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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12화 (112/191)

112화

‘이래서야 마치 홀드빅 자작이 튈브리크의 총독 같지 않나.’

단장은 굳은 얼굴로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던 불만과 증오를 자작은 손짓 한 번으로 누그러뜨린 것이다. 마치 황제가 행차하기라도 한 것처럼 얌전해진 군중의 반응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단지 그가 귀족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며칠 전 황제의 명령을 받고 실태 파악을 위해 들렀던 의전장관은 하마터면 썩은 과일을 맞을 뻔했고, 총독이나 부관이 나섰을 때에도 이들은 조롱과 분노로 일관했다. 제국이 자신들을 지켜줄 생각이 없다며 억지를 쓰기까지 했다.

“물론 사고였으리라 믿네. 그러나 그런 불성실한 설명으로는 저들을 납득시키기 힘들 걸세. 자네도 저자들의 표정이 보일 것이 아닌가? 저들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무서운 것이 없는 자들이네.”

홀드빅 자작의 목소리는 가까이에 선 단장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았다. 단장은 그가 자신이 하는 말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눈치챘다. 그가 사람들과 병사들을 이간질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이 일은 자작님과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저는 폐하와 부관님이 하시는 명령만을 따릅니다. 시민을 해친 병사는 제국법에 의해 합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며, 이 거주지를 지키고 치안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권한이 없는 일에서 손을 떼라는 말을 돌려서 한 셈이었다. 자작은 어딘지 모르게 음침해 보이는 미소를 띤 채 단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흡사 음모를 꾸미는 악당 같은 눈빛이었다. 자작이 말했다.

“글쎄… 단장, 자네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바는 아니네. 그러나 과연 자네의 힘만으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보는가?”

“총독께서 폐하와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러 수도로 가셨습니다. 합리적인 대안이 제시되리라 믿습니다.”

“튈브리크의 총독이 불려간 이유는 폐하께서 오늘 이 소란의 책임을 묻기 위함이지, 상의를 위해서가 아니네. 만약 이러한 소요가 계속된다면 부관은 물론이거니와 자네 역시도 처벌을 면치 못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네.”

“그러면 자작께서는 어떤 대안을 가지고 계십니까?”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단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자작이 말했다.

“내가 저들을 진정시킬 동안, 자네가 병사들을 물리게. 그래야만 저들도 기세가 수그러들겠지.”

단장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자작의 말을 들은 근처의 병사들 역시도 당황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부관님으로부터 이곳의 치안을 책임질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소요가 완전히 가시기 전까지 병사들을 물릴 수는 없습니다.”

“나도 자네가 짊어진 책임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니네. 그러나 모두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이대로 대치가 길어진들 누구에게 이득이 되겠는가? 차라리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한발 물러나면 오히려 사태는 진정될 걸세. 요란하게 짖는 개의 목이 빨리 쉬는 법이니까.”

홀드빅의 목소리는 마치 사탕발림으로 어린아이를 꾀는 것처럼 은근했다. 어지간한 자들이라면 쉽사리 넘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자신보다 더 강한 자들 밑에서 눈치를 보며 살아온 그는 마치 노련한 사기꾼처럼 회유와 수작에 능했다. 완고하게 버티던 단장도 어느 사이엔가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장은 저도 모르게 병사들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들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자작의 말이 완전히 일리가 없는 헛소리는 아니다. 처음부터 몰려와 시비를 걸던 로이폰 출신뿐만 아니라 튈브리크의 다른 시민들까지 몰려오게 된 데에는 렘든이라는 자의 죽음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병사들을 철수시키는 시늉을 하는 사이 저들이 진정해 주기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리라.

그러나 단장은 홀드빅의 말을 따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홀드빅 자작에게서 느껴지는 기이한 위화감 때문에 쉽사리 그의 의견에 수긍할 수 없었다. 단장이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양쪽의 시민들을 모두 보호하라 말씀하셨으니, 저는 그 명령만 따를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리옵건대, 자작께서 제게 독단으로 명령하시는 것은 월권에 해당함을 사려하시기 바랍니다.”

자작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는 마치 단장의 얼굴을 기억하기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오랫동안 지그시 바라보다 입술만 움직여 웃었다.

“참으로 충성스럽군. 자네가 이처럼 충실히 명령을 이행한 것을 폐하께서도 아신다면 기뻐하실 걸세.”

진심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자작은 단장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군중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자, 여러분. 이것은 무익한 싸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분명 여러분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시어 현명한 대안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잠시 흥분을 가라앉힙시다. 여러분들을 위해 적게나마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왔으니 그것을 나누어 드리겠소.”

