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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15화 (115/191)

115화

남자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적잖이 당황한 참이었다. 이토록 실력이 뛰어난 줄 미리 알았더라면 혼자서 덤비지 않았을 것이다.

거리가 다시 좁아졌다. 남자는 검을 비껴들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 아르사크는 그의 시선이 순간순간 다른 곳을 향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그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잠깐이라도 방심했다가 저 거대한 검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몸이 반토막 나고 말 것이다.

완력에 있어서는 당연히 아르사크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솜씨 좋게 검을 빗나가게 해 공격을 막아내고는 했지만 오래 끌어서는 안 되었다.

남자의 기세에 뒤로 물러났던 아르사크는 갑자기 검의 방향을 바꾸며 달려들었다. 그녀가 달려들 것까지는 남자도 예상한 바였다. 그러나 움직임의 궤적이 예상을 벗어났다. 남자는 아르사크가 세 걸음 만에 자신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 확신했다.

계산이 끝나자마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거대하고 무거운 검날이 아르사크의 허리를 정확히 두 동강 내기 위해 휘둘러졌다. 그러나 무섭게 벼려진 검날은 허공을 갈랐을 뿐이다.

아르사크는 두 걸음 반 만에 땅을 박찼다. 그러고는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가 순간적으로 휘청거린 검의 널찍한 부분을 밟았다. 뒤쪽으로 크게 빠졌던 아르사크의 팔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아르사크의 검이 남자의 두툼한 팔뚝과 어깨를 동시에 찌르고 들어간 순간, 찢어지는 비명이 마을 안쪽에서 터져 나왔다.

아르사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이들과 노인들이 몸을 피해 있는 집에서 불길이 치솟은 것을 보았다.

87장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3)

아르사크는 순간적으로 제대로 된 상황 판단을 하지 못했다. 아우성을 치며 마을 안쪽으로 달려가는 부족민들과, 다리를 절뚝거리며 뛰어나온 티리야의 모습과, 불길에 휩싸인 문을 부수고 들어가 양손에 아이들을 안고 나오는 알린의 모습 같은 것들이 도저히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누가 불을 질렀을까? 아르사크는 이미 기절한 남자와 목숨을 건 채 싸우느라 다른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멀찌감치 물러나 있던 사람들 역시 불길이 치솟은 광경에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그들 대부분은 토르갈 부족민에 대한 박탈감과 증오로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감히 불을 지른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불이다!”

“불이 났다! 다들 피해!”

이글거리는 불길은 주로 나무와 마른 풀로 지은 집을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아르사크는 울부짖고 있는 아이들과 허리를 숙인 채 괴롭게 쿨럭거리는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에는 아르사크가 친아버지처럼 따르던 데르가도 있었다.

“데르가 아저씨…….”

아르사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다리가 멀쩡한 사람들은 저마다 불이 번질 것을 두려워하며 멀찍이 달아났다.

움직일 수 있는 몇몇 병사들은 물과 모래를 가져오기 위해 달음박질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르사크는 비틀대고 절뚝거리며 바깥으로 달려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하나하나 새기듯이 바라보았다. 피와 검댕과 먼지, 그보다 더한 두려움과 서글픔으로 엉망진창이 된 그 얼굴들은 아르사크가 너무나 오랫동안 보아온 얼굴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친구였고, 가족이었다.

“이자가 불을 질렀어요! 황후 마마! 이자가……!”

아르사크는 낯선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티리야의 또래인 듯한 소녀가 남자의 옷깃을 붙든 채 악을 쓰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그의 바짓단과 손끝에서 번들거리는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기름이 분명했다. 여자아이는 머리가 온통 헝클어지고 뺨이 움푹 꺼져서, 마치 며칠을 굶은 것처럼 보였다.

“이자예요! 이자가 불을……!”

여자아이의 외침은 오래가지 못했다. 옷깃을 붙잡은 손을 거칠게 뿌리친 남자가 그녀를 내동댕이쳤기 때문이다. 가냘픈 몸이 허공에 붕 뜨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아래로 추락하고, 머리가 부딪힌 자리에서 피가 흘렀다.

멀리서 누군가 ‘니타니!’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여자아이의 이름인 것 같았다.

니타니. 아르사크는 그 이름을 입속으로 뇌었다. 뒤이어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불을 지른 자뿐만이 아니라, 오늘 이 사태를 만든 모든 사람을 전부 다 없애버리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때였다.

“뭐지?”

다닥다닥 붙은 채 모여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 말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발밑이 무섭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땅 전체가 뒤흔들리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진동이었다. 아니, 실제로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나뒹굴었다.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니타니를 내던진 남자도 균형을 잡지 못하고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벽돌이 쏟아져 내렸다.

