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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21화 (121/191)

121화

로즈안나의 말에 아르사크는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때문에 로즈안나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아, 물론… 무조건 연인들만을 위한 건 아니니까요. 음, 장식도 많고… 간식거리도 있어요. 그리고 수공예품 같은 것도요.”

“나한테 그럴 게 아니라, 로즈 너야말로 같이 갈 사람은 없니?”

그냥 해본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로즈안나는 대놓고 움찔하는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다.

아르사크의 눈매가 순식간에 가늘게 날카로워졌다. 로즈안나는 당장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지만 아르사크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방금 그 표정은 뭐지?”

“표정이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시치미 뗄 생각 마. 방금 뭔가 찔리는 게 있는 표정이었잖아. 바른대로 말하렴. 누군가 만나는 사람이 있었던 거야? 어디의 어떤 자… 아니, 어떤 사람이야?”

얼버무리듯 흐린 말이 원래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로즈안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꽃병의 물을 깨끗한 새것으로 갈면서 로즈안나는 평소대로의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가 말했다.

“하루도 궁을 떠나지 않고 이 안에서만 사는 제가 누구를 만나고 사귈 수 있을 리 없지요.”

“여기에만 있다고 해서 애인을 못 만나는 건 아니지. 들락거리는 귀족들만 해도 도대체 몇 명이야?”

“정말 아니에요, 아르사크 님. 전 만나는 분이 없습니다.”

“로즈, 네가 만나는 사람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누구를 만나느냐는 거지. 시시한 놈은 용납 못 해.”

“참고삼아 여쭤보고 싶습니다. ‘시시하다’의 기준이 무엇인가요?”

“적어도 날 이길 정도는 돼야지.”

그 순간, 로즈안나는 그때까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결혼을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르사크는 오래간만에 바늘을 쥐고 수를 놓고 있었다. 귀부인들이 으레 사용하는 수틀과 천이 아니라 가죽에 수를 놓는 모습은 로즈안나도 듣기만 했을 뿐,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가죽용 자수를 놓는 바늘은 천에 자수를 놓을 때 쓰는 바늘보다 훨씬 길고 두꺼워서, 자칫 손을 찔리기라도 했다가는 큰 상처가 날 것 같아 따라 해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아르사크 님, 뭘 만드시는 건가요?”

“음… 글쎄, 작은 주머니나 좀 만들어볼까 하고. 검집이나 화살집을 만들어볼까 했는데, 가죽에 수를 놓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큰 건 부담스러워서.”

“아르사크 님이 사시던 곳에서는 늘 이런 것들을 만들었나요?”

“가죽 자수는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융단이나 천에 자수를 놓는 것처럼 자주 하진 않아. 하지만 일단 만들어놓으면 천으로 된 것보다 오래 사용할 수 있으니, 많이 쓰는 것들은 가죽으로 만들어서 수를 놓지. 왜, 너도 해볼래?”

“전 못할 것 같아요. 바늘을 어떻게 쥐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걸요.”

“요령만 깨치면 쉬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르사크 역시 로즈안나에게 굳이 가죽 자수를 가르칠 마음은 없는 듯 조그만 소리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늘을 움직이는 데에만 집중했다.

색색의 실들이 반듯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아르사크가 놓는 자수는 색이 짙은 실을 여러 가지 사용해서 알록달록한 것들이 많았는데,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그런 여러 가지 색깔들이 모여 액운을 물리쳐준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면 옷이며 모자, 신발은 물론 놀잇감에까지 온갖 무늬의 자수를 놓아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아르사크도 어릴 때 받은 모자며 요람 같은 것들을 다 컸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살던 곳을 떠나오면서 전부 다 두고 올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도 그 무늬들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런데, 아르사크 님. 정말 폐하와 축제를 구경하러 가보지는 않으시겠어요?”

로즈안나가 눈치를 보듯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르사크는 단단한 가죽을 붙잡은 채 바늘을 힘주어 당기고는 입술 끝을 애매하게 실룩였다.

“글쎄, 가자고 애원하면 한 번쯤 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하지만 굳이 축제가 열리는 곳이 아니어도 노을은 볼 수 있잖니?”

* * *

노을 주간이 시작되자 그전부터 이미 노점을 펼 자리를 골라 눈치를 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매일같이 싸움이 벌어졌다. 시비가 붙어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에 잠을 깬 루이제는 한숨을 폭 내쉬며 하녀가 열어놓은 창문을 도로 닫았다.

이전에 살던 저택은 민간의 시가지와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므로, 루이제는 이런 소란을 겪어보는 일이 처음이었다.

지금 루이제가 있는 곳은 중앙 귀족들의 저택이 모여 있는 구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광장과 가깝긴 하지만 평민들도 많이 오가는 곳이라 아침저녁으로 조용한 날이 드물었다.

