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루이제가 찻잔을 건네자, 카르반테는 습관대로 한 모금에 반절 정도를 훌쩍 마셨다. 혼자 일을 하면서 급하게 차를 마시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린 탓이다.
반이나 비어버린 찻잔을 본 루이제의 표정을 보고서야 그는 아차 싶은 마음에 어색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습관이 되어서.”
“대체 무슨 습관이 그래? 정말 귀족가의 아들인 것 맞아?”
“제 아버지는 귀족이시지만, 제 어머니는 신분이 매우 낮은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귀족들의 예법이나 관습을 열아홉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익혔습니다. 이제는 대체로 몸에 익은 편이지만, 몇몇의 것들은 버릇으로 굳어져 잘 고쳐지지 않더군요.”
“당신의 어머니는 뭘 하는 사람이었는데?”
루이제가 물었다. 그런 질문도 사실은 무척 실례되는 것이었지만, 상대 쪽에서 먼저 실례를 했으니 이쪽에서 굳이 새침하게 예의 차릴 것도 없다는 것이 루이제의 생각이었다. 그 정도가 서로 터무니없이 다르다는 생각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서자, 그것도 귀족의 서자라면 대체로 아버지가 귀족이고 어머니는 하류 계층의 여자일 확률이 높았다.
이따금 귀족과 귀족 사이의 불륜으로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서로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어느 한쪽의 가문에서 아이를 적자로 받아들여 키웠다.
혹은 반대로 어머니가 귀족이고 아버지가 하류 계층인 경우에는, 그 어머니가 작위를 갖고 있지 않은 이상에야 어머니의 친정에서 아이를 거둬 하인으로 부리거나, 친정 가문의 서자로 편입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때로는 어머니와 자식이 기록상으로는 남매가 되기도 하고, 혹은 촌수가 떨어진 친척이 되기도 하는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루이제는 카르반테의 어머니가 우드하우스 남작의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이거나, 아니면 민간의 여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도 신분이 더 낮은 사람, 이를테면 귀족과 매춘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의 신분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가문에 편입되기가 상당히 힘들기 때문이었다.
“제 어머니는 가희였습니다. 유랑 극단을 따라 곳곳을 떠도는 분이셨지요.”
다소 망설이는 듯하던 카르반테의 입에서 대답이 떨어졌을 때, 루이제는 놀란 기색을 숨기느라 안간힘을 썼다.
가희, 그것도 저택에 소속된 것이 아닌 유랑 극단의 가희라면 신분 계층의 거의 최하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여자가 낳은 아이를 서자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니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는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저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유랑 극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자랐죠. 그러다 다시 이 고장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그러니까 저의 친어머니는, 아버님을 찾아가 저의 양육을 책임지라고 따지셨죠.”
“그런 행동이…….”
“용납되지 못했지요. 어머니는 저택을 지키는 병사들을 뿌리치다 그만 난간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영지 전체에 소문이 퍼졌고, 아버님은 어쩔 수 없이 저를 거두시게 된 것입니다.”
“그럼… 어렸을 때 독이 든 열매를 먹었다는 건 무슨 이야기야?”
카르반테의 입술이 반듯하게 닫혔다. 그의 행동에 루이제는 문득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이야기를 듣거나 소설을 읽을 때, 이다음에 뭔가 비극적인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알아차릴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어머님… 제게는 의붓어머니가 되시는 그분은 저의 존재를 달갑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저를 없애버리려 하셨지요. 아직 덜 익어 독성이 가장 강할 때를 기다렸다가 그 씨앗을 빻아 과자를 구워 저에게 주셨습니다. 눅스 어르신이 증상의 원인을 눈치채지 못하셨더라면 저는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루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에는 뭐라고 대답을 하면 좋을지 아는 바가 없었다. 주어진 몇 개의 선택지 중에서 가장 그럴싸한 것만 고르면 되는 한담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식어가는 찻물을 바라보기만 하던 루이제는 제비꽃 잎사귀를 올려 예쁘장하게 장식한 케이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이 케이크는 어떻게 준비시킨 거야? 당신의 어머님의 요리사라면서?”
“몰래 불러냈습니다. 그때 제게 독이 든 과자를 만들어 주었던 바로 그 사람인데, 제가 죽을 고비를 넘긴 이후로는 왠지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더군요.”
“…갑자기 이 케이크를 먹고 싶지 않아졌어.”
루이제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하자 카르반테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여기에 독이 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먹어본 것도 아니면서.”
“식기가 전부 은으로 되어 있으니까요. 독이 들어있다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왠지 놀리는 것 같기도 한 말투에 루이제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그의 말대로 케이크와 쿠키, 어느 것에도 독은 없었다.
“아버님께서는 오늘 안으로 수도에 가실 예정이라 하셨습니다.”
