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물건 창고로나 쓰일 법한 조그만 건물 안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들어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그리고 그들에게는 더 중요한 임무가 따로 있었다.
“위트레트의 용병들이 당신들인가?”
남자가 나직한 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위압적인 태도로 얼굴을 치켜들었다.
“준비는 모두 끝나 있겠지?”
“물론이다. 해야 할 일은 알고 있나?”
그는 등 뒤에 늘어선 자신의 일행을 한번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중을 적당히 부추겨 병사들과 싸움을 붙이라고 하더군. 우리 같은 바람잡이들은 그런 일에 전문이지.”
“싸움을 붙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동은 시작이 아니라 마무리가 중요하지. 끝장을 보기 전까지 내빼서는 안 돼.”
“이봐, 우리를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우리는 일개 어중이떠중이 용병들과는 다르시다 이 말이야. 우리는 우드하우스 남작을 모시는 병사들이다. 이런 행색을 했다고 해서 촌뜨기들과 똑같이 취급하면 내일부터는 어깨만으로 균형을 잡고 다녀야 할걸.”
그의 위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붉은 머리 남자는 이를 드러낸 채 야수처럼 웃고는 주머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냈다.
그러나 그것은 제국에서 통용되는 화폐와는 모양이 조금 달랐다. 금화의 앞면에는 홀드빅 자작가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자작님이 약속하신 선금이다.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그 금화를 우드하우스 남작에게 가져다주면 당신들도 후한 상을 받을 거야.”
“흥, 명당에서 구경이나 하시지.”
호주머니에 금화를 집어넣은 그가 일행을 돌아보며 눈짓을 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홀드빅 자작이 있는 곳이었다.
“자작님! 정말 이대로 얌전히 물러나야 한단 말인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렘든도 눈을 감지 못할 거라고요!”
“아무렴요! 우리 세금으로 먹고사는 놈들이 우리를 공격하다니, 이거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게 아닙니까!”
여기저기서 옳소,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토르갈 부족과 병사들로부터 사람들을 데려온 홀드빅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폐하의 명령을 거역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소. 그대들의 고통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나도 단장에게 병사들을 물리고 무의미한 대치를 그만두게 해 달라고 부탁도 했소만… 명령을 따를 뿐이라고 하니 달리 어쩔 수가 없었소.”
“그러면 억지로라도 물러나게 해야 해요! 그리고 렘든 아저씨를 죽인 자를 끌고 오라고 해야죠!”
니타니 역시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수해로 부모님을 잃은 그녀는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퀭해진 모습이었지만 서슬 퍼런 독기만은 형형하게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 고통이 판단력을 더욱 흐리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렘든과 다른 사람들이 한 짓이 결코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니타니 스스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너에게도 면목이 없구나. 그러나 폐하께서…….”
“황제는 더 이상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거야! 저 토르갈인지 뭔지를 감싸는 일에만 혈안이 되었다고!”
“맞아! 황후의 눈치만 보느라고 바쁜 거지! 튈브리크에서 장사로 먹고사는 사람들도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그래, 애초에 누가 저런 놈들에게 우리 땅에서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도 좋다고 허가한 거야? 그게 말이나 돼?”
병사들과의 대치에서 벗어나 한 풀 꺾여가던 사람들의 기세를 다시금 북돋우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아우성처럼 튀어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에, 손에는 무기 같은 것들을 들고 있었다.
로이폰에서 온 사람들은 그들이 튈브리크의 상인들 중 누군가일 것이라 생각했고, 반대로 튈브리크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로이폰에서 온 난민들이라고 생각했다. 양쪽 다 틀린 생각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홀드빅 자작 한 사람뿐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만만히 보여서는 안 돼.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가 조상 대대로 일군 땅을 다른 놈들에게 다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그래, 맞아! 저놈들이 황실을 등에 업고 날뛰면 그땐 어떡할 거야? 지금 뿌리를 뽑아버려야지!”
“이참에 겁쟁이 같은 단장 놈과 그 부하들에게도 전부 본때를 보여줘야 해!”
외치는 목소리가 다시금 커져갔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채 눈치만 보고 있던 사람들도 점점 그들의 말에 동화되기라도 한 것처럼 주먹을 쥔 채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듯 기세등등하게 날뛰었다.
니타니는 이 갑작스런 상황에 약간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도 역시 증오로 눈이 멀다시피 한 상태였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몇몇 남자들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누에를 치다 보면, 이따금 다른 누에들보다 월등히 몸이 큰 누에가 있게 마련이었다. 그런 녀석들은 먹이를 먹을 때도 보통의 누에들보다 훨씬 우악스럽고 거칠게 움직였다.
