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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17화 (117/191)

117화

“루이제는 어떻게 된 거죠?”

“위트레트의 저택에 감금되어 있었다. 우드하우스 남작이 주로 애인들을 불러다 즐기던 곳이라 남들 눈에 드러나지 않은 곳이었다더군. 클루이트를 기억하고 있나?”

아르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요.”

“클루이트와 그대의 관계에 대해 헛소문을 퍼뜨린 것도 홀드빅 자작의 짓이더군. 루이제 홀드빅이 제 아비의 짓임을 인정하고 증명했어. 이로써 내가 자작을 종신토록 감금할 빌미가 모두 갖춰진 셈이야.”

아르사크도 이미 어렴풋이는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그토록 애를 써도 꼬리를 잡기가 힘들었는데, 그것을 정말로 루이제가 알아냈을 줄이야. 놀랄 일이었다.

아르사크가 무심코 다친 다리를 내려다보자 에리히가 말했다.

“그것도 홀드빅 자작의 짓이다. 정확히는 그의 심복이지만.”

“자작에 대한 처분은 관대할 수 없겠군요.”

“그래. 처형이 아니면 종신형이지.”

백성들을 선동한 것만도 내란죄에 해당해 중벌을 면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데다가 황후를 살해하려 한 죄목까지 더해졌으니 자비롭게 처벌해 봐야 종신형에 처해지는 것이 틀림없다. 외따로 떨어진 탑의 감옥 안에 눈이 가려진 채 갇혀 평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대개 그런 자들은 일이 년 사이에 시력을 완전히 잃게 마련이었고, 십 년 넘게 사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요?”

홀드빅과 우드하우스는 중벌을 면할 수 없었지만 로이폰의 난민들이나 튈브리크 시민들에 대한 처벌은 별개로 이루어져야 했다.

그들은 자작이 자신들에게 개인적으로 구호물자를 내려주어 믿고 의지했을 뿐, 결코 내란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시종일관 주장했다.

본래 내란의 주동자가 체포되면 거기에 연루된 이들도 모두 비슷한 기준으로 벌을 받게 되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조금 독특했기 때문에 에리히는 판단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홀드빅과 우드하우스의 끄나풀을 제외한 시민들 중에서는 주동하여 말썽을 일으킨 자들에게만 반년간의 노동형을 내리고 나머지는 풀어주었다. 더불어 토르갈 부족의 사람들을 포함하여 제국 내에 거주하는 소수 외부인들에 대한 보호 조치를 강화했다.

아르사크가 경험한 갑작스런 지진과 불길은 튈브리크의 다른 시민들 역시 보고 들은 것이었다.

다만, 눈이 멀어버릴 것 같던 빛이 사라진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무너졌던 건물과 치솟았던 불길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리둥절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들은 에리히의 품에 안긴 채 쓰러진 아르사크의 모습을 보았다. 핏기 없이 해쓱해진 그녀를 보며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도무지 현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을 목격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을 대표하고 보호하는 신이 아르사크를 황후로 선택했다는 것이 증명된 마당에,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녀를 황후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영지의 댐이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증명과 해명을 끝냈다. 죽은 이들은 황실에서 정식으로 비용을 지출해 공동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했고. 댐이 보수되고 마을을 재건하는 일이 마무리되면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럼 그동안은 어디에 머물게 되나요?”

“일단은 거주지가 여기에 마련되어 있으니 여기서 살게 할 생각이지만, 원한다면 다른 영지로 이동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렸다.”

티리야와 다른 사람들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아르사크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삶의 모든 것을 빼앗긴 듯한 그 기분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아르사크는 복잡한 심정으로 시선을 살짝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89장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5)

증오에 차 있던 난민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착잡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이 해결되었다고 해서, 보호령 같은 것이 내려졌다고 해서 가슴속에 뿌리 깊이 자리 잡은 편견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이 진심으로 함께할 수 있는 날이 오려면 아득한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아르사크는 그들을 차마 죽여버릴 수 없었던 그때의 감정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사실 그때는 복잡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단지 에리히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느라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자신도 역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는 일말의 안도감도 들었다.

“모두… 무사한가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아르사크가 물었다. 에리히는 그녀가 부족민들에 대한 것을 묻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에리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모두 무사하다. 우드하우스 남작이 사주한 자가 질렀던 불은 어느 틈엔가 꺼져 있더군. 그러니 마을도 큰 피해는 입지 않았어.”

“…다행이군요.”

이런 일을 겪고도 그들은 여전히 제국에서 살고자 할까. 만약 티리야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남겨두고 떠나겠다고 하더라도 아르사크는 그들을 막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티리야는 어제부터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으니,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만나보도록 해.”

“지금 가겠어요.”