카르반테가 말했다. 루이제는 두 잔째의 차를 잔에 채우며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당신의 아버지야 하루라도 빨리 수도로 가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을 테지.”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루이제 아가씨께서도 곧 수도로 돌아가게 되실지 모릅니다.”
쿠키를 반으로 가르던 루이제의 움직임이 문득 멈췄다. 접시 밖으로 흘러 떨어진 부스러기를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루이제는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곧 돌아가게 된다니?”
“아가씨의 부친이신 홀드빅 자작님께서, 황후 마마를 폐위시키고자 마마의 부족을 제국에서 추방하려 하시니까요.”
* * *
튈브리크의 상황은 한순간에 급박하게 돌아갔다. 병사의 실수로 로이폰 난민 중 한 사람이 죽자, 로이폰에서 온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튈브리크에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토르갈의 거주지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병사들이 창을 겨누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심하면 돌을 던지기도 했다.
“꺼져라! 우리 땅에서 당장 꺼져!”
“네놈들이 대체 뭔데 우리 땅에서, 우리 세금을 멋대로 받아쓰는 거야?”
“지키고 서 있는 놈들도 전부 한패야!”
“우리는 먹고살 것도 없는데, 외부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야?”
증오에 찬 외침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구름처럼 무겁게 커져갔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토르갈에서 온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리 많은 돈이 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토르갈 부족민들은 처음 정착할 무렵에만 자립에 필요한 생필품이나 약간의 돈을 제공받았고, 그 이후로는 자기들끼리 스스로 공예품을 만들어 팔거나 유목민들이 자주 먹는 음식을 파는 노점을 꾸리거나 하여 튈브리크 안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온갖 뜨내기들이 거침없이 드나들고, 수상한 불량품까지도 말만 잘하면 팔려나가는 이 거대한 상업 도시에서 장사를 한 것을 가지고 죄를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혐오로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에게 사실 같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부관님의 명령이다! 지금부터 소란을 일으키는 자들은 무조건 체포하겠다!”
병사들을 지휘하는 단장이 나타나 으름장을 놓았지만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사람들은 더욱더 큰소리로 야유하고 행패를 부렸다. 당장 밀고 들어가 전부 다 몰아내야 한다고 외치는 자들까지 나타나자, 병사들은 더욱더 긴장한 상태로 그들과 대치했다.
“이 땅은 우리 조상들의 땅이야! 어째서 개처럼 사막을 떠돌던 놈들에게 주느냔 말이야!”
“폐하께서 이들을 제국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셨다! 폐하의 뜻을 누가 감히 거역할 것인가!”
“흥, 폐하께서 하사하신 땅 좋아하네. 애초에 저따위 놈들과 한 패거리인 여자를 황후로 앉힌 것 자체가 문제라고!”
“어떤 놈이 겁 없이 황실을 모욕하는 것인가! 죽고 싶지 않으면 입을 다물어라!”
모여든 사람들과 단장의 소모적인 다툼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날아온 돌이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는 울타리에 거세게 부딪히자 병사들은 창을 앞세운 채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난투극이 벌어질 것 같은 날카로운 분위기가 사람들의 목덜미를 쭈뼛하게 잡아당겼다. 그때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일제히 움직인 시선들이 한점으로 모였다. 휘황찬란한 장식을 단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의 사람들을 헤치며 유유히 걸어 나왔다. 홀드빅 자작이었다.
84장 충돌 (6)
자작의 느닷없는 등장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분위기가 일순 허물어지듯 가라앉았다.
홀드빅은 씩씩거리는 군중과 긴장한 표정의 병사들을 느긋한 눈으로 돌아보고는 말했다.
“지휘 책임자가 누군가?”
단장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짧은 목례로 자작에게 예의를 갖추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제5구역의 치안 담당인 드렉셀입니다. 자작님께서 무슨 용무이십니까?”
“아, 구호물자를 가져오는 길이네만… 무슨 일이지? 여기는 유목민들이 사는 마을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와 튈브리크 총독 부관님의 명령을 받아, 질서 유지를 위해 저희가 이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흠… 듣자니, 자네 휘하의 병사 중 한 명이 사람을 해쳤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된 일이지?”
홀드빅의 입가에 알 수 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단장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표정을 굳혔다가 턱을 약간 치켜들고 자작을 바라보았다. 계급이 높은 기사단도 아니고, 치안 병사들을 지휘하는 그로서는 자작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사고였습니다.”
단장이 짤막하게 대답하자 자작의 뒤에 서 있던 군중으로부터 또 한 번 거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당장 병사들이 물러나도록 명령을 해달라는 요구에서부터, 단장을 벌해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작은 그 외침을 음악이라도 즐기듯 느긋하게 듣고 있다가 천천히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웅성거리던 군중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