게다가 인근 시장에 생선 같은 것들이 대량으로 들어오는 날이면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희미한 비린내가 저택 안까지 흘러오곤 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곳에서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난동을 부리고도 남았을 테지만, 루이제는 의외로 얌전했다.

황제가 아직도 자신의 행동거지를 예의 주시하고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제 ‘홀드빅 자작가의 막내딸’이 아니라 ‘홀드빅 남작’이 되었다는 점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남들이 허울뿐인 작위라고 수군거리거나 말거나, 루이제는 의외로 그 사실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어디를 가든 자신을 부르는 호칭은 ‘남작님’이었고, 그러니 예전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루이제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는 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아가씨, 일어나셨나요? 세안과 아침 식사 준비를 할까요?”

“그래, 가지고 와. …카르반테에게 가지고 오라고 해!”

망설이듯이 잠깐 침묵하던 하녀가 총총히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루이제는 연신 싱글싱글 웃음이 나오는 입가를 손끝으로 살짝 누르면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막 자다 일어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최대한 깔끔해 보이도록 다듬었다가, 갑자기 다시 몇 가닥은 빼내서 옆으로 흘러내리게 했다.

부스스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루이제가 보기에는 왠지 그편이 좀 더 나른하고 성숙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눈가와 입술 옆이 지저분하지는 않은지도 꼼꼼히 살펴본 루이제는 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는 파자마를 불만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목 쪽에 레이스 칼라가 달리고 펑퍼짐한 소매가 사랑스러운 것이었지만, 왠지 어린애 같아 보이는 것이 오늘따라 맘에 들지 않았다.

“좀 더 어른스러운 걸 입어야겠어. 이제 곧 생일이 돌아오면 스무 살이 되는걸.”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종알거리며 파자마를 이리저리 만져보던 루이제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들어와.”

머리카락과 입가를 허둥지둥 매만진 루이제가 새치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온수가 든 물통과 대야, 아침 식사를 칸칸이 얹은 수레를 밀며 들어온 카르반테는 파자마 차림인 루이제를 보며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귓가를 붉히며 짐짓 고개를 숙였다.

“잠은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루이제 아가씨.”

“뭐… 그냥. 아니, 아니지. 음, 악몽을 좀 꿨어. 그래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네.”

“예? 큰일이군요. 약을 가지고 오라고 할까요? 아니면 치료사를…….”

“아니야! 약… 먹을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아. 음, 내가 들은 이야긴데, 머리가 아플 때는 여기를 지압해 주면 좀 나아진다고 했어.”

루이제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카르반테는 눈만 깜빡거리고 서 있다가 은 대야에 온수를 채우며 말했다.

“그러면 세안을 하신 다음… 아가씨께서 괜찮으시다면 지압을 좀 해드릴까요?”

루이제는 잠시 고민하는 척 말없이 마음속으로 셋을 세고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해.”

93장 변화의 조짐들 (4)

루이제 같은 까다로운 귀족 아가씨의 시중을 드는 일이 익숙할 리 없건만, 카르반테는 모든 것을 능숙하게 해냈다.

대야에 채운 물에 손끝을 넣어 적당히 온도를 맞추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천에 진주 가루를 넣어 물에 적신 다음 안에 든 것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입구를 꽉 묶었다.

루이제는 카르반테가 주머니를 건네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흠이라고는 없는 흰 손가락으로 사뿐히 그것을 받아 들어 얼굴에 살살 문질러 세수를 했다.

물로 얼굴을 헹구는 일이 끝나자 카르반테는 미리 들고 있던 화장수의 병을 열어 루이제에게 주었다.

아침에 하는 세수는 그다지 요란할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모임에 초대를 받거나 저녁 만찬에 참석할 일이 있으면 그때 다시 화장을 지우고 꼼꼼하게 세안을 하기 때문이다.

장미꽃 향기가 나는 가벼운 화장수를 얼굴에 바르고 톡톡 두드리는 것까지 끝마치고 나서, 루이제는 카르반테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카르반테가 묻자, 루이제는 갑자기 미간을 팍 찡그리고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지압해 준다고 했잖아. 벌써 잊었어?”

“…아, 그렇지. 아뇨, 잊지 않았습니다. 아직 머리가 아프신지 어떤지 몰라서…….”

“그렇게 금방 나아질 리가 있겠어? 얼른 해줘.”

실은 머리가 아프다는 말 따위 거짓이었지만, 루이제는 당당하게 눈을 감으며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마치 엉덩이만 뒤로 빼고 앉은 오리 같은 모습에 당황한 카르반테는 잠시 망설이듯이 주춤거리고 있다가 검지와 중지를 모아 루이제의 관자놀이 위에 가볍게 얹었다.

“너무 아프시면 말씀하십시오.”

루이제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카르반테의 손끝이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부분을 조심스럽게 눌러오자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며 날뛰었다. 손쓸 수도 없이 붉어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카르반테가 관자놀이를 살짝 붙잡고 있는 상태라 마음대로 고개를 숙일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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