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아르사크는 조카라도 놀리는 것처럼 키득거리며 말했다.
“뭘 그렇게 기겁해? 아니면 아직도 황후 자리에 미련이 남아서 그러는 거야?”
“아니에요! 없어요! 그런 생각 안 해요!”
“왜? 황후가 되면 의외로 좋은 게 많을 텐데. 네가 좋아하는 보석도 이렇게 많고…….”
아르사크는 팔목에 걸린 가느다란 팔찌가 흔들리도록 일부러 능청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얼굴이 삶은 가재처럼 새빨갛게 된 루이제는 골난 꼬마처럼 숨을 쌔근거리다가 발딱 일어났다.
“저 갈래요.”
“벌써 가니? 평소보다 너무 일찍 일어나는 것 아니야?”
“가다가 폐하를 뵈면 황후 마마께서 체통 없이 저를 괴롭히시더라고 다 일러바칠 거예요!”
“응, 꼭 그렇게 해. 반응이 어떨지 참 궁금하네.”
그러자 루이제는 정말로 토라진 얼굴로 몸을 팩 돌리더니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아르사크의 방을 뛰쳐나갔다.
새로 맞춘 것이 분명한 연분홍빛의 드레스 자락이 문 너머로 하늘하늘 사라지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아르사크가 폭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인사성 없는 건 여전하다니까.”
그 말에 로즈안나도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로즈안나는 빈 찻잔과 접시를 차곡차곡 치우며 말했다.
“루이제 님이 아르사크 님을 굉장히 잘… 따르시게 되었네요.”
“그러게 말이야. 너무 잘 따라서 문제야. 매일같이 찾아와서 수다라니, 기력도 좋지.”
“저로서는 너무 신뢰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지만요.”
아르사크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로즈안나를 돌아보았다.
“그건 왜?”
“그야… 죄가 분명하긴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그렇게 되었으니까요. 아르사크 님이나 폐하께 반발하고자 하는 심리가 아주 없다고 단정할 순 없겠지요.”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하지만 내 생각에 루이제는 그렇게까지 머리를 굴릴 만한 애는 아닌 것 같아.”
* * *
삐쳐서 황궁을 뛰쳐나온 루이제의 표정은 마차 옆에 서 있는 카르반테의 모습을 보자마자 금세 누그러졌다. 웃음 때문에 실룩이는 입매를 가다듬은 루이제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도도한 자태로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갔다.
루이제를 발견한 카르반테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루이제가 마차 안으로 올라탄 것을 확인한 다음 카르반테도 뒤따라 마차에 올랐다. 어디로 보나 측근으로 부리는 하인 아니면 호위기사 같은 모습이었으나, 사실 루이제와 카르반테의 관계는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채 묘한 고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카르반테는 우드하우스의 서자가 아니게 됨으로써 그냥 ‘카르반테’가 되었다. 성씨가 따로 없는 것은 평민 중에서도 하급 계층에 속함을 의미했기 때문에, 루이제는 차라리 다른 성씨를 적당히 가져다 붙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지만 카르반테가 거절했다.
‘어차피 저는 가희였던 제 어머니의 아들이지, 아버지의 아들로 산 적은 없습니다. 그분도 저를 아들로 생각하신 적이 없었을 테니 이런 생각이 아버지에 대한 불효가 되진 않겠지요.’
루이제는 맞은편에 앉은 카르반테를 힐끔 쳐다보고는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요즘 이상하게도 그와 같은 공간에 있을 때마다 때때로 뺨이 붉어지곤 했다.
그리고 카르반테가 어디에 있든 그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도 찾아내게 되었고, 오늘처럼 뾰로통하게 토라졌다가도 그를 보면 이내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의상실에 들를 거야.”
새침한 목소리다. 부채로 얼굴을 반 넘게 가리고 있어 더욱더 그렇게 들리는지도 몰랐다.
카르반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는 루이제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더라도 얌전히 따르기만 했다. 여름철 소나기처럼 갑작스러운 변덕에도 얼굴 한번 찡그리는 일이 없었다.
루이제는 그 순순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남작이 되었다고 해서 그녀의 응석받이 기질이 갑자기 증발하듯 사라지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배신당하고 그를 잃기까지 했으니, 루이제에게는 응석을 부릴 새로운 상대가 언제가 되었든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 딱 알맞은 조건의 카르반테가 옆에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카르반테가 그런 행동에 진저리를 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루이제의 머릿속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호의를 보이고 좋아하는 상대방이, 거꾸로 자신을 싫어할 리가 없다는 것이 루이제의 생각이었다.
“당신에게도 옷을 한 벌 사줄 거야.”
카르반테의 무뚝뚝한 얼굴에 처음으로 놀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심하던 눈이 느리게 깜빡이는 것은 그의 새로운 모습이어서, 루이제는 한동안 카르반테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는…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카르반테가 말했다. 루이제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카르반테가 입고 있는 옷이 그리 허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루이제는 원래 사치스럽게 생활하며, 사치스러운 사람들만 보아왔다. 고작 열 벌도 안 되는 옷으로 살아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또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카르반테에게 뭔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얼마 전 가봉을 위해 의상실에 들렀을 때 본 셔츠는 틀림없이 카르반테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준다면 그냥 받아.”
