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고생 많으셨어요.”
테오도르의 오른쪽에 서서 걷던 로즈안나가 말했다. 그간 아무도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는데, 로즈안나만이 자신을 진심으로 가엾게 생각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오도르는 헛기침을 하며 푸석해진 얼굴을 새삼스럽게 손바닥으로 쓸었다.
“아니다. 폐하를 돕고 지키는 것이 내 임무인걸.”
“쉬운 일은 아니죠. 누구나 그 사실을 알 거예요. 하지만… 요즘은 저도 테오도르 님을 스쳐 가듯 뵐 때마다 걱정이 됐어요. 많이 피로해 보이셔서요.”
“잠을 좀 못 자서…….”
“잠을 못 주무셔요? 왜요?”
대화를 나누며 걷느라 테오도르와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와 에리히로부터 좀 더 멀찍이 뒤처졌다. 다른 시종들의 걸음이 두 사람을 앞질러 가고, 결국에는 가장 뒤쪽으로 빠지게 되었다.
테오도르는 호젓하고 시원한 숲을 돌아보는 시늉을 하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냥, 더워서 그런지.”
“테오도르 님은 예전에도 더위에 좀 약하셨죠.”
“내가 그랬던가?”
“그러셨어요. 그래서 여름에는 늘 차가운 간식을 자주 드셨죠. 유레나 님이 자꾸만 따라 하고 싶다고 떼를 쓰셔서 선황후 마마께서 찬 간식을 잠깐 금지하신 적도 있었는걸요.”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여름이 되면 황궁에서는 얼음을 갈아 만든 셔벗이나, 차갑게 식혀 굳힌 젤리 같은 간식들을 종종 먹을 수 있었다.
테오도르는 어릴 때 유달리 더위를 많이 탔고, 에리히는 더위를 타는 테오도르를 핑계 삼아 하루에 한 번으로 제한된 차가운 간식을 두 번, 세 번씩 가져다 먹곤 했던 것이다.
선황후도 처음에는 그런 일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갔지만 어린 유레나가 ‘오라버니가 드시니 나도 먹겠다.’며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 후로는 곤란에 빠졌다.
차가운 것을 너무 많이 먹었다가 소중한 딸이 배탈이라도 난다면 낭패였다. 결국 유레나를 위해 에리히와 테오도르의 찬 간식도 금지된 적이 잠깐 있었다.
“그런 간식을 먹은 것도 오래되었네. 자라고 나서는 굳이 간식을 챙겨 먹을 일도 없었구나.”
“그러실 거예요.”
로즈안나가 조그만 소리로 웃었다. 테오도르는 로즈안나의 미소 띤 얼굴을 자꾸만 힐끔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기… 로즈안나.”
“네, 왜 그러세요?”
동그란 눈동자가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자, 테오도르는 문득 얼굴 전체로 스멀스멀 열이 번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숨을 들이켜며 말문을 열려던 동시에 저만치 앞서 갔던 에리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안 오고 거기서 뭐 하는 거야?”
그러자 로즈안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더니 아르사크가 있는 쪽으로 총총히 뛰어갔다. 테오도르의 어깨가 바람이 빠지듯 축 처졌다.
‘사직서 쓰고 싶다.’
그간 아무리 힘들어도 사직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건만, 오늘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농사나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테오도르였다.
“얼굴 안 펼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에리히는 재킷을 벗기도 전에 테오도르에게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해두었던 것처럼 그 와중에 청산유수였다.
“그렇게 초췌한 몰골로 잘도 황제를 호위하겠다. 지금 당장 날 죽이려는 놈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가도, 네 얼굴이 안쓰러워서 침대에 이불 펴주고 나갈 것 같으니까 얼굴 펴.”
‘그건 다행 아닌가?’
“…죄송합니다, 에리히 님.”
“누가 사과 듣자고 한 소리인 줄 알아? 진심으로 말하는데, 그렇게 푹 삭은 수박 같은 표정에 로즈안나가 넘어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푹 삭은 수박은 무슨… 아니, 아뇨! 에리히 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로즈안나가 무슨……!”
“이젠 삶은 가재 같은 꼴이군. 네 속을 내가 모를 줄 알아?”
상대방이 황제가 아니었다면 소리라도 지르며 길길이 날뛸 수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테오도르에게는 그런 선택지가 없었다. 그 대신 그는 고장 난 목각인형처럼 쉼 없이 입을 달싹거리며 이마에 돋은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저, 저는 로즈안나에게 아무, 아무것도.”
“그래? 그럼 슬슬 로즈안나의 혼처를 알아봐야겠군.”
“예?!”
“뭘 놀라? 유레나의 놀이 동무였고, 지금은 황후의 최측근 시녀다. 당연히 황실에서 혼처를 주선해야지.”
“아, 아니, 갑… 갑작스러워도 정도가 있지요! 로즈안나가 혼인을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제 입으로 혼인을 하겠다고 말할 때까지 내버려 두라는 말이냐? 로즈안나가 그런 부탁을 내게 할 것 같아?”
