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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16화 (116/191)

116화

“로즈… 여기가 대체 어디야?”

아르사크가 묻자, 로즈안나는 여전히 눈물이 줄줄 흐르는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여긴 튈브리크 총독이 머무는 성이에요, 아르사크 님.”

“그럴 리가. 튈브리크는 전부 불탔어. 땅이 엄청나게 흔들렸고… 사람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걱정하지 마세요. 무사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들을수록 영문을 모를 말뿐이었다. 아르사크는 말리는 로즈안나를 천신만고 끝에 설득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을 딛고 서자마자 눈앞이 핑 도는 듯했지만 다행히 다시 쓰러지지는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튈브리크의 번화한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무너진 건물도 없고, 불탄 흔적도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광장을 오갔고, 곳곳의 노점도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아르사크 님, 의자에 앉으세요. 다리도 아직 덜 나으셨잖아요.”

아르사크는 그제야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천을 새로 감아놓았는지 깨끗했다. 이제 통증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로즈안나가 가지고 온 의자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폐하께 아르사크 님이 깨어나셨다는 보고를 올리고 오겠습니다.”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창밖의 풍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설마 전부 꿈이었을까.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아르사크는 아직도 거구의 남자를 찔렀을 때의 감각이 생생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불과 연기의 매캐한 냄새도,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던 목소리들도, 꿈이라기에는 모두 다 너무나 생생한 것들이었다.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르사크는 휘황한 빛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를 다시 떠올려보려 애썼으나 잘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듣기에 가장 익숙한 방식이었을 뿐, 실제로는 목소리조차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죽일 것이냐고 물었을 때 아르사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사크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목소리는 말했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땅에 엎어진 그들이 모두 죽어버리기를 바란다고 말하지 못했다.

‘왜였을까?’

스스로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왜 곧장 ‘전부 죽이겠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아르사크는 희미하게 저린 느낌이 드는 손을 천천히 움츠렸다가 펼쳐보았다.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다가 곧 멎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의문에 잠겨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르사크는 복도 저편에서부터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아르사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빠끔히 열려 있던 문을 박차다시피 하며 누군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르사크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이윽고 아르사크의 입에서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루이제?”

88장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4)

복도가 다 울릴 정도로 요란하게 뛰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루이제였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다 흐트러져 흘러내렸고, 치맛자락은 말괄량이처럼 발목이 다 보이도록 들어 올렸으며, 숨을 몰아쉬느라 자그만 어깨는 쉼 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이 상황이 꿈인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다시 한번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정말로 루이제니?”

“그, 그럼 누구겠어요! 모… 모처럼 깨, 깨어나셨다고 해서, 저기, 왔는데.”

당차게도 터져 나왔던 목소리가 헐떡거리는 호흡과 더불어 기죽은 것처럼 맥이 빠졌다. 아르사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다가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디에 있었지? 여긴 어떻게 왔어?”

“그게, 저기… 지금 말씀드리긴 좀 길어서… 그, 그렇지만! 저는 분명 마, 마마를 도우려고 그랬던 거예요! 믿어주셔야 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천천히 순서대로 이야기해.”

“아니, 그, 그게…….”

루이제는 난감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르사크가 재촉하려는 찰나, 문밖에서 다시 인기척이 났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본 루이제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에리히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자마자 딸꾹질을 하며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폐, 폐하.”

“황후와 둘이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나가라.”

에리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루이제는 아르사크를 힐끔 돌아보고는 잽싸게 방을 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음을 확인한 에리히는 문을 닫아버리고는 의자에 앉은 아르사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빛에 휩싸여 있을 때도 아르사크는 분명히 에리히를 보았다. 그는 몇 번이나 쓰러지고 휘청거리면서 아르사크를 향해 걸어와 ‘내게로 오라.’고 말했다.

그때 에리히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렸지만, 지금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상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아르사크 역시 에리히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물끄러미 마주 보기만 했다.

“깨어났군.”

한참의 침묵을 뚫고 에리히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마치 아르사크가 늦잠이라도 잔 것 같은 덤덤한 말투였다. 아르사크는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시다시피요.”

대꾸를 했지만 일어날 기운은 아직 없었다. 왠지 온몸의 기력을 다 소진한 것처럼, 의식만 또렷하지 몸은 허수아비 같았다.