아르사크가 반색을 하며 일어서려는데 에리히가 그녀를 막았다. 잠깐 동안의 소리 없는 힘겨루기는 이번에는 에리히의 승리로 끝났다. 나흘 내내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잠만 잤으니 제아무리 아르사크라도 제대로 힘을 낼 수가 없었다.

에리히가 말했다.

“치료사를 불러올 테니 몸이 어떤지 진찰부터 받아. 그러고 나면 식사를 하고, 제대로 걸을 수 있는지도 확인을 받아.”

“제가 갓 태어난 아기라고 생각하시나요? 걸을 수 있다는 것까지 치료사에게 확인을 받으란 말인가요?”

“누가 치료사에게 확인을 받으라고 했어? 그건 내가 확인할 거야.”

* * *

아이들과 노인들이 숨어 있던 집은 다행히 뒤채와 지붕만 불탔을 뿐 본채는 멀쩡했다.

알린은 마을의 남자들과 함께 나무와 마른 풀을 가져다 새로 튼튼한 지붕을 얹고, 흉측스럽게 얼룩진 그을음을 깨끗하게 긁어내는 데에 하루의 반나절을 다 보냈다.

티리야는 상처가 깊지는 않았지만 아물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붕대를 단단하게 감아두어 걷기가 조금 불편했으므로 당분간은 지팡이 신세를 지기로 했다.

뼈나 근육이 상하지는 않았으니 자주 걷는 것보다는 앉아서 상처가 아물기를 얌전히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았지만, 다들 분주하게 일을 하는데 혼자만 앉아 있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티리야, 또 어딜 가려고 그래?”

불에 타 무너진 흙을 짊어지고 가던 알린이 말했다. 티리야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가, 한숨을 쉬면서 목청을 높여 대꾸했다.

“융단을 만들 실을 사러 갈 거야!”

“왜 네가 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어휴, 잔소리 좀 그만해! 괜찮으니까!”

퉁명스럽게 대꾸한 티리야는 알린이 쫓아오기라도 할세라 얼른 걸음을 옮겼다. 다친 다리를 디딜 때마다 상처 부위가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참고 걸을 만했다.

상점과 좌판이 늘어선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티리야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예전과는 약간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이전에는 티리야뿐만 아니라 부족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경계와 희미한 혐오로 점철되어 있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딱히 호의적인 반응들을 보인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혐오가 아니라 일말의 두려움이 섞인 시선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어 아첨하듯 말을 걸어오는 이들도 있었지만, 티리야는 무관심한 태도로 화를 삭였다.

이제 와서 이들과 필요 이상으로 친밀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모조리 발밑에 무릎 꿇게 만들고 싶다는 첨예한 분노도 지금은 왜인지 사그라들었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아무렇지 않게 대해준다면 그게 제일 괜찮을 것 같았다.

티리야는 상점가를 지나 수예품과 각종 실, 바늘 같은 것들을 파는 가게로 들어갔다. 대개의 고만고만한 가게에서는 간단한 자수를 놓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실만을 취급했지만 이곳은 가게의 규모가 제법 컸다. 자수뿐만 아니라 의복이나 융단을 만들 때 사용하는 다양한 재료들이 있었다.

가게 주인인 뚱뚱한 남자는 티리야의 얼굴을 보고는 머쓱한 얼굴로 딴전을 피웠다. 그러나 용케 나가라는 말만은 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돈을 내고 물건을 사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도둑이나 되는 양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티리야를 살펴보고, 빨리 쫓아내지 못해 안달을 했던 사람이다.

티리야는 그의 어색한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실을 둘러본 후 양모로 된 실 꾸러미를 색깔별로 몇 가지 골랐다.

종이봉투에 포장을 해준 남자는 티리야가 돈을 내밀자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허공에 손을 휘두르다가 말했다.

“그냥 가져가라.”

티리야는 의아한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좀 더 고집스러운 태도로 돈을 내밀었다.

“우린 공짜로 물건을 받는 거지들이 아니에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 뭐냐… 내가… 큼, 그냥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 가져가거라. 정 공짜로 받기 뭣하다면 그… 저쪽 테이블의 깔개가 좀 낡았는데, 저기… 그러니까.”

“깔개를 만들어달라는 말인가요?”

두둑하게 살이 오른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티리야는 잠시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종이봉투를 한 팔에 안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일주일 후에 새 깔개를 가져다드리죠.”

“그, 그래주면 고맙겠구나. 저, 그리고… 실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오거라.”

“네. 안녕히 계세요.”

짧은 인사를 남긴 티리야는 가게를 나서다 말고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비대한 몸을 수그린 채 뭔가 찾는 시늉을 하며 뻘뻘대고 있었다. 아마도 티리야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종이봉투 안을 잠시 들여다본 티리야는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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