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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14화 (114/191)

114화

86장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2)

“저 계집이 지금 뭐라는 거야?”

웅성거리며 멈춰선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신호탄이 된 듯, 잠시 가라앉았던 흥분이 다시금 사람들 사이로 거세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쏠 테면 쏴봐!”

“마을에 불을 질러버릴 테다!”

“네놈들은 이곳에 살 자격이 없어!”

뒤쪽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쓰러진 병사로부터 빼앗은 듯한 칼을 휘두르며 달려 나왔다. 그 순간 티리야의 손이 시위를 당겼다.

쉭!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남자의 손목 아래에 화살이 반 넘어 관통한 채 꽂혀 있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활을 맞은 남자 역시도 한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자 시뻘건 피가 울컥 솟구쳤다.

“저 계집애를 죽여!”

“안에 숨은 놈들도 전부 다 몰아내!”

손도끼와 나무 막대기를 든 사람들이 눈을 뒤집은 채 우르르 몰려들었다.

티리야는 재빨리 다른 화살 한 대를 시위에 걸고 쏘려 했지만,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챈 알린이 몸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뒤로 넘어질 뻔했다. 손에서 미끄러지려는 활을 단단히 잡은 티리야는 뱃속에서부터 화를 끌어 올린 듯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너야말로 이게 무슨 짓이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이것 놔! 저것들을 죽여버릴 거야!”

“어쨌든 이쪽으로 와! 싸우더라도 다 같이 싸워야지!”

알린은 버둥거리는 티리야를 질질 끌다시피 해 부족민들이 모인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모두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손에 쥔 채 병사들을 뚫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와서야 활이며 말을 모조리 팔아버린 것이 후회가 될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제는 싸울 수밖에 없어요. 모두들.”

알린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몇몇 사람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아이들은 몇몇의 여자들과 노인들이 보살피고 있을 테니, 마을 안쪽까지 들어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뒤엉킨 채 나뒹굴며 서로에게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는 사람들은 왠지 점점 그 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소식을 접한 다른 구역의 병사들까지 몰려오자 싸움은 더욱 심각해졌다.

근접전으로 접어들자 티리야도 활을 쏠 수 없었다. 그녀는 활과 화살통을 전부 다 내버린 채 단검을 빼 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초췌하고 검붉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깨를 노리고 휘둘러 오는 몽둥이를 피해 그 팔을 그어버리면서, 티리야는 알 수 없는 오한과 절망을 느꼈다.

‘뭘 위해서 이러는 걸까? 이자들의 정의는 뭘까?’

답이 없는 물음이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시간보다도 짧은 찰나, 티리야는 뒤엉켜 싸우는 사람들 틈에서 혼자 딴생각을 했다. 대체 이 싸움의 목적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이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잠깐의 틈을 누군가는 놓치지 않았다. 옆에서 누가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서 있던 티리야는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뜨끔한 통증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아, 윽……!”

“티리야!”

티리야의 무릎이 털썩 꺾였다. 바닥에는 순식간에 피가 흥건하게 고였다. 티리야의 다리에 박힌 것은 아주 짧은 칼이었다.

“흐흣, 흐, 이… 계집, 건방 떨더니 꼴이 아주 볼만…….”

숨을 헐떡이며 느물거리던 남자의 말이 뚝 멎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동자 두 개가 휘둥그렇게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무엇에 심하게 놀란 것 같기도 하고, 공포에 질린 것 같기도 한 기이한 표정이었다.

티리야는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통증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가 서서히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엎어진 남자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의 등에는 화살 한 대가 박혀 있었다. 정확히 급소를 노리고 쏜 화살이었다.

“아…….”

남자가 죽어 쓰러지자 근처에 있던 이들은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티리야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먼지와 땀으로 엉망이 된 채 해쓱해진 얼굴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르사크…….”

말 위에 앉은 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르사크의 손에는 티리야의 것보다 훨씬 길고, 훨씬 튼튼한 활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쓰러진 남자로부터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고는 화살 한 대를 더 꺼내어 시위에 걸었다. 활줄을 당겼다 놓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여느 사람들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핑,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난 순간, 쓰러진 토르갈 부족민을 발로 걷어차고 있던 남자가 외마디 숨넘어가는 소리를 지르고는 그대로 쓰러졌다.

“황후가 사람을 죽인다!”

