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뭐라고요? 내 부족민들이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누가 간다는 건가요?”
“가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아. 다만 오늘 하룻밤만이다. 약효가 돌고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될 때까지만이라도 얌전히 있어 달라는 말이다.”
“이까짓 상처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대에게는 그렇겠지. 하지만 내겐 아니야.”
다시 에리히의 손을 뿌리치려던 아르사크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뭔가 이상한 광경을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미간은 찡그리고 눈은 둥그렇게 뜬 채 에리히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건…….”
말끝을 흐린 아르사크의 몸에서 갑작스럽게 기운이 빠졌다. 수면제가 들어간 진통제가 드디어 효과를 내는 모양이었다.
머리가 아픈 사람처럼 눈을 찡그리며 이마를 짚은 아르사크는 자꾸만 몽롱해지는 것 같은 시야를 바로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눈꺼풀은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할 뿐이었다.
“잠을 좀 자도록 해. 여기 있을 테니까.”
이불을 끌어당기는 에리히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러나 눈을 감기도 전에 의식부터 가물가물 멀어진 아르사크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잠들었던 아르사크가 깨어난 것은 오전이 다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미 에리히는 자리를 비운 후였고, 로즈안나가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천을 갈아붙이고 있을 때 잠에서 깬 아르사크는 환하게 밝아진 방 안을 잠시 어색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너무 혼곤하게 잔 탓인지 시간 감각이 이상했던 것이다.
“아르사크 님! 일어나셨어요?”
“…로즈? 잠깐만… 나 좀 일으켜줘.”
“안 돼요. 상처의 천을 다 갈 때까지만 잠깐 기다리세요.”
로즈안나는 약을 묻힌 조그만 천으로 상처 주변의 딱지를 살살 문질렀다. 따끔거리는 감각에 아르사크는 미간을 찡그리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상처를 쳐다보았다.
발목 근처에서부터 무릎 바로 아래까지, 마치 실뱀이 기어간 것처럼 반듯하지 않은 상처가 길게 나 있었다. 아직 살이 다 붙지 않아 아직도 조금씩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많이 아프시죠? 죄송해요.”
아르사크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오자 로즈안나가 말했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로즈. 그런 말 하지 마.”
“아뇨, 제 잘못이에요. 제가 아르사크 님을 어떻게든 말렸더라면… 아니, 몸을 지킬 만한 무기라도 가져가시라고 말씀드렸어야 하는 건데…….”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너도, 나도 생각하지 못했어.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할 필요 없어.”
로즈안나는 조그맣게 훌쩍이는 소리를 내면서 아르사크의 상처 위에 약을 바른 뒤 깨끗한 천으로 단단히 감았다. 그제야 조금 거동이 편해진 아르사크는 어깨와 팔로 상체를 지탱하며 몸을 일으켰다.
“로즈,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지?”
“폐하께선 의전장관과 귀족들을 만나러 서쪽 외궁의 홀로 가셨습니다. 왜 그러세요?”
“폐하께 가야겠다. 지금 당장.”
로즈안나는 아르사크가 갑자기 서두르는 이유를 짐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새벽부터 부산하게 서두르는 테오도르와 기사단의 일원들 때문에 잠을 설친 참이었다.
황제 직속인 그들이 자리를 비우고 움직이는 것은 황제의 급한 명령이 있을 때만이었다. 그리고 지금 황궁을 그만큼 급박하게 움직일 만한 일이란 어제 로즈안나도 들었던, 튈브리크에서 일어난 주민 소요뿐이었다.
“아르사크 님, 지금 당장은 움직이기 힘드세요. 적어도 약이 좀 스며들고 난 이후에…….”
“안 돼. 지금 가야 해. 얼른, 뭔가 짚을 것을 좀 가져다줘.”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아르사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으리라 판단한 로즈안나는 얼른 아르사크의 팔과 어깨를 밀듯이 지탱하며 그녀를 부축했다. 다소 절뚝거려야 했지만 그래도 걸을 만했다.
아르사크는 상처가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다리에서 느껴지는 아픔보다도, 지금쯤 부족민들이 처했을 상황을 생각하느라 복잡해진 머리가 아르사크를 괴롭게 했다.
81장 충돌 (3)
“경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에리히의 말에 단상 아래에 서 있던 귀족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난처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은 오늘 아침 잠옷 바람으로 황궁까지 급하게 불려온 튈브리크의 총독이었다. 부관에게 구역의 통제를 잠시 맡긴다는 전갈만 겨우 휘갈겨 쓰고는, 그야말로 눈썹이 다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쏜살같이 말을 달려 황궁에 도착했던 것이다.
게다가 왜인지는 몰라도—그는 아직 아르사크에게 벌어진 일을 몰랐으므로—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하면 그대로 목을 쓸어버릴 기세인 살기등등한 에리히 앞에서 옷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채 간밤에 일어난 일을 보고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보고를 다 들은 에리히의 첫마디가 저것이었다.