안 하겠지. 테오도르도 그것을 인정했다. 설령 아르사크가 정말로 2년 후에 황후의 자리에서 내려온다 하더라도, 로즈안나는 결코 자기가 먼저 나서서 혼처를 주선해 달라 부탁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늦든 빠르든 에리히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로즈안나의 아버지나 의붓어머니에게 뭘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쪽에서 로즈안나의 혼처랍시고 웬 개차반을 데려오는 일이 없도록, 황실에서 로즈안나의 혼인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것임을 보여주는 편이 더 안전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도 용케 기절만은 하지 않은 테오도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는 피로 때문에 위기감이 무뎌진 탓도 있었겠지만, 그런 소리를 대놓고 들었는데 계속 발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에리히 님, 간청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봐.”
“에리히 님, 아니… 황제 폐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호위하고 모시는 자로서, 이런 청을 드리는 것은 부적절하고 불경하며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론 얘기하다 날 샐 작정이냐?”
“…사흘만 휴가를 주십시오.”
에리히는 픽 웃으려다 말고 헛기침을 하며 짐짓 인상을 찡그렸다.
“휴가를 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만,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구에게 내 호위를 맡길 생각이지?”
“…기사단장들 중에서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자를 데려오겠습니다.”
“입도 무거운 놈으로 데려와.”
“알겠습니다.”
에리히는 나가보라는 뜻으로 가볍게 손짓을 했다. 단숨에 안색이 환해진 것 같은 테오도르가 조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 심술을 부릴까도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황제의 서재를 나서던 테오도르는 문득 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에리히가 말했다.
“왜, 또?”
“에리히 님도 아르사크 님과 시내의 광장으로 외출을 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으니, 기분 전환도 하실 겸 해서요.”
“그건 또 왜?”
시내의 광장이라면 황후가 선택될 때 군중들이 모였던 그곳을 말하는 것이리라.
에리히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자, 테오도르는 되려 자기가 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닷새 후부터 축제가 열리지 않습니까.”
“축제라고?”
“‘연인의 노을 주간’이 돌아오니까요. 잊고 계셨습니까?”
92장 변화의 조짐들 (3)
‘연인의 노을 주간’이라는 명칭은 종종 ‘노을 주간’으로 불렸다.
사실은 앞에 붙은 ‘연인의’라는 말이 더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굳이 이 시기를 ‘연인의 노을 주간’이라고 제대로 부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연인의’라는 단어가 탈락한 이유에는 서로 다른 몇 가지 설이 있었다. 그중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연애와 별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 ‘애인 없는 것도 서러운데!’라며 박박 우겨댄 것이 관습처럼 굳어졌다는 설이었다.
단순히 자연현상에 불과할 뿐인 일을 가지고 아무 데나 비이성적인 믿음을 갖다 붙인다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퍼뜨렸다는 설도 있었고, 혼자 즐기는 노을은 노을이 아니냐고 과격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연애지상주의 타도를 외치다 이뤄낸 성과라는 설도 있었다. 물론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여름의 한 시기, 그것도 단 며칠 동안만 한 해 중 가장 오랫동안 노을을 즐길 수 있는 때가 있다. 카툴라 제국을 비롯한 인근의 나라에서는 이 시기마다 연인들을 위한 작은 행사들을 여는 것이 소소한 전통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연인의 노을 주간’이었다.
연인과 노을을 관련지어 축제를 여는 전통을 어디서, 누가, 왜 만들게 되었는지 그 기원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연인이 된 한 쌍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이 시기가 오기 전에 이미 연인이 되어 있던 사람들은 이 노을 주간에 특히 사랑이 깊어진다는 속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렇다 보니 노을 주간이 되면 광장은 물론이거니와 골목 곳곳에까지도 연인들을 노린 노점이나 좌판이 줄을 이었다. 떠돌이 점술가나 수상한 사기꾼들까지도 짝사랑을 끝낼 수 있게 해주는 묘약이니, 마음을 붙잡는 카드니 하는 식으로 밤낮없이 영업을 할 지경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속임수라는 걸 빤히 알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매년 이 노을 주간만 되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영원한 짝을 찾을 것이라는 희망에 들떴으므로 장사는 거의 항상 성황이었다.
“그것참… 흥미롭고 실없는 전통이네.”
로즈안나로부터 노을 주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아르사크의 감상은 담백하다 못해 시큰둥했다.
노을 주간의 축제가 개시되는 날이 가까워져 오자 황궁에서 일하는 시녀들도 들뜬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미 나이가 좀 있어 사귀는 사람이 있는 경우는 올해엔 반드시 청혼을 받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불탔고, 사귀는 사람이 없는 경우는 반드시 운명의 짝을 만나고야 말리라는 의욕으로 가득했다.
어딜 가나 그 ‘노을 주간’이라는 이야기가 들리니, 아르사크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사크 님께서는 노을 주간에 대해 전혀 모르셨나요?”
“네 말을 듣고 보니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 것도 같아. 제국을 드나들던 다른 부족의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들은 적 있었어. 우리야 그런 건 관심도 없었으니 잘 모를 수밖에.”
“국법으로 정해진 축제는 아니지만, 오래된 전통이다 보니 규모도 꽤 크고 볼거리도 많답니다. 아르사크 님께서도 폐하와 함께 축제 구경을 가시지 그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