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얼마 전 마차에서 터무니없는 소리로 그를 당황하게 만든 날 이후로, 루이제는 카르반테를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그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수다를 떨고 싶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좋으니 계속 가까이에 앉아서 그를 쳐다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카르반테는 필사적으로 루이제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이 굴었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성이 난 사람처럼 귓가를 벌겋게 물들인 채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다.
그러나 루이제가 무언가를 명령하면 순순한 태도로 따랐고, 억지를 부려도 낯색 한번 변하는 일 없는 것도 그대로였다.
처음에 루이제는 그가 화를 내고 있다고 오해할 뻔했지만, 침대를 정리해 준 후 잘 자라며 인사를 해주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 다정했다.
“있잖아.”
“네, 루이제 아가씨.”
“흠, 그러니까… 당신은 내 하인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 아가씨라는 호칭은 빼고 불러도 돼.”
뜬금없는 말에 카르반테는 다소 당황했다. 루이제의 말마따나 자신이 하인으로 고용된 것은 아니지만, 귀족의 서자라는 신분도 사라진 지금, 말하자면 자신은 루이제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다.
평민이나 그 이하의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귀족을 결코 이름으로만 부를 수 없었으며, 항상 위치에 맞는 호칭을 붙여야 했다.
“저는 이제 카르반테 우드하우스가 아닙니다. 그러니…….”
“내가 하라면 하는 거야. 알겠어?”
그렇게 나오면 달리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카르반테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루이제의 관자놀이를 지그시 압박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으응, 아니. 음… 조금 더 해야 나을 것 같아. 밤새도록 시달렸거든.”
“괜찮으시면 제게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악몽은 다른 사람에게 많이 이야기할수록 빨리 잊힌다고 합니다.”
“어, 음… 그게…….”
루이제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머리가 아프다는 말부터 새빨간 거짓말이었으니, 악몽을 꿨다는 것도 역시 거짓말이었다.
들통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루이제의 모습을, 카르반테는 겁을 먹어 그런 것이라 착각하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서우시다면 억지로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냐! 무… 무서운 게 아니라, 어, 음… 그러니까… 음, 저기… 아, 아버지 꿈을 꿔서… 그…….”
천천히 움직이던 카르반테의 손이 문득 멈췄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둘러댄 것이었는데, 루이제는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자 깜짝 놀랐다. 얇은 파자마 위로 동그란 물 자국이 뚝뚝 번진다.
카르반테는 움찔 놀란 듯 손을 움츠렸다가 얼른 손수건을 가져와 루이제의 눈가와 뺨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가 그렇게 해주자 왠지 더욱더 눈물이 났다.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멍하니 뚝뚝 울고만 있던 루이제는 카르반테의 손끝이 눈가를 스치자 그제야 입매를 찡그리면서 어린애처럼 눈을 가리고 훌쩍거렸다.
“아, 아버지… 돌아가시겠지? 탑에서… 못 나오실 거야. 그렇지?”
카르반테는 차마 위로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루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말을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잘못을 고발한 것은 아르사크를 위해서였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아버지가 황후를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을 루이제는 이미 마음 한구석에서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증언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 아버지는 시체가 되어야만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탑에 영원히 갇히게 되었다. 죄책감이 들지 않을 리 없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지냈지만 조용한 밤이 되면 루이제는 아버지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곤 했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복잡한 심정에 조금쯤 눈물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버지가 나쁜… 나쁜 짓을 하셨다는 건 나도 알아.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아버지는 또… 그러면, 그때는 정말 오라버니와 언니들, 형부들까지도 전부… 화를 입었을지도 몰라…….”
루이제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카르반테는 어쩔 줄 모른 채 허둥거리다 젖은 손수건을 침대 위에 팽개쳤다. 그러고는 갑자기 팔을 뻗어 루이제를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루이제는 물론이거니와 카르반테 자기 자신도 놀랐다. 놀란 나머지 훌쩍거리면서 딸꾹질을 하던 루이제는 갑자기 목 놓아 울음을 터뜨리며 카르반테의 품에 덥석 안겼다.
“나 때문에, 으, 흑… 나 때문이야. 아버지가 그런 데서…….”
“아니에요! 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아가씨가… 하신 일 때문에 아버님이 그렇게 되신 게 아니에요. 그건… 그건 자작님 스스로의 탓이었습니다. 당신이 자책할 필요가 없는 일이에요.”
“그렇지만 내가 그런 말을 안 했더라면…….”
