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23화 (123/191)

123화

94장 변화의 조짐들 (5)

대수도원의 수도원장을 맡고 있는 제르마노는 노을 주간이 시작됨과 동시에 수도원 입구에 예년과 같은 팻말을 내걸었다.

‘연애 관련 상담 및 기도 요청을 받지 않음’

“수도원장님.”

나이 어린 견습 수도사의 목소리에 수도원장은 나무망치를 든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수도사는 헐렁한 소매를 단정하게 다듬으려 애쓰며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최고 신관께서 오셨습니다.”

“시간은 아직 멀었을 텐데. 여전히 급하게 움직이는 양반이군……. 이 못을 마저 박거라.”

“예, 알겠습니다.”

수도원장은 팻말을 고정하던 망치와 못을 수도사에게 건넨 뒤 주름진 손을 털며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다.

지방의 수도원들과 달리, 대수도원은 황실 소속의 최고 신관이 관리하는 곳이라 건물의 규모부터가 남달랐다.

지방의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거나, 아니면 영주나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생활했지만 대수도원은 매년 책정되는 관리비의 금액이 꽤 큰 편이었으므로 수도사들이 굳이 힘들여 노동을 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그 대신 대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지방의 수도사들과 달리 한 해에 한 번씩 승급 시험을 치러야 했고, 시험에서 두 번 낙제하면 수도사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했다. 마지막까지 승급 시험에 통과하면 지방의 수도원장으로 발령을 받거나, 황실의 신관이 될 수 있었다.

수도원장인 제르마노의 개인 집무실은 고요한 회랑의 동쪽 끝에 있었다. 최고 신관인 듀터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제르마노보다 듀터스의 나이가 훨씬 어렸지만, 일반 수도원장과 황실의 최고 신관이라는 위치는 그 차이가 매우 컸으므로 제르마노는 예를 갖추어 듀터스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듀터스는 묵묵히 고개만 까딱인 후 마치 자신의 집무실인 양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오만하고 빈틈없는 그 태도에 나이 지긋한 제르마노의 심사가 뒤틀린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제르마노는 내색하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어디에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수도원장님.”

“아… 뭐, 잠시 소일을 하느라… 왜, 노을 주간이잖습니까. 그때마다 사람들이 수도원으로 몰려와 어찌나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는지. 연인을 만나게 해달라는 둥, 사랑이 이뤄지게 해달라는 둥… 에레벤나께서 돌보시는 일이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들어먹어야 말이지요. 그래서 그쪽 관련으로는 상담을 받지 않는다는 팻말을 걸어놓고 오는 길입니다.”

제르마노는 짐짓 투덜거리면서 수도사가 가져온 차를 듀터스에게 권했다. 어린 찻잎을 잘 말렸다가 한 번 더 볶아내어 끓인 차는 향기가 고소하고 쌉싸름한 맛이 좋았다.

듀터스가 말했다.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에레벤나께 기도하고 더욱 신실하게 섬기는 마음을 가지도록 이끄는 것도 수도원에서 하실 일이지요.”

“그거야 저도 압니다. 압니다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헤어진 연인이 평생 불행하게 해달라는 기도 같은 걸 올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듀터스는 드물게도 숨소리를 내듯이 짧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군요. 에레벤나 신을 모시며 수도원을 이끌어 나가시느라 언제나 고생이 많으신 줄 알고 있습니다.”

“고생이랄 것까지는… 뭐. 듀터스 님이 계신데 제 고생이야 비할 바도 아니죠. 흐흠.”

제르마노는 딴전을 피우듯 공연히 목을 큼큼 울렸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만한 나이가 되었건만, 이상하게도 듀터스만 마주하면 그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목덜미가 쭈뼛해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아, 그렇군요. 실은 의논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신관들과 관련된 일이면 최종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듀터스가 수도원장에게 의논할 만한 일이라니? 제르마노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듀터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와 특별히 달라 보이는 점은 없었다. 신관들이 평상시에 입는 로브와 가죽신 차림, 표정도 썩 어둡지 않다. 그러나 제르마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치고 앉았다. 시시껄렁한 질문이나 하자고 자리를 비운 채 여기까지 찾아올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수도원장님께서는 황실과 신관들의 세력 균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르마노는 그만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했다. 순식간에 땀이 배어 나온 손에서 허둥지둥 잔을 내려놓은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커다란 얼굴을 연신 손등으로 쓸며 갑작스레 초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그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는…….”

“그렇게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설마하니 제가 수도원장님께 음험한 속셈을 품고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아니, 당치 않습니다. 절대로.”