* * *

에리히와 아르사크가 튈브리크로 출발하는 준비를 마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리히는 부상을 입은 아르사크를 위해 치료사가 동행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지만, 아르사크는 마음이 바빠 다친 다리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마차가 출발한 직후부터 아르사크는 연신 안절부절못하며 몇 번이고 창문을 열었다. 기마대의 병사들이 쓰는 말 중에서도 가장 튼튼하고 빠른 말 네 마리가 끄는 사륜마차의 속도는 무시무시할 정도였지만 아르사크가 느끼기에는 굼벵이보다도 느리게 느껴졌다.

“그렇게 내다본다고 마차에 날개가 달리는 것도 아닌데 좀 진정하지 그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내가 어떻게 진정하겠어요?”

“이 문제는 장기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감정적으로 대응했다가 사건이 커지기라도 하면 그대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지금 민심을 진정시키지 못한다면, 그대와 그대의 부족이 자치구에 정착했을 때는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해. 그러니 좀 더 신중할 수 있도록 머리를 좀 식혀.”

자치구. 아르사크는 마치 그런 단어를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것처럼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곧 한숨을 내쉬며 의자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에리히와 아르사크의 계약, 즉 아르사크가 카툴라의 황후 노릇을 하는 것은 부족이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을 만한 지역의 개간이 끝날 때까지다.

에리히는 2년의 기한을 제시했고, 아르사크는 자치구의 세금을 대폭 감면하고 자유를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 2년 동안 에리히의 황후 노릇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에리히의 말대로, 만약 이번 사태를 확실하게 매듭짓지 못한다면 자치구로 이주한 이후로도 부족민들의 삶은 고달프기만 할 것이 분명했다.

아르사크가 부족을 구하기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또 반대로 토르갈 부족민들이 아르사크를 위해 어떤 것을 버렸는지,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할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초조함으로 들떴던 머릿속이 비로소 조금 차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르사크는 빠르게 지나치는 바깥의 풍경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티리야와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 자신이 우선적으로 지켜야 하는 쪽은 정해져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르사크의 말에, 에리히는 비스듬히 기울인 머리를 그대로 둔 채 시선만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약 제가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망설이지 않고 내 부족을 선택할 겁니다.”

그러리라는 것을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에리히로서는 역시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일이 그 지경이 되도록 내가 얌전히 손 놓고 보고 있을 것 같나?”

“물론 폐하께서도 생각하시는 바가 있겠죠. 하지만…….”

“‘하지만’ 같은 건 없어. 그대는 토르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겠지. 나는 황제로서 신민을 돌볼 의무가 있다. 그리고 또한 제국의 황후를, 나의 반려자를 지킬 책임도 있어.”

바퀴에 돌부리가 걸렸는지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아르사크는 휘청거리지도 않은 채 몸을 지탱하고 앉아 에리히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눅눅한 여름 햇빛 아래, 호수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빛났다.

저 눈빛으로부터 차갑다는 느낌을 받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의 일일까.

아르사크는 갑작스럽게 에리히의 손을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왠지 오늘이 지나면 앞으로 영영 저 손끝에 닿아볼 일이 없을 것이라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단단하고 긴 손가락에 끼워진 검푸른 사파이어 반지를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반지와 똑같이 생긴 한 쌍의 다른 하나는 아르사크의 방 안 보석함에 들어 있었다.

그것을 끼고 왔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갑자기 아르사크의 가슴속을 세게 때렸다. 아르사크는 묵묵히 고개를 돌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85장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1)

붉은 머리의 남자는 튈브리크 인근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튈브리크 서쪽의 외곽 지역으로, 시내의 경비를 담당하는 병사들이 가장 순찰을 소홀히 하는 곳이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으로 들어가면 위험한 거래에 사용되는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눈빛이 불안정한 도박꾼이나 수상쩍은 행색을 한 자들, 돈만 받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런 곳은 대개 으슥한 시간대가 되어서야 음험하게 흥성거리게 마련이므로,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이런 시간에는 아무 길바닥에나 뻗어 있는 주정뱅이 몇몇이 있을 뿐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윽고 구석진 골목의 모퉁이에 붙은 건물의 작은 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바깥으로 나왔다. 이런 골목에는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모두 억센 체격을 가진 데다가 날이 잘 벼려진 병장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튈브리크에 거주하는 사람들치고 얼굴이 많이 그을린 편이어서, 얼핏 보기에는 마치 험악한 인상의 농사꾼 무리인 것 같기도 했다.

붉은 머리 남자는 자신이 기다리던 자들이 나타났음을 직감하고 슬그머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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