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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09화 (109/191)

109화

“튈브리크의 치안은 당분간 총독의 부관인 데보타에게 맡긴다. 테오도르, 너는 다시 튈브리크로 가서 상황이 전개되는 내용을 계속해서 내게 보고하라. 폭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출신에 관계없이 모두 잡아들이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경들도 지금은 물러가도록. 오후에 다시 부르겠다. 총독은 궁에 머물며 대기하라.”

“아… 알겠습니다.”

홀에 모였던 사람들이 차례로 흩어졌다. 피곤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에리히가 몸을 일으킨 순간, 시종장이 달려왔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걷는 것은 어땠나?”

“예? 아… 로즈안나 님이 마마를 부축하여 함께 왔습니다.”

“시종들에게 일러 간이 가마를 가져오라고 해라. 그리고 내 서재로 모셔오도록.”

시종장은 날렵하게 허리를 숙이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에리히의 미끈한 미간에 깊게 주름이 잡힌다. 그는 무거운 예장을 추스르며 서재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 * *

토르갈 부족민들은 아무도 집 안에 있지 않았다. 모두 다 바깥으로 나와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쌓아둔 채, 이글거리는 눈으로 마을 주변을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명령을 받은 경비병들이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으므로 아직까지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바깥에서 보내오는 혐오에 찬 눈길만으로도 사람들이 위협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저 사람들을 전부 잡아가지 않는 거냐구요!”

알린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경비병들에게 항의했지만, 경비병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잡아갈 수는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돌을 던지거나 물건을 부수거나 사람을 때리지 않는 이상, 체포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알린이 말했다.

“그래서 저대로 놔두겠다고요? 저놈들이 우리 마을 사람을 벌써 다치게 했다고!”

“그자는 이미 부관님의 명에 따라 감옥에 가두었소. 저자들은 그저 어슬렁거릴 뿐인데, 그런 자들까지 모두 체포할 수는 없소.”

“아, 그래요? 그럼 저 험악한 놈들이 우리 마을에 오지 못하도록 하려면 누가 또 다쳐야 하는 거로군요? 나는 어때요? 내가 저자들에게 몰매라도 맞으면 전부 다 잡아갈 겁니까? 그럼 그렇게 하죠!”

그리고 알린은 정말로 무턱대고 병사들을 지나쳐 마을 주변을 얼쩡거리는 사람들에게로 달려가려 했다. 티리야가 달려와 붙들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로 스스로 몰매라도 맞으러 뛰어들었을 것이다.

“안 돼, 알린! 그러면 안 된다고!”

“티리야, 놔! 이 사람들도 전부 똑같아. 저놈들이 아침부터 쉬지도 않고 우리 부족을 위협하고 있는데 잡아갈 수도 없다잖아!”

“그래도 안 돼! 나서서 얻어맞겠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저자들도 바보가 아니야. 경비대 앞에서 알린을 때리겠어? 그리고,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 싸울 사람이 필요해. 그렇지 않아도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모자란데, 알린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어떡하자는 거야!”

어슬렁거리던 남자들은 티리야와 알린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대놓고 비웃었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와 바닥에 침을 뱉는 소리, 음탕한 소리로 야유하는 말들이 날아들자 알린은 더욱 거친 몸짓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병사들이 알린을 막았다.

“저들에게 가까이 가지 마시오. 저러다 지치면 갈 테니.”

“지쳐? 지친다고요? 저자들을 봐요. 저게 지칠 것 같은 얼굴인가요? 저자들은 우리를 조롱하는 게 즐거운 거라고요. 그런데 지칠 리가 있어요?”

“폭력 사태가 일어나면 우리는 양쪽 모두를 구속할 수밖에 없소. 당신이 저들과 싸우게 된다면, 당신도 저들도 모두 감옥에 갇히게 된단 말이오. 알아듣겠소?”

병사는 위협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알린의 등을 마을 안쪽으로 떠밀었다.

맥이 빠진 알린이 휘청거리자 마을 밖을 서성이던 자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티리야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알린을 부축하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비열한 것들!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저 계집애가 뭐라고 쫑알거리는 거지?”

“제국어가 맞긴 한가? 영 알아듣질 못하겠는데. 설마 황후 마마도 폐하 앞에서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지, 황후 마마야 높으신 분인데 당연히 통역할 놈을 달고 다니시겠지.”

“아하, 그렇겠군. 그럼 그자가 두 번째 정부가 되려나?”

“어쩌면 벌써 재미란 재미는 다 보았는지도 모르지.”

왁자한 웃음이 한 번 더 터진다. 알린을 말리던 티리야조차도 더는 참지 못하고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을 주워 든 찰나, 병사들이 창날의 끝을 그들에게로 겨누며 말했다.

“황실을 모욕하는 자들은 제국법에 의해 엄하게 처벌된다는 것을 모르나? 그만들 떠들고 당장 돌아가.”

