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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10화 (110/191)

110화

당돌한 대꾸에 에리히는 문득 할 말을 잃고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렇게 물러졌는지를 잠깐 고민했다.

그 누구도 에리히에게 이런 식으로 대들고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감히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며 언성을 높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에리히 앞에서 단 한 번도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목숨을 위해 비굴해지지 않았으며 부귀를 탐내어 자신을 낮추고 교태를 부리지도 않았다.

아르사크는 언제나 아르사크였다. 누더기를 입은 변방의 족장일 때도, 모든 것이 낯선 황궁에서 후녀가 되어 홀로 떨어졌을 때도, 황후의 관을 머리에 쓴 이후로도 그녀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단단함이, 견고한 성 같은 고집과 기질이 자신의 마음 어딘가를 무르게 바꿔놓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에리히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그 변화를 얼마간 즐기게 되었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에리히는 아랫입술을 내민 채 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좋아, 허락하지. 단, 나와 함께 동행해야 해. 혼자 가는 건 용납할 수 없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험악해진 민심은 그대의 부족만을 노리고 있지 않다. 황실의 처사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을 테지. 그것을 먼저 해결해야 해.”

* * *

루이제는 오래간만에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 자유로운 오후를 만끽하고 있었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저택 곳곳에 숨은 하녀들이 루이제의 행동 하나, 하나를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녀들은 행여나 루이제의 심기를 거스를까 무척 두려워했기 때문에, 카르반테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가는 곳마다 무작정 따라붙지 않았다.

몸을 한 바퀴 돌려 주위를 살핀 루이제는 모처럼 기분 좋은 표정으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혼자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즐겁고 홀가분한 일이라고는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카르반테는 아침 일찍부터 자리를 비운 후 정오가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상태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드하우스 남작으로부터 호출이 있었다는 이야기만 겨우 얻어들을 수 있었다.

그는 저택을 나가면서 다른 하녀들에게 루이제를 똑바로 감시하라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고, 그마저도 모자라 루이제에게도 이런 말을 했다.

“어차피 이 부근에는 민가가 없습니다. 목동들도 여기까진 오지 않지요. 그러니 도망을 치신들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평소처럼 조용하고 무감동한 어조였다. 루이제 역시 코웃음을 치며 그의 말을 무시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관계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의사소통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번 말문을 열고 나자, 카르반테도 더 이상 예전처럼 루이제의 말을 깨끗하게 무시하기는 힘든 것 같았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루 종일 싫으나 좋으나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보고 있어야 하는 상대가 석상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것보다는 몇 마디 무뚝뚝한 대꾸라도 하는 것이 루이제에게는 훨씬 나았다.

카르반테는 말을 하게는 되었어도 농담이라는 것을 할 줄 몰랐고, 수다를 떨 줄도 몰랐다. 수도의 남자들이 으레 그러듯 여성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아부도 할 줄 몰랐다. 그야말로 목석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남자였다.

‘재미없는 남자. 생긴 것도 재미없으면서 말도 재미있게 할 줄 모르다니. 왜 수도로 올라가지 않고 이런 시골구석에 있는지 알 만도 해. 수도의 사교계에 나갔다간 대번에 웃음거리가 될걸.’

루이제는 울타리를 따라 무성히 자라난 장미 넝쿨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남에게 진심을 들키지 않도록 겹겹이 가면을 쓰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한 수도에서 카르반테 같은 남자는 하루도 제대로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는 너무 솔직하고 완고했다. 삶에서 재미나 행복이라는 것을 추구한 적이나 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어릴 때도 분명 그랬을 거야. 웃지도 울지도 않고 무표정했을걸? 그러니 집에서도 대접받지 못하고 이런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는 거지. 서자라도 비위만 잘 맞추면 적자들보다도 더 대우받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닌데.’

신랄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루이제는 자신의 평가에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 어떡하면 좋지?”

유달리 색이 진해 검붉게 보이는 장미를 어루만지며 루이제가 혼잣말을 했다. 이렇게 감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날은 앞으로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도망을 치려면 지금이었지만 루이제는 왠지 선뜻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민가라곤 없다는 카르반테의 말이 생각난 탓이기도 했지만, 여기서 도망쳐서 수도로 간다고 한들 아버지의 눈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시골이라면 모를까, 수도의 귀족들 중 루이제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수도에 나타나면 어디에 있든 간에 아버지에게 발각되고 말 것이 뻔했다.

“황궁으로도 갈 수 없을 테고…….”