비명과 고함 소리가 난무하는 와중, 누군가 아르사크 쪽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저, 저기!”

두려움에 떨며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그것은 너무나 명확하게 눈에 보였다. 요동치는 땅 위에 발을 디딘 채 홀로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아르사크의 머리에서, 몸에서, 어깨와 팔과 다리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수라장의 틈바구니에서 누군가는 그 빛의 정체를 짐작했다. 정확히는 빛에 휩싸인 아르사크의 모습을 보자 잊고 있었던 마지막 예식의 날이 벼락같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상념에 잠겨 있을 시간도, 감탄할 시간도 없었다. 곳곳에서 불기둥이 치솟고 땅이 뒤집어졌다. 사람들은 모조리 땅바닥에 엎드린 채 두려움에 울부짖었다.

빛 속에서 아르사크는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아르사크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죽일 것인가?

‘누구를?’

―너를 분노하고 절망하게 한 자들 모두를.

‘이대로 죽일 수 있는 건가?’

―네가 바란다면 이루어질 것이다.

‘당신은 신인가? 에레벤나라 불리는 이들의 신이 당신이야?’

―나는 머물지 않는다. 나는 이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곧 네 안에 있으며, 너는 내 안에 있다.

‘이해가 안 되는데.’

―바란다면 선택하라.

귓속에 물이 들어찬 것처럼 소리가 울린다. 아르사크는 휘장처럼 눈앞을 가린 빛 너머로 흔들리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엎어지고 넘어진 채 울부짖는 이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보였다.

처음 이 빛 속에 잠겼을 때도 그랬다. 광장에 서 있는 그 수많은 군중의 얼굴을 마치 한 명, 한 명씩 앞에서 들여다보듯 알 수 있었던 기억이 났다.

이자들은 자신의 가족을, 친구를 해치려 한 자들이다. 용서할 가치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진심으로 제국의 황후가 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이들의 목숨은 아르사크에게 큰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을 모두 죽여버리면 에리히는?

에리히는 어떻게 되는 거지?

튈브리크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에리히가 있을 총독의 성도 불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르사크는 문득 그가 어디에 있을지를 생각했다. 자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 성에서 빠져나왔을까? 말을 타고 달려오던 길에 땅이 흔들려 떨어진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미 여기에 있을까?

아르사크는 화염과 연기로 뒤덮인 채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풍경의 어딘가를 무심히 응시했다. 땅바닥에 들러붙다시피 엎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 비틀거리며 일어선 것이 보였다.

그는 몇 걸음을 떼기 무섭게 다시 옆으로 쓰러졌으나, 그러고서도 악착같이 다시 일어나 몇 걸음을 걸어 아르사크에게로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늘을 검붉게 물들인 연기 속에서, 아르사크는 그의 머리칼이 금빛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에리히와 아르사크의 시선이 마주쳤다. 빛 때문에, 에리히 역시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에리히는 아르사크를 본 순간 넘어진 사람들의 등을 짚으며 휘청거리면서도 계속 걸어왔다.

아르사크는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마치 일부러 연극을 하는 것처럼 너무도 느린 움직임이었고, 그래서 아르사크는 에리히가 하는 말을 알 수 있었다.

‘부탁이야.’

‘이리로.’

“내게로 와.”

아르사크의 귓속을 울리게 만들던 이상한 진동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빈자리를 가장 먼저 파고든 것은 에리히의 목소리였다.

아르사크는 아직 꺼지지 않은 빛 속에서 눈을 감았다. 시야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죽음의 순간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느껴진다고 생각한 순간 머리가 개운하게 맑아졌다. 아르사크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넝쿨과 꽃이 아름답게 뒤엉킨 그림이 그려진 천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깔끔하게 다듬어진 창틀과 유리,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보였다.

“아르사크 님!”

로즈안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르사크는 자신이 환청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앞으로 불쑥 다가온 로즈안나의 얼굴이 보이고, 뚝뚝 떨어진 눈물이 볼과 이마를 미지근하게 적셨다.

아르사크는 그제야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멍하니 물었다.

“…로즈, 나 죽지 않았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살아계시죠! 아픈 덴 없으세요? 제 얼굴은 보이시는 건가요?”

“보여……. 그리고 아프지도 않아. 다만 아무 힘이 없어.”

“당연히 그러시겠죠. 아르사크 님, 나흘 동안이나… 나흘 동안이나요! 그동안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다고요!”

“뭐라고?”

아르사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나 로즈안나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힘이 다 빠진 팔다리며, 나흘을 내리 기절해 있었다는 것을 알자마자 미친 듯이 쓰라리기 시작하는 뱃속까지. 아무래도 자신이 정신을 잃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기만 했다는 건 사실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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