머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다른 누에들을 밀어내기도 하고, 작은 누에들이 꾸물거리고 있는 사이 잎사귀와 줄기를 탐욕스럽게 갉아대며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러다 보면 주변의 다른 누에들도 덩치 큰 누에에게 휘말려 공격적으로 변했다. 서로 뒤엉켜 싸우다가 죽는 누에도 가끔 있었다.
‘왜 지금 그런 일이 생각나는 거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미 흥분한 사람들은 니타니가 말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로이폰에서 함께 빠져나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튈브리크의 다른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군중의 수는 삽시간에 불어나 있었다. 출신지도, 상황도 다른 그들이 오로지 토르갈을 향한 증오만으로 날뛰는 광경은 기이하기까지 했다.
광기 어린 외침에 질린 니타니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는 찰나, 홀드빅 자작의 손이 니타니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 자… 자작님.”
“왜 그러지? 너는 저들과 함께 가지 않을 생각이냐?”
“그…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뭔가, 좀…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진 것 같아서. 마,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다가는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더… 많이 나올 게 분명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그 순간, 니타니는 지금껏 그가 입만 움직여 가면처럼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연민과 동정이 아닌, 차디찬 경멸과 오만함뿐이었다.
홀드빅이 말했다.
“옳은 일에는 약간의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
그때 사람들이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무기를 든 낯선 자들은 니타니가 아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람들을 계속해서 밖으로 내몰고 있었다.
“기다려요! 잠깐 기다려요!”
홀드빅의 손을 뿌리친 니타니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귀에 닿지 않았다.
병사들은 흥분한 군중의 모습이 모퉁이 너머로 나타나기도 전부터 바짝 긴장한 채 무장하고 있었다. 욕설이 섞인 고함과 발 구르는 소리가 너무나 뚜렷하게 들렸던 것이다. 단장은 입술을 깨물며 병사들의 대열을 정비했다.
그들은 군중 사이에 무기를 든 자들이 섞여 있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것도 평범한 몽둥이나 어디서 가져온 농기구 따위가 아닌, 전투를 위해 날을 벼린 칼이나 도끼 같은 것들이었다. 누가 그들에게 무기를 대어주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명령을 내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단장은 도끼를 내리치려는 남자를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병사들이 앞서 달려오던 군중에게 창을 들이밀며 나섰다.
이상하게도, 가장 좋은 무기를 들고 있는 자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흥분한 채 달려드는 이들은 모두 솥뚜껑이나 벽돌,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의 나뭇단에서 슬쩍 빼 온 것 같은 막대기 같은 것들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병사들은 결국 창날을 위로 세운 채 밀고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몸으로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밀어! 전부 밀어버려!”
“여긴 우리 땅이야! 네놈들은 모래밭으로나 꺼져버려!”
누군가 막대기를 휘두르자 병사 중 한 명이 머리를 맞고 뒤로 넘어졌다. 대열을 무너뜨리려는 이들과 어떻게든 길을 터주지 않으려는 병사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난투극이었다.
뒤늦게 달려온 니타니는 숨을 몰아쉬며 멍한 눈으로 그 아수라장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칼과 도끼를 쥔 낯선 자들이 사람들을 자꾸만 앞으로 내몰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그토록 분노하여 모두를 선동하던 태도에 비하면 싸우는 방식도 무척이나 소극적이었다.
“니타니! 여긴 위험해. 여기 있으면 안 돼!”
중년의 여자가 니타니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비명과 거친 소리들이 난무하고, 쓰러진 사람들도 곳곳에 있었다.
단장은 전령을 보내 다른 구역으로 지원을 요청하고자 했으나, 전령은 미처 말에 올라타지도 못한 채 군중에게 붙들려 발길질을 당했다.
“단장님! 대열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수가 너무 많습니다!”
무엇에 맞았는지 이마께가 터져 온 얼굴이 피 칠갑이 된 병사가 외쳤다. 그 순간 두 명의 병사가 더 쓰러졌고, 다른 병사들이 빈자리를 수습하기도 전에 몇몇의 남자들이 쓰러진 병사들을 짓밟고 타 넘어 우르르 몰려나갔다. 단장은 다급히 칼을 뽑아 들며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때였다.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죽여버릴 거야.”
갑자기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당장이라도 울타리를 뛰어넘을 기세로 달려 나갔던 사람들이 주춤대며 물러선 것이 이유였다.
피와 먼지, 목적 없는 증오로 이성을 잃었던 자들은 마을 입구에 버티고 선 티리야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키의 반만큼이나 되는 커다란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긴 채 단단히 버티고 서 있었다.
멀찌감치 서 있던 니타니의 눈에도 티리야의 모습은 이상할 정도로 분명하게 보였다. 활에 겨눠진 화살은 단 한 대뿐이었지만, 순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다 자신의 심장 부근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누군가 다리를 움찔거리려 하자, 티리야는 더욱더 팽팽하게 활줄을 당기며 이를 악물었다.
“분명히 말했다. 움직이면 죽여버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