아르사크라면 자신을 보호해 줄 수도 있겠지만 남의 눈에 띄지 않고 황궁까지 갈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편지를 보내볼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으나, 카르반테는 루이제가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꼼꼼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그의 서슬이 무서워서라도 하녀들 역시 루이제에게 매수되지 않았다. 루이제가 뭐라고 말을 걸려는 기색만 보여도 황급히 달아나기 일쑤였다.

후원의 오른쪽에서 불쑥 인기척이 났다. 하녀들과는 다른 묵직한 발소리만으로도 루이제는 그가 카르반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카르반테가 말했다.

“후원에 계신 줄 몰랐습니다.”

루이제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짐짓 장미 꽃잎을 쓰다듬는 시늉을 하다 한 장을 똑 떼어냈다.

“내가 갈 수 있을 만한 곳이 갑갑한 침실과 이곳 말고 또 있었던 모양이네?”

“방 안에 계시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뒤로 저택 주변을 먼저 수색하고 오는 길입니다.”

요컨대 루이제가 도망쳤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루이제는 그제야 발끈해서 카르반테를 돌아보며 손에 들고 있던 꽃잎을 바닥에 팽개쳤다. 빨갛고 얇은 잎사귀가 팔랑거리며 천천히 떨어진다.

“내가 범죄자라도 돼? 수색이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만,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불쾌해. 하루 종일 자리를 비운 건 당신이잖아? 그런데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도망자 취급을 하며 수색을 운운하다니 앞뒤가 맞지 않잖아?”

“아버님께서 부르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제 들어가시지요. 곧 소나기가 내릴 것 같군요.”

카르반테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맑고 쾌청하기만 하던 하늘이 남쪽에서부터 올라온 먹구름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루이제는 고집을 부리듯 가만히 서 있다가 카르반테의 반대쪽으로 몸을 홱 돌려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순식간에 컴컴하고 차가워진 날씨가 마치 자신의 처지인 것만 같아 신경질이 절로 났다.

83장 충돌 (5)

방 안으로 돌아온 루이제는 테이블 위에 차려진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오후 시간이 되면 으레 하녀가 차리곤 하는 다과상이었지만, 늘 엇비슷한 종류의 과자가 올라와 있던 것과 달리 오늘은 두 단으로 된 접시 트레이에 낯선 케이크와 쿠키 같은 것들이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었다.

수도에서 보았던 것에 비하면 장식도 빈약하고 독특하지도 않은 구성이었지만, 루이제는 마치 그런 것을 처음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색을 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이런 걸 다 준비했담?”

“마음에 드십니까?”

뜻밖에도, 뒤따라 방으로 들어온 카르반테가 물었다. 방글방글 웃으며 테이블 앞에 앉았던 루이제는 막 끓였는지 따뜻한 온기가 도는 티팟에 손끝을 대다가 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카르반테는 곤란한 질문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눈동자를 살짝 움직였다.

“아버님을 뵈러 갔을 때 어머님의 다과상을 준비하는 요리사를 잠시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수수한 과자만 매일 드시는 것이 질릴 것 같아서.”

그것은 그가 지금껏 했던 어떤 말보다 긴말이었다. 수도에서 화술이 뛰어나다는 사람들에 비하면 담백하다 못해 분위기가 썰렁해질 만큼 짧은 말이었지만, 워낙 말수가 적은 카르반테였기에 그 정도의 몇 마디도 마치 구구절절한 사연처럼 들렸다.

루이제는 여전히 놀란 표정인 그대로 그를 바라보다가 다과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르반테는 루이제의 오랜 침묵을 오해했다. 하녀들이 준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낸 요리사가 만든 것이라는 사실에 루이제가 불쾌감을 느꼈다고 생각한 것이다.

착잡한 표정을 지은 카르반테가 사죄하려는 찰나, 루이제는 티팟의 뚜껑을 열고 향기를 맡고는 말했다.

“당신도 이쪽으로 와서 앉아. 케이크를 먹으면서 차를 마시려면 두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

그의 대답을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루이제는 하녀를 불러 찻잔을 하나 더 가져오게 한 후, 카르반테가 뭐라고 말할 겨를도 없이 두 개의 잔을 채웠다.

차를 따르는 손동작은 능숙하면서도 얌전했다. 걸핏하면 소리를 지르고, 응석받이에 제멋대로인 아가씨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우아하기까지 해서 카르반테는 잠시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뭐 하고 있어? 와서 앉으라니까.”

마치 아랫것을 다루듯 하는 말투만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카르반테는 불쾌한 기색 없이 순순히 루이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루이제가 말했다.

“그 칼은 풀어서 보이지 않게 해. 실례잖아.”

카르반테는 칼집을 고정하고 있던 가죽끈을 허둥지둥 풀어냈다. 협탁 옆에 기대어 세우자 그럭저럭 루이제의 시야에서는 벗어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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