아르사크의 어깨가 살짝 움직인 순간, 에리히는 마치 불에라도 덴 사람처럼 흠칫하고는 갑자기 아르사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방은 그리 넓지 않아서 단 몇 걸음 만에 두 사람의 거리는 고작 한 뼘 정도만을 남긴 채 좁혀졌다.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손이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잠시 움츠러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허공으로 아주 약간 떠오른 채 멈춘 손끝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안쪽으로 천천히 굽어졌다.

“만약 그대로…….”

에리히가 말했다. 말이라기보다는 혼자서 읊조리는 것에 가까웠지만 아르사크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다음에 올 말이 무엇인지도 이미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아르사크는 입을 열지 않은 채 에리히를 기다렸다.

입술을 달싹거린 채 아르사크의 얼굴을 보고 있던 에리히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르사크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에리히는 하려던 말을 목 안으로 꿀꺽 삼켜버리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채롭게도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그런 재주는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마구간에서요.”

아르사크의 대꾸에 에리히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그가 그토록 얼빠진 표정을 하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어서, 아르사크는 저도 모르게 숨죽인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게 웃겨?”

“거울을 좀 보지 그러십니까? 폐하께서도 웃지 않고는 못 배기실 텐데요.”

“아, 내 얼굴을 보고 웃었다 그 말이군. 이참에 골치 아픈 황제는 때려치우고 광대로 전향해야겠어.”

“이렇게 괴팍한 광대를 누가 써주기나 한대요? 꿈도 야무지네.”

그 순간,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것처럼 달싹이던 에리히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아르사크는 짓궂은 웃음을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알 수 없는 울렁임이 느껴졌다. 나흘이나 내리 굶고 기절해 있었으니 어지럼증이라도 온 것일까? 그런데 어지럼증이라기에는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는 것 같기도 했다.

아르사크가 그 혼란한 감정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순간, 에리히 역시도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지친 사람처럼 말라버린 아르사크의 입술과 혈색이 옅어진 듯한 뺨, 쓰러져 있느라 제대로 씻지도 못해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늘어진 머리카락이 전부 다 빛나는 것처럼 에리히의 시야를 침범했다.

가슴속 어딘가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끈이 툭 끊어질 때와 비슷한 감각이 느껴졌다. 무언가 무너지는 것처럼 쿵 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 소리가 들린 순간 에리히는 균형을 잃었다. 의자에 앉은 아르사크를 내려다보느라 굽어져 있던 몸이 앞으로 불쑥 기울었다.

아르사크는 순간적으로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이라 생각해 팔을 들어 올리려 했다. 그러나 에리히의 팔이 먼저 아르사크의 어깨를 감싸 안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에리히의 뺨이 귓가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아르사크는 잠깐 동안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에리히의 팔이 몹시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린 순간, 아르사크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입을 맞춰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하면, 그는 어떤 반응을 할까.

어떤 눈빛을 하고, 어떤 표정으로 나를 볼까?

그러나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에리히의 몸이 천천히 떨어졌을 때, 아르사크는 일말의 아쉬움과 다행스러운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아주 조금만 더 그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더라면 충동을 참아내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양쪽 모두 균형을 잃어버리면 그다음부터는 더욱 큰 문제가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르사크는 차마 에리히에게 입을 맞출 수가 없었다.

참을 수 없이 어색한 침묵의 순간이 지나간 후, 에리히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아르사크를 바라보았다.

“궁금한 것이 많은 얼굴이군.”

“조금만 늦게 오셨더라면 숨이 넘어갈 뻔했죠.”

에리히가 조금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

“시민들을 선동한 것은 홀드빅 자작과 우드하우스 남작인 것으로 밝혀졌다.”

“우드하우스 남작? 처음 듣는 이름이군요.”

“위트레트의 영주야. 아니, 영주였지. 영지의 규모도 작고, 우드하우스 남작가 역시 그다지 영향력 있는 가문이 아니었으니 그대가 알 리 만무한 사람이야. 자작에게 줄을 대고 싶어 그동안 백방으로 안달을 했던 모양이던데, 마침 이번 일로 엮이게 되었다더군. 결국 둘 다 파멸하는 길이 되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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