“그랬더라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겁니다. 당신의 아버님이 하신 일을… 폐하께서 쉽게 넘어가시진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우십시오. 그만 우세요.”
카르반테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루이제는 서럽게 끅끅거리면서도 그의 품에서 나는 부드러운 향기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빼앗길 뻔했다.
한참이 지난 후 루이제가 고개를 들었을 때, 카르반테가 입고 있던 셔츠는 눈물과 구겨진 자국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머쓱해진 루이제는 화가 난 것처럼 입술을 꼭 움츠린 채 카르반테를 외면했다. 그러나 카르반테는 루이제가 울음을 그쳐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셔츠가 어떻게 됐는지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녀를 불러 식은 아침 식사를 다시 가져오게 하고, 컵 안에 미지근한 물을 채워 루이제에게 건네주었다.
“물을 좀 드세요.”
“…정말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루이제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묻자 카르반테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라고 부르지 마! 내 이름은 루이제야! 루이제라고 불러, 어서!”
루이제가 팩하니 신경질을 냈다. 카르반테는 잠시 놀란 사람처럼 어깨를 흠칫했다가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루이제.”
“어렸을 때는 어머니나 언니들이 가끔 나를 루라고 부르기도 했어. 당신도 그 이름을 불러도 괜찮아.”
카르반테는 또다시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애칭을 부르는 것은 아주 가까운 가족이나 친족, 혹은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나 할 법한 일이었으니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루이제는 참고 기다릴 인내심이 이미 바닥난 후였다.
“싫다고 하면 또 울어버릴 거야.”
“…아닙니다, 부를게요. 부를 테니까… 제발 울지 마세요.”
“당신은 어렸을 때 뭐라고 불렸어?”
카르반테가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는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생각 없는 질문이 또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루이제는 뒤늦게서야 손끝으로 입가를 가렸지만 그 반응이 카르반테를 더 민망하게 만들었다.
루이제는 금세 풀이 팍 죽은 기색으로 애꿎은 침대 시트만 구기고 있다가 말했다.
“미안해. 저기…….”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저를 카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루이제도 저를 카른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때마침 하녀가 새로 데운 아침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루이제는 양 볼이 빨개진 채로 발딱 일어나 테이블 앞에 가 앉았다. 우유를 넣어 따뜻하게 만든 차를 잔에 채우던 하녀가 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열이라도 있으신 것 아니세요? 세상에, 온 얼굴이 빨개요.”
“열 없어. 괜찮아.”
“그치만 이마에서부터… 세상에, 목까지 빨갛잖아요! 아가씨, 정말 괜찮으세요? 누우셔야…….”
“괜찮다고 하잖아!”
루이제가 성질을 내자 하녀는 얼른 식사를 차리고 방 밖으로 물러났다. 포크를 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접시만 노려보고 있는 루이제는 마치 선물을 빼앗긴 아이처럼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모습이다.
카르반테는 테이블 옆으로 다가가 루이제의 안색을 가만히 살폈다.
“왜 그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화…난 것 아니야.”
“당신께서는… 루이제는 이 집과 사용인들의 주인이자, 제국에서 남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입니다. 그렇게 사소한 일로 하녀들을 나무라시면 다들 겁을 먹을 겁니다.”
“화난 것 아니라니까 그래!”
“하지만 소리를 지르셨잖아요. 그러니 상대방은 루이제가 화를 낸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루이제는 답답했다. 생각 없이 어렸을 적 일 같은 것을 물어 카르반테에게 미움을 받았을까 봐 초조했을 뿐인데, 그것을 자꾸 화난 것이라고 하니 억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소리를 지르면 이번에야말로 카르반테가 자신을 두고 나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루이제는 다시 울기 직전인 표정을 한 채 카르반테를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숨을 쌕쌕거리면서 자신을 쏘아보는 루이제를, 카르반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마주 보다가 얼른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손끝을 잡았다. 루이제는 화들짝 놀랐지만 잡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제가 실수라도 했나요? 아니면 또 머리가 아프신 겁니까? 왜 그러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걱정됩니다.”
“…카른은 나를 걱정해? 왜?”
“당연히 걱정하지요. 왜냐하면…….”
카르반테는 말끝을 흐리면서 고개를 약간 숙였다. 왜 걱정하느냐니, 이유는 뻔했다. 이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에 응석꾸러기인 철부지 아가씨와 더는 엮일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온갖 시중을 들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왜냐니까!”
루이제는 잠깐의 침묵도 견디기 어려워 초조하게 재촉했다. 카르반테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굳게 다물고 루이제를 올려다보았다. 카르반테가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