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저…….”
간식거리를 늘어놓고 파는 노점을 지날 때, 티리야의 등 뒤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 티리야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걸 몰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곧 누군가의 손끝이 어깨를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본 티리야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생각해 내려는 것처럼 눈썹을 찡그렸다. 머리 한쪽을 붕대로 친친 감은 여자아이였다. 눈 밑에 점점이 난 주근깨를 보고서야, 티리야는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넌 저번에…….”
“…맞아. 저기… 난, 니타니…라고 해.”
니타니가 말했다. 네 도움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그날과 달리, 니타니는 티리야와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니타니를 보던 티리야가 물었다.
“머리는 왜 그래?”
니타니는 티리야의 질문에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왜 다쳤는지 짐작이 안 가는 바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마을로 몰려왔던 그날, 니타니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이상의 동정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할 말 없으면 나는 바빠서.”
“아냐, 저기……! 저, 기. 그게… 하,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거야. 저기… 내가, 그때는… 그때는, 말을… 심한 말을 했어. 날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런 말을 해서 정말로, 미안해…….”
그토록 열심히 생각했건만, 막상 티리야를 마주하니 니타니는 미안한 마음에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과를 하는 입장이면서 먼저 울어버리는 것이 그다지 좋은 태도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눈물이 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붕대를 친친 감은 채 침대 위에서 눈을 뜬 니타니는 몇 시간 동안이나 펄펄 끓는 열에 시달려야 했다. 온몸이 푹 녹아버릴 것 같은 열기와 싸우면서, 니타니는 계속해서 티리야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당신에게 이 애를 때릴 권리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있는 곳을 노려 불을 지른 남자를 붙들었을 때, 니타니는 자칫하다가는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일의 책임이 마치 자신에게 있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티리야가 칼에 찔리는 광경을 니타니도 보았다. 붉게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고, 사람들의 손에 부축되어 가던 그녀의 목이 아래로 힘없이 꺾여있는 것도 보았다.
자신에게 손을 올리려던 병사를 강경하게 가로막던 티리야의 뒷모습이, 힘이 다 빠져버린 그 등에 겹쳐져 떠올랐다.
니타니는 그제야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엉뚱한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벌 받을 게 무서워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야. 네, 네가… 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아. 날 용서할 수 없을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는 건 알아주면 좋겠어…….”
꺽꺽대고 울면서 말까지 하느라 니타니는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티리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덤덤한 얼굴로 니타니를 바라보고 있다가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그만 좀 울어.”
손수건을 받아든 니타니는 또 흐느끼면서 겨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얇은 천으로 만든 여름용 손수건은 눈물에 젖어 금세 물 얼룩이 졌다.
티리야가 말했다.
“사과 받아줄게. 널 완전히 용서한다는 건 아니지만, 미안하다는 건 알았어.”
“고, 고마워……. 그리고 내가… 잘못했어, 정말로…….”
“손수건은 그냥 너 가져.”
“아, 아니야. 내가… 빨아서, 돌려주러 갈게…….”
겨우 진정한 니타니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얼룩덜룩해진 채 그녀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잠시 쳐다보던 티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 내일 오후에 와. 오늘 간식을 새로 만들 거거든. 내일은 먹을 수 있을 거야.”
니타니는 얼른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티리야는 온다간다는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렸다.
니타니는 티리야로부터 받은 손수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눈물을 닦느라 얼룩지고 구겨졌지만, 귀퉁이를 따라 섬세하게 수놓인 등나무꽃이 무척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보랏빛 실이 촘촘하게 엮인 모양을 보자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니타니는 얼른 팔뚝으로 눈가를 덮어 가렸다.
90장 변화의 조짐들 (1)
홀드빅과 우드하우스에 대한 형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집행되었다. 죄를 입증하는 증거와 증인이 확실했으므로 황제의 결정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홀드빅의 측근인 슈로터와 휘하의 일당은 모두 처형되었고, 우드하우스는 가문이 완전히 끝장났다는 충격 때문에 심문을 받던 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홀드빅 자작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눈이 가려진 채 남쪽 경계의 탑으로 끌려갔다. 역모나 내란을 포함하여 중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을 가둬두는 그곳은 일단 들어가면 두 번 다시 햇빛을 볼 수 없으며, 살아서 나오는 것 역시 불가능한 곳이었다.
홀드빅의 아들은 오래전부터 먼 지방으로 떠나 있어 벌은 면했지만, 자작이 작위를 잃음으로써 그 역시 평민의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이미 결혼한 딸들도 사태와 무관했다는 것이 입증되어 별일은 없었으나 아버지의 소식을 들은 장녀는 앓아눕고 말았다.
