.
“아니, 하지만… 저는 수도원장일 뿐이고, 오히려 신관님들께서 적극적으로…….”
“황실 소속의 신관들은 모두 저와 뜻을 같이할 것입니다. 그러니 수도원장님께서도 일단 대수도원 내부와,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지방의 수도원장님들께도 협력을 요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지요.”
이것은 이미 의논이 아니었다. 듀터스는 단지 자신이 결정한 일을 제르마노에게 통보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제르마노는 그의 결정에 반대할 권한도, 합당한 이유도 없었다.
“그… 그럼, 알겠습니다. 저도 최대한…….”
“시간이 촉박하니 지방보다는 대수도원 내부에서 협력할 이들을 모으시는 데에 집중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 그렇게 하지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에레벤나 님의 눈길이 수도원장님의 발끝에 늘 닿아 있기를.”
듀터스는 양손을 모으고 인사를 남긴 뒤 집무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제르마노는 얼떨떨한 얼굴로 허둥거리듯 허리를 숙였다가 이마를 싸쥐며 도로 주저앉았다.
* * *
“아르사크 님! 제발 조심하세요!”
“걱정하지 말라니까. 이 정도 높이에서는 떨어져도 상처 하나 안 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안 되겠습니다, 내려오세요. 차라리 제가 할게요!”
“이거나 받아, 얼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성한 가지 사이로 풋사과 세 개가 후두둑 떨어진다. 로즈안나는 밑이 우묵하게 깊은 바구니를 든 채 허둥지둥 움직이다가 꺅 소리를 지르며 사과를 받아냈다. 가벼운 나뭇잎이 뒤늦게 팔랑팔랑 날아 로즈안나의 정수리 위에 톡 내려앉았다.
“아르사크 님!”
로즈안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사과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어디로 올라간 것인지, 나뭇가지와 잎사귀에 가려 아르사크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애초에 풋사과 이야기는 왜 해갖고!’
오전의 일이었다. 여름이 깊어지면서, 싱싱한 과일을 조리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간식들이 늘어나자 아르사크는 신기해하며 로즈안나에게 여름 과일을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복숭아나 포도, 수박 같은 흔한 과일을 이야기해 주던 로즈안나는 문득 옛날에 몇 번 먹어본 적 있는 풋사과를 기억해 냈다.
가을이 되면 사과로 된 요리를 많이 내놓아야 하므로 덜 익은 사과는 잘 따지 않지만, 이따금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새콤하고 아삭아삭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아르사크는 풋사과를 먹어본 적이 없다며 궁금해하더니, 기어이 후원의 사과나무를 타고 올라가 직접 풋사과를 따고 있는 중이었다.
“아르사크 님!”
“조심해서 잘 받아, 로즈! 떨어트리지 말고!”
잎사귀 사이로 반짝인 햇빛이 시야를 흐릿하게 가린다. 로즈안나는 그늘 가를 서성거리며 가지 위에 올라앉은 아르사크의 모습을 찾았다.
마치 나뭇가지가 의자라도 되는 양 턱 하니 걸터앉은 아르사크는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하나씩 바구니 안으로 던져 넣었다.
“이제 그만 내려오세요, 아르사크 님. 제발요.”
“걱정은.”
아르사크는 너스레를 떨듯 말끝을 수상쩍게 늘이고는 나뭇가지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옆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가지 끝이 고개를 주억거리듯 흔들리자 로즈안나는 바구니도 내려놓은 채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숨을 삼켰다.
“이 나무 정말 크다. 나이가 많겠는걸? 그런데도 잎사귀에서 좋은 냄새가 나. 좋은 나무구나.”
누구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한가롭게 나무 품평이나 하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로즈안나는 마치 닭 쫓던 개처럼 나무 둥치 부근만 빙글빙글 돌았다.
아르사크는 로즈안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나뭇가지 틈새로 보이는 풍경을 향해 눈을 돌렸다.
나무를 타본 것은 어릴 적 이후 처음이었다. 싱그러운 잎사귀 사이에 조랑조랑 매달린 연두색 사과들은 여름의 요정들이 몰래 매달아 놓은 집처럼 앙증맞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좀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랬다가는 밑에서 뱅뱅 돌고 있는 로즈안나가 어지럼증으로 그만 쓰러지고 말 것 같았다.
아르사크는 아쉬운 마음을 추스르며 좀 더 낮은 나뭇가지를 향해 다리를 뻗었다. 움직이기 편한 드레스를 입고 있긴 했지만 치맛자락이 길어서 영 거추장스럽다.
껍질이 까슬까슬한 나뭇가지를 맨발로 디딘 채 훌쩍 몸을 날린 아르사크는 나무의 굵직한 몸통에 기댄 채 자세를 바로잡았다. 올라올 때는 재미있기만 해서 몰랐는데, 내려다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높이가 꽤 되었다.
‘중간까지만 내려가서 뛰어내리면 될 것 같은데?’
아르사크는 나무의 몸통에 등을 댄 채 자세를 살짝 바꾸어 반대쪽 가지로 팔을 뻗었다. 순간 몸이 휙 기울어지자, 로즈안나는 아르사크가 떨어지는 줄로만 알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때였다.
“로즈안나?”
“테오도르 님!”
반쯤 울상이 된 로즈안나의 표정을 본 테오도르는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이유를 대충 짐작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바구니에서 풋사과 두어 개가 굴러 나와 땅 위를 뒹굴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올려다본 테오도르 역시 로즈안나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마마, 대체……? 그 위에는 어떻게 올라가신 겁니까?”
“내 발로 올라갔지. 테오도르, 네가 와 있는 걸 보니 불길한 예감이 드는걸?”
“…폐하께서는 같이 계시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오후부터 휴가라… 임무 수행에 대한 전달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잔소리는 그만두고 로즈나 좀 달래줘.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아르사크는 눈대중으로 아래쪽에 뻗은 나뭇가지까지의 거리를 가늠한 뒤 마치 다람쥐처럼 폴짝 뛰었다. 몸이 붕 뜬 순간 잽싸게 팔을 뻗어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거머쥐고는 그대로 반동을 이용해 다른 가지에 올라타는 것은 거의 묘기 수준이었다.
테오도르조차도 그 날렵한 움직임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뒤늦게서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나무 아래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