“‘그간 토르갈 부족민들에 대한 황궁의 편파적인 원조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고? 방금 내가 들은 말이 맞나? 말해보라.”
“그, 저, 폐하…….”
“묻는 말에 대답해.”
총독은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여전히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런 때에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오히려 더 큰 일이 생긴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결국 총독은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 그렇습니다, 폐하.”
“그대의 일이 뭐지?”
에리히의 질문에, 튈브리크의 총독은 잠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화살처럼 똑바로 내리꽂히는 에리히의 눈빛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총독은 죄를 저지르고 끌려온 사람처럼 시선을 초조하게 움직이며 말했다.
“저의… 일은, 튈브리크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폐하.”
“일을 제대로 한 것이 맞나?”
“폐하, 이번 일은…….”
“한 번만 더 묻는 말 이외의 대답을 하면 족쇄를 채워 감옥 밑바닥에 처박아 버릴 것이다. 대답하라. 일을 제대로 했나?”
대답을 하나 변명을 하나 어차피 감옥에 가게 될 것은 정해진 일임을 총독은 그제야 깨달았다.
토르갈 부족민과 튈브리크의 다른 주민들 사이에 일어난 일은 분명 예견되어 있었다.
로이폰의 난민들이 자리를 잡기 전에도, 튈브리크 부근의 상인이나 주민들이 토르갈 부족민들을 차별하여 물건을 팔려 하지 않거나, 좌판 앞을 지나가며 시비를 걸거나 하는 일들이 경비대에 의해 종종 보고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총독은 그런 충돌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규모 상권이 발달한 튈브리크는 정착하여 사는 사람들보다 뜨내기처럼 오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대상(大商)들이 데리고 다니는 호위나 용병이 많은 만큼 싸움박질도 자주 일어나곤 했다.
대개 그런 일들은 경비대원들의 선에서 처리되곤 했으며, 총독인 자신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크게 말썽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 지금의 자신뿐만 아니라 이전에 총독으로 있었던 다른 귀족들 역시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게다가 한쪽은 제국의 시민, 다른 한쪽은 황후의 비호를 받긴 하지만 외국인들이 아닌가. 어느 쪽을 편들어도 자신에게는 손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로이폰의 난민들이 험악한 태도를 보이며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심지어는 마을 근처를 순찰하는 경비병을 보고서도 노골적으로 침 뱉는 시늉을 하는 등, 문제가 많다는 것 역시도 일찌감치 보고된 일이었다.
총독은 황궁으로부터 지원이 내려오면 그들이 일으키는 여러 가지 문제들도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황궁에서 얼마간의 식량과 옷감을 실은 수레가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은 더욱더 커졌다.
언젠가 한 번은 총독이 머무는 성 근처까지 사람들이 몰려와 소리를 지르거나 유리창을 향해 돌을 던져댄 적도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당장에 잡아다 감옥에 가뒀을 테지만, 하루아침에 고향과 가족을 잃은 난민들을 동정하는 이들도 많았으므로 총독은 그깟 유리창 몇 장에 인심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나씩, 둘씩, 사소하게 쌓인 일들이 이런 방식으로 터진 것이다. 총독은 생기가 팍 꺼져버린 기죽은 얼굴을 한 채, 감히 에리히를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총독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폐하, 한 번만 더 저에게 기회를…….”
“기회?”
에리히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천장까지 닿을 듯이 낭랑하게 울렸다.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닌데, 그의 목소리에서 급박한 분노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이윽고 에리히가 천천히 단상에서 내려왔다. 허리를 굽힌 총독은 자신의 바로 앞에 황제가 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금 기회라고 했나? 내가 경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왜지?”
“폐, 폐하…….”
“경은 이미 수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 머리가 달렸다면 생각이라는 걸 해봐. 왜 그들의 전횡을 황궁에 보고하지 않았지? 왜 경이 보살펴야 하는 지역에서 끊임없이 일어난 분쟁을 외면했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총독은 입을 열지 못하고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침묵을 지켰다. 에리히가 다시 말했다.
“토르갈 부족민들의 거처는 황실에서 직접 마련한 것이다. 그들을 거기에 살도록 한 것은 다름 아닌 황제인 나였다. 그런데 그들이 부당한 차별을 받도록 방치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거겠나?”
“폐하! 저, 저는 정말로… 그저, 사소한… 사소한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가장 가혹한 전쟁도 사소한 다툼에서 발생한다.”
싸늘한 말을 내뱉은 에리히는 몸을 돌려 다시 단상으로 올라갔다.
아직 총독을 해임하거나 가두라는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에리히가 그를 몰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귀족들은 저마다 황제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