자작은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지만, 막내딸인 루이제는 벌을 받지 않았다. 홀드빅의 죄를 밝혀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거니와, 말하자면 피해 당사자인 아르사크가 루이제의 처벌만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황후가 왜 홀드빅의 딸을 감싸고도는지 알 수 없다며 한동안 수군거렸다. 어쨌든 루이제는 아르사크의 변호로 무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황후를 보호하는 일에 있어 공을 세운 대가로 남작의 칭호를 받았다.
“위트레트는 정말이지 시골이라니까요. 논밭과 산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사람들도 다들 마흔 살은 넘었어요.”
아르사크는 종알거리는 루이제를 반쯤은 우습고, 반쯤은 딱하다는 듯한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철딱서니 없는 딸을 바라보는 엄마와 비슷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루이제는 아르사크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를 홀짝이면서 한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리고 저택 테라스로 나가면 퇴비 냄새가 나요!”
“농사를 지으려면 비료가 있어야지. 안 그러면 작물이 자랄 수가 있겠어?”
“하지만 퇴비 냄새라니까요! 마마께서는 모르실 거예요. 정말 얼마나 지독한데요. 맡아도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아요.”
투덜거리는 것치고 표정은 나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작위를 받은 루이제는 ‘홀드빅 자작의 영애’에서 ‘루이제 홀드빅 남작’이라는 새로운 호칭을 얻었다.
여성이 작위를 잇거나 가주가 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드물진 않았지만, 응석받이로 소문난 루이제다 보니 과연 그녀가 허울뿐인 작위라도 올곧게 지켜낼 수 있을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래서 남작이 되고도 영지는 버려두고 매일같이 수도에서만 돌아다니는 거니?”
아르사크의 질문에 루이제는 입술을 동그랗게 벌렸다가 곧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버려두다뇨? 버려두지 않았어요! 대리인을 고용했다구요.”
“대리인? 무슨 대리인?”
“영지를 관리하는 대리인이죠. 대개 영지의 수입이나 지출, 그리고 민원을 처리하는 거예요. 간단해요!”
그렇게 간단한 일이면 명색이 영주인 네가 하지 그러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아르사크는 웃음으로 그것을 삼켜버렸다.
애초에 사람들의 평가대로, 루이제는 영주나 귀족으로서 짊어져야 하는 의무와는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그런 면을 본다면 에리히가 루이제에게 우드하우스 남작이 다스리던 위트레트를 영지로 내려준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작위를 받으면 적으나 많으나 어쨌든 일정한 규모의 토지가 내려지기 마련인데, 위트레트는 루이제의 말마따나 고요하기 그지없는 시골 그 자체였으므로 애초에 영주가 나서서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몇 되지 않는 마을 사람들은 거의 전원이 그 지역 토박이여서 근방의 사정에는 빤했다.
그렇다고 해서 루이제가 정치적으로 야심을 가질 만한 인물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니, 그 정도 규모와 수준이 딱 알맞았던 셈이다.
“그럼 네가 데리고 다니던 그 남자는?”
“아, 카르반테요? 지금은 저랑 같이 있어요. 그게 말이죠, 태어나서 한 번도 수도를 구경해 본 적이 없다잖아요? 그래서 제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견문을 넓혀주고 있답니다.”
카르반테는 서자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우드하우스의 아들이었고, 게다가 루이제를 가둬두는 일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처벌을 피할 수 없을 뻔했지만 이 문제는 의외로 루이제가 해결해 주었다.
홀드빅과 우드하우스 남작에 대한 심문이 진행되고 있던 때에 그를 우드하우스 가문에서 빼내 버린 것이다.
루이제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했던 것은 혹시 모를 위협으로부터 루이제를 지켰던 일로 둔갑했고, 그는 그저 주인의 명령에 순진하게 따랐을 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혀 몰랐던 어리숙한 하인이 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대가인지 뭔지는 몰라도, 카르반테는 자유의 몸이 된 이후로도 계속해서 루이제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때문에 지금도 루이제를 따라 수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네 호위기사로 고용한 거니?”
“그렇지 않아요. 그는 그냥… 음…….”
루이제는 갑자기 시선을 두리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문득 아르사크는 루이제의 귓가가 약간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속으로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호위기사가 아닌데 늘 붙어 다니는 남자라. 그럼 연인인 모양이지?”
“그,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에요!”
허둥거리던 루이제는 그만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훌렁 내던질 뻔했다. 차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온통 엎질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