그러나 그들은 병사들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창끝이 겨누어지자 오히려 찔러보라는 듯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게 뭐야? 너희들은 제국의 국민들을 지키라고 있는 병사들이 아닌가? 근데 정작 지켜야 하는 사람은 안 지키고, 대체 누굴 지키고 있는 거야?”

“이런 놈들을 위해 그동안 세금을 바쳐야 했다니 기가 막히는군.”

“사막에서 모래나 파먹다 온 이런 놈들을 위해서 병사들까지 나서다니, 황제께서 황후 마마의 치마폭에서 아주 녹아내리신 모양인데?”

“닥치지 못해!”

병사 한 명이 벌컥 소리를 지르며 창을 휘둘렀다. 날붙이가 붙은 쪽은 뒤로 돌리며 자루로 후려쳤을 뿐이지만, 졸지에 당한 기습이어선지 남자는 억 소리를 내며 앞으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땅바닥에 이마를 찧었는데 그 순간 뻑 하는 소리가 났다.

“어? 이봐, 렘든.”

쓰러진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모였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창 자루를 휘두른 병사, 그리고 돌을 움켜쥔 채 지켜보고 서 있던 티리야조차도 순간 당황했다.

“야, 렘든. 인마. 장난 그만 치고 일어…….”

누군가의 발이 쓰러진 남자의 몸을 툭 걷어찼다. 그러자 땅에 달라붙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던 머리가 움찔 들리며 시뻘건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으악!”

“사, 사람이 죽었다! 렘든이 죽었어!”

“경비대가 렘든을 죽였다!”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고, 그 비명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을 주변을 포위하듯이 서 있던 경비병들의 얼굴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일그러졌다.

82장 충돌 (4)

가마에 실려 서재로 온 아르사크는 표정이 무척 좋지 않았다. 아마도 타기 싫다는 것을 시종들이 억지로 싣다시피 한 모양이다.

내리는 것을 돕기 위해 에리히가 손을 내밀었지만, 아르사크는 절뚝거리면서도 기어이 자기 발로 바닥을 디디고 섰다. 허공에 내민 채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 손을 거두며 에리히가 말했다.

“쓸데없는 고집은.”

아르사크는 통증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다리로 몸을 억지로 지지하고 선 채 에리히를 바라보며 말했다.

“튈브리크로 가야겠어요.”

“지금 그대가 거기에 가봐야 역효과만 날 뿐이라는 걸 모르겠나?”

“그렇다고 여기에 죽은 듯이 틀어박혀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요? 내가 데려온 사람들입니다. 나 때문에 이곳으로 온 내 부족이라고요. 내가 가서 그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보호하죠? 폐하께서?”

“그대는 지금 이 나라의 황후야. 토르갈의 족장이 아니라.”

에리히를 설득하는 일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이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이 문제에서 절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토르갈의 족장이 아니다’라는 에리히의 말에도 예전처럼 날카롭게 분노하지 않았다.

이름이야 무엇이건 상관없었다. 토르갈의 족장이면 어떻고, 카툴라의 황후라면 어떻고, 또는 이름도 모를 어느 영지의 영주라면 어떻단 말인가?

어디에 있든, 무엇으로 불리든 자신의 이름은 아르사크 하르슈였고,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상 아르사크에게는 부족을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황후든, 족장이든, 그런 것은 상관없어요. 나는 그들에게 약속했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 계속 부족을 지킬 것이라고요. 폐하께서 하신 약속의 무게가 다른 이들의 약속과 다르듯, 부족을 책임질 의무가 있는 저의 약속 또한 다른 이들의 약속과는 다릅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만약 그녀를 만나지 않았던 시절의 에리히였더라면 그런 말을 듣고서도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황제의 머리 위에 얹힌 관보다 무거운 관은 없다, 일개 유목민들의 부족을 이끄는 족장이 제국의 황제와 같이 비교될 일은 결코 없다고 대답했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에리히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적어도 아르사크에게만큼은 그랬다. 그는 아르사크가 지도자로서 얼마나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에리히보다 훨씬 더 어렸던 때부터, 아르사크는 이미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자리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어젯밤에도 말했다시피, 그곳에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다리가 나은 다음의 이야기야.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만이라도 내 말을 들을 수는 없는 건가?”

“난 가야 해요. 그러니 폐하께서 선택하시지요. 제가 튈브리크로 가는 것을 허락하셔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마차를 내어주시든지, 아니면 끝끝내 말리셔서 또 한밤중에 몰래 말을 타고 나가게 하시든지 말이에요.”

다리를 다친 것도 루이제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느라 황궁을 빠져나갔다가 생긴 일이다. 물론 에리히야 그 속사정까지는 몰랐지만, 아르사크의 말이 그를 무척 자극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에리히는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느라 입술을 깨물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미간을 좁혔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후가 야밤에 황궁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나 하는 건가? 당장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처지가 돼도 변명 한마디 못 할 일이야.”

“이젠 먹히지도 않을 말로 협박할 생각이라면 그만두시죠. 폐하께서 절 가둬놓는다고 해서 빠져나가지 못할 제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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