“그러면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도원장님께서는 지금의 세력 균형이 과연 공평하다 생각하시는지요?”

이런 질문을 받느니 차라리 완벽한 애인이 생기게 해달라는 바보 같은 기도나 들어주는 편이 더 나을 뻔했다. 제르마노는 속으로 끙, 하는 신음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듀터스의 속내를 가늠해 보려 애썼다.

듀터스는 역대 최고 신관 중에서도 나이가 젊은 축에 속하는 인물이었지만 매우 보수적이고 완고한 인물이었다. 속세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그 태도 때문에 귀족들의 은근한 후원 요청도 전부 다 마다하여 지난날, 신탁을 위조한 죄목으로 쫓겨난 선대 신관의 눈 밖에 났던 인물이다.

그가 몰락한 이후 신관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최고 신관의 자리에 올랐으나, 듀터스는 여전히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제르마노는 듀터스가 황후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을 때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개중에는 듀터스가 최고 신관의 지위에 오르더니 단숨에 황후의 뒷배를 노린다고 수군거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제르마노의 생각은 달랐다.

듀터스는 황후가 에레벤나의 신탁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지지한 것일 뿐, 그녀의 출신이나 권력, 개인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듀터스는 그랬다. 만약 아르사크가 에레벤나의 신탁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얼마나 억울한 사정에 놓였든, 얼마나 절실했든 결코 아르사크를 위해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제르마노는 이마에 배어 난 비지땀을 손등으로 훑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제게 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글쎄요… 현재의 황제께서는 역대 그 어떤 황제들보다도 신관을 배척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한 분이시지요. 부친이신 선황께서 통치하실 시기에도 이렇지는 않으셨는데……. 물론 지금까지는 수도원을 축소하거나 관리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을 크게 감축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지만 또 모르는 일이지요. 규모가 작은 수도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신 적도 있고 하니…….”

“예, 그렇습니다. 이대로라면 폐하는 지방의 수도원을 시작으로 대수도원인 이곳, 나아가 황실에 속한 신전과 신관들도 모두 없애거나 지위를 박탈하려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폐하께서는 즉위하실 때 에레벤나 신의 이름으로 제국을 보살필 것을 맹세하셨지만, 사실 그 개인으로서는 신을 믿지 않으시는 분이니까요.”

신관들에게 보이는 에리히의 냉정하고 신랄한 태도는 이미 비밀이랄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관들은 그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고, 추궁을 하거나 압박을 넣을 수도 없었다.

현재로서는 황제와 귀족들이 더 많은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고, 신관을 임명하거나 해임하는 일에도 황제가 일정 부분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선대 신관이 죄를 저지르고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다른 신관들의 지지를 아무리 많이 받았더라도 듀터스가 최고 신관의 자리에 최종 임명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최고 신관을 뽑는 일에 있어 황제의 권한이란 아직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지만, 만약 이대로 신관들의 권한이 점차 축소된다면 나중에는 임명권조차도 황제에게 모두 넘어가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서로의 권한과 의무에 관여하지 않고, 관여할 수도 없다는 규칙 같은 것은 에리히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듀터스는 항상 그 사실을 불안하게 여겼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황제라고 하더라도 그 역시 인간일 뿐, 신과 대등한 입장이 될 수는 없다고 믿었다.

찻잔을 반쯤 비운 듀터스는 기도하듯이 모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제르마노를 빤히 쳐다보았다.

“수도원장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왠지 불길한 울림처럼 들렸다. 제르마노는 저도 모르게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그머니 끄덕였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폐하와 수도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계와, 저와 수도원장님을 중심으로 한 종교계의 세력 균형을 다시 맞출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먼저, 신관과 수도사들의 임명과 해임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신관들이 가질 것, 또한 황족과 귀족들 중 신앙심이 투철하지 못한 자는 최고 신관의 권한으로 시정과 탄핵을 요구할 수 있을 것, 각 수도원에 지급하는 비용을 늘리고, 수도원을 건축할 수 있는 최소 인원의 기준을 낮출 것. 당장은 이 정도를 요구할까 합니다.”

제르마노는 너무 놀라서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듀터스가 말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황당무계한 내용들로만 들리지, 현실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에리히다. 제르마노는 평생을 수도사로서 종사하며 정치와 권력 암투에는 전혀 일가견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에리히가 황실이 관여한 개간 사업이나 민간 지원 등을 위해 귀족들을 얼마나 매섭게 몰아댔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대뜸 요구하겠다니. 듀터스가 조금만 횡설수설했더라면 제르마노는 그가 낮술이라도 실컷 퍼먹었다 생각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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