도끼를 든 남자가 외쳤다. 아르사크는 그의 얼굴과 손이 지나치게 깨끗하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날을 잘 벼린 험악한 도끼날에도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숨어 싸움을 부추기는 무리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알아채고 나자 엇비슷한 무리로 보이는 자들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아르사크는 활을 든 채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녀가 땅에 발을 디디고 서자, 마을 안쪽까지 몰려갈 기세였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르사크는 부상을 입은 채 모여 있는 부족민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티리야의 상처를 살피는 동안, 그 누구도 아르사크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황후인 아르사크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어딘가에 황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에리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튈브리크에 도착했을 때, 에리히는 부관에게 보고를 들을 동안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했지만 아르사크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마차를 끌던 말 한 마리의 고삐를 풀던 아르사크는 사람들이 허둥지둥 뛰어가며 토르갈 부족민들과 난민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그 순간부터의 기억은 희미할 정도다. 아르사크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은 채 쏜살같이 말을 달렸다. 그 과정에서 좌판 몇 개가 부서지고 사람도 칠 뻔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알린, 티리야를 안으로 데려가.”

알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티리야의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칼끝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피가 많이 흘렀다.

“아르사크, 저도 여기에… 있을 거예요.”

“안 돼. 들어가서 상처를 치료해.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아르사크는 차가워진 티리야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알린과 다른 한 사람이 티리야를 양쪽에서 부축해 마을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땅 위에 점점이 이어진 핏자국을 내려다보던 아르사크는 증오와 공포에 질린 채 자신을 노려보는 자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대들은 제국의 시민으로서 부끄러운 짓을 했다.”

아르사크의 목소리는 크지도, 날카롭지도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 같았다.

입술을 실룩이며 주춤대는 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펴보던 아르사크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았다. 별달리 싸우려는 자세를 취한 것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에 압기가 되어 저마다 긴장한 채 숨을 씩씩거렸다.

“나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저들은 포악하고, 도리를 저버렸으므로 마땅한 처벌을 받은 것이다. 나의 결정에 감히 불만을 가진 자가 있다면 앞으로 나오라. 아직도 내 가족을 몰아내고 해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역시 앞으로 나오라.”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뒤쪽으로 물러나 있던 우드하우스 남작의 용병들 사이에서 서로 눈짓하는 자들이 있었다.

우드하우스는 홀드빅의 눈에 들어 수도 귀족의 반열에 들고자 혈안이 된 자였다. 이번 사건에 용병들을 개입시키면서, 그는 ‘기회가 된다면 황후를 죽여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지금이 그 기회라고 확신했다. 거대한 양날검을 든 남자와, 그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작은 남자가 시선을 교환했다.

키가 작은 남자는 허리춤에 두르고 있던 천을 풀어 막대에 감은 뒤, 주머니에서 조그만 병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 안에 든 것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천에 쏟았다.

물보다 묵직한 질감의 액체가 천을 흠뻑 적시자,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르사크에게로 쏠린 틈을 타 슬그머니 뒷길로 몸을 내뺐다. 그와 동시에 양날검을 든 남자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아르사크는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들고 있는 무기부터가 싸움에 단련된 사람이나 가질 법한 것이었거니와, 대역죄로 몰릴 법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태연했다. 분노에 눈이 멀어 날뛰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정의를 횡설수설 호소하지도 않았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누가 보낸 자냐?”

남자는 입술을 실룩일 뿐 대꾸가 없었다. 아르사크는 그를 향해 검을 겨누며 턱을 살짝 내렸다.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이들을 선동한 것인지 말해라.”

“말똥 냄새가 나는 것들과 뒹굴던 천한 여자에게 해줄 말은 없다.”

남자의 말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의외로 토르갈의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주먹을 움켜쥐며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뒤로 물러나 있던 시민들은 저마다 당황해서 웅성거렸다. 지금껏 자신들이 같은 처지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이제 와서 그것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남자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집과 가족을 잃은 난민도 아니었고, 튈브리크에서 살아온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저자는 누구란 말인가?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듣고 싸웠던 것이지?

대치하던 두 사람이 움직인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남자가 든 양날검은 그 너비만큼이나 무게가 상당한지, 한 번 휘두르자 마치 바위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엄청난 소리가 났다.

반면 아르사크가 들고 있는 검은 세검 수준을 간신히 면한 듯했다. 똑같은 양날검이었지만 길이도 너비도, 남자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모자랐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결코 밀리지 않았다. 자신보다 머리 두 개쯤은 큰 남자가 있는 힘을 다해 휘두르는 검을 유연하게 받아쳤다.

사람들은 치열하게 오가는 공방에 여러 가지 의미로 넋을 잃었다.

검의 무게 때문에 남자의 어깨가 앞으로 약간 숙어졌다. 아르사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의 목 앞을 노려 검을 찔러 넣었다. 남자는 반 발짝 물러나면서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모면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너를 죽이진 않을 테니 안심해라. 네 배후가 누군지 무척 궁금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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