할 말을 고민하던 루이제는 짐짓 샐쭉하게 대꾸했다. 나름대로 그의 부담을 덜어주겠답시고 한 소리였지만, 카르반테가 약간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루이제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그러니까…….”
“제 행색이 초라하여 아가씨께 폐가 되는 겁니까?”
루이제의 눈이 어리둥절한 빛을 띤 채 깜빡였다. 머릿속이 갑자기 혼란스럽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카르반테가 자신의 말을 단단히 오해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지? 오해라고 해야 하나? 아니,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하나도 초라하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나을까? 아, 어떡해!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야!’
짧은 순간, 루이제의 머릿속에 스쳐 간 생각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 무엇을 골라야 정중하면서도 단번에 오해를 풀 수 있는 대답이 될지를 고민하던 루이제는 그만 순간적으로 떠오른 말을 그대로 내뱉고 말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다 벗겨놔도 잘생겨서 눈을 못 뗄 것 같은데.”
“…….”
91장 변화의 조짐들 (2)
루이제와 카르반테가 마차 안에서 서로 눈 둘 곳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아르사크는 오래간만에 소르흐를 데리고 숲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소르흐는 몸집이 커진 이후 별궁 옆에 따로 머물 자리를 두어 기르고 있었다. 과연 진상품답게 사냥매치고도 머리가 월등하게 좋아서, 따로 발을 묶어놓거나 하지 않아도 되었다.
황궁 부근의 숲을 마음 내키는 대로 날아다니다가도 정해진 시간이 되면 틀림없이 집으로 돌아왔고, 숲속에서도 아르사크의 피리 소리를 들으면 어디선가 쏜살같이 날아와 그녀의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마구간에서 말을 데리고 나오던 아르사크는 막 궁 안으로 들어가려는 에리히를 발견했다. 에리히 역시 말이 투레질을 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가 아르사크와 눈이 마주쳤다.
귀족들과 회담을 나누고 곧장 오는 길인지, 평상시에 입곤 하는 편한 재킷 차림이 아니었다. 반면 아르사크의 복장은 오로지 말을 타고 달리기에만 편한 차림이었다. 나란히 마주 서자 그 차이는 더욱더 눈에 띄었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늉을 하고는 말했다.
“돌아와서 좀 얌전해졌나 싶었는데 그러면 그렇지.”
노골적일 정도로 신랄한 어조였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찡그린 채 귀를 파는 시늉을 하며 대꾸했다.
“이제야 좀 속 편하게 지내나 했더니, 어디서 또 영양가 없는 잔소리가 들리네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소리일 테니 좀 듣지 그래?”
“오늘 저녁 식탁에 오를 파이 이야기인가요?”
에리히는 미간을 찡그리며 헛웃음을 쳤다.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 테오도르는 뒤에 서 있던 시종에게 일러 다른 말을 한 마리 더 데려오게 했다.
에리히는 자연스럽게 고삐를 쥐면서 아르사크와 계속 툭탁거리고 말다툼을 했다.
“대관절 하루라도 고상하게 보낼 수는 없는 건가?”
“대체 고상한 게 뭔지 알려나 주시고 그런 말을 하지 그러세요?”
“그걸 꼭 알려줘야 알아? 수예, 미술, 그것도 아니면 음악 감상도 있지. 독서나 시, 외국어도 있군.”
“제가 그런 걸 하며 ‘고상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폐하의 마음이 편하시다 그건가요?”
“적어도 멋대로 돌아다니다 칼 맞을 일은 없을 것 아니야?”
“좀 스친 걸 갖고 정말 징그럽게 우려먹네요.”
“수프라도 끓일까 봐. 이름은 ‘망나니 수프’가 좋겠군.”
코웃음을 친 아르사크는 숲길로 들어서는 초입에 이르자 말에 올라탔다. 에리히 역시 말에 올라, 두 사람은 나란히 그늘진 숲을 산책했다. 소르흐는 아르사크의 머리 바로 위의 허공을 유유히 날며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테오도르는 안색이 왜 저렇지요?”
뒤따르는 테오도르를 슬금 눈짓한 아르사크가 물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수도로 돌아온 이후 테오도르는 내내 눈 밑이 시커멓고 피죽도 한 그릇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기력이 없어 보였다.
황제의 최측근 호위이건만, 요즘 보이는 모습으로는 차라리 그가 쓰러질 때를 대비한 호위라도 붙이고 다녀야 알맞을 만했던 것이다.
“글쎄, 나도 모르지. 잠을 잘 못 잤는지도.”
에리히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뒤따르고는 있다지만 그 두 사람의 대화가 안 들릴 만큼 먼 거리는 아니어서, 주고받는 말을 고스란히 듣고 있던 테오도르는 억울해 드러눕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
튈브리크에서 있었던 일련의 일들이 아르사크가 깨어났을 때쯤 모두 정리되어 있었던 것은 그 나흘 동안 에리히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스케줄을 모조리 소화하며 백방으로 뛰어다닌 덕분이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자잘한 뒤치다꺼리가 모두 테오도르의 몫이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아르사크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내내 에리히는 손끝만 갖다 대도 곧바로 폭발할 것 같은 상태였다.
그 나흘을 겪고 수도로 돌아와서는 휴식도 없이 본업에 복귀해야 했으니, 얼굴이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