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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07화 (107/191)

107화

“뭐라고 했느냐?”

“마마께서… 그자에게 더 중요한 것을 알아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죽이시면 안 됩니다.”

“일단 죽인 다음에 시체가 말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확인해 볼 참이다만.”

로즈안나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토록 화가 난 에리히를 자신이 말릴 수 있을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아르사크의 말에 따르면 그 남자는 분명 홀드빅 자작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오늘 죽여버리면 애써 찾은 단서를 놓치게 된다.

“폐하, 마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남자는…….”

“폐하!”

에리히의 서늘한 시선이 로즈안나의 뒤쪽을 향했다. 뒤따라 고개를 돌린 로즈안나는 가쁜 숨을 다급하게 내쉬는 테오도르를 보자마자 이유도 없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뭐지? 테오도르.”

“폐하, 튈브리크의 총독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테오도르는 돌돌 말린 작은 종이뭉치를 에리히에게 건넸다. 로즈안나는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심각한 빛을 띤 채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로이폰의 난민들과 튈브리크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토르갈 부족의 거주지를 포위하고 소요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폭력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토르갈 거주지 주위에 있는 경비대와 대치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80장 충돌 (2)

아르사크의 상처는 다행히 깊거나 심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서 울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로즈안나를 진정시키느라 치료사가 진땀을 뺐다.

피를 꽤 흘리긴 했지만 안정되었으며, 흉터는 약초를 찧어 만든 연고를 바르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로즈안나는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한 채 아르사크의 손을 꼭 잡았다.

복도는 어수선했다. 한밤중에 갑자기 다쳐서 돌아온 황후와, 초주검이 된 채 끌려온 남자의 정체에 대해 시녀들까지도 수군거리고 있었다.

로즈안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흐트러진 머리를 단정하게 다시 묶었다. 그런 다음 모여서 소곤거리는 시녀들 앞에서 일부러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감히 황후 마마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자가 있으면 당장 궁 밖으로 내쫓을 것이다.”

엄격한 목소리에 시녀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꼭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로즈안나는 꼭 필요한 인원만을 남긴 채 나머지는 모두 방으로 돌려보냈다. 아르사크는 잔잔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에리히는 결국 그 남자를 심문하러 가지 못했다. 테오도르가 전한 급보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로즈안나 역시 그 내용을 들었으므로 아무래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르사크가 많이 다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깨어났을 때 아르사크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잠이 들었나?”

미열이 오른 아르사크의 이마를 물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을 때였다. 로즈안나는 기척도 없이 불쑥 들어온 에리히를 보며 황급히 몸을 일으켜 허리를 숙였다.

분노로 타버릴 것 같던 아까의 기색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지만, 그 대신 그는 잠깐 사이에 몇 년은 늙어버린 사람처럼 피곤한 눈빛이었다.

에리히는 아르사크가 어떻냐는 질문도 하지 않고, 아르사크가 궁을 나가는 것을 말리지 못한 로즈안나를 책망하지도 않았다. 다만 천을 친친 감아놓은 다리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폐하, 치료사가 말하길, 황후 마마의 상처가 깊지 않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로즈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에리히는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잠든 아르사크의 이마를 손끝으로 천천히 어루만지다 고개를 들었다.

“나가봐라. 황후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 너도 가서 좀 쉬도록 해라.”

“…하지만, 폐하…….”

“너는? 다치지 않았나?”

에리히가 물었다. 로즈안나는 그만 복잡한 기분에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애써 짓누르고 있던, 혹은 너무 당황해 미처 알아채지도 못하고 있던 두려움이 한꺼번에 터진 탓이다. 그러나 로즈안나는 빨개진 코끝을 손끝으로 한번 누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괜찮습니다. 마마께서 제가 다치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가서 쉬어라. 놀랐을 테니 따뜻한 차라도 마시고.”

“알겠습니다. 폐하께서도 무리하지 마십시오.”

로즈안나가 나가고 나자 방에는 잠든 아르사크와 에리히만이 남았다. 에리히는 약간 창백해진 것 같은 아르사크의 얼굴에서부터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치료를 하느라 무릎 위까지 걷어놓은 치맛자락에 핏자국이 아직 얼룩덜룩했다. 지혈을 위해 감아놓은 천 위로 떨리는 손끝을 가져가려던 에리히는 작은 헛기침 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잠에서 깬 아르사크가 눈가를 찡그린 채 에리히를 보고 있었다.

“누구… 폐하?”

“…눈을 다쳤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상체를 뻣뻣이 세운 에리히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사크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키려다가, 통증이 느껴지는지 손끝을 움츠리며 숨을 삼켰다. 에리히는 얼른 손을 뻗어 아르사크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누워있어. 막 지혈이 끝난 참이니까.”

“그자는… 그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설마, 벌써 죽인 건 아니죠?”

“어디를 먼저 찢어버릴까 고민하느라 아직은 숨을 붙여뒀지.”

“다행이다. 또 성질부리느라 죽여버린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말이에요.”

아르사크의 말에 에리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멋대로 설치고 다니다 다리가 잘릴 뻔한 주제에 말하는 건 여전히 청산유수로군.”

“과장하지 마세요. 살짝 긁힌 거지.”

“살짝 긁혀?”

미처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에리히에게서 격앙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르사크는 그제야 아차 싶은 표정으로 턱을 약간 움츠렸으나, 에리히의 표정은 이미 무시무시하게 변해 있었다.

“발목에서부터 무릎까지 상처가 났어.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알긴 하나? 그런데 뭐? 살짝 긁혀? 이 정도였기에 망정이지, 상처가 더 깊었더라면 어떡할 뻔했어? 정말로 다리를 잘라야 했다면 목발이라도 짚고 너의 부족을 이끌었을 건가? 놈이 노린 게 다리가 아니었으면? 눈이라도 멀었으면 어떡할 생각이었지? 심장을 베었으면 어쩔 뻔했냐고!”

점점 목소리를 높이던 에리히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협탁 위를 손바닥으로 쾅 내리쳤다. 주둥이가 길쭉한 장식용 꽃병이 휘청거리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르사크는 가만히 에리히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앞머리는 다 흐트러졌고, 볼은 상기되었고, 눈가가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꽉 다문 잇새로 가쁜 호흡이 드나들고, 입술과 뺨이 실룩이듯 부풀었다 꺼진다.

“미안해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에리히는 갑자기 몸을 홱 일으키더니 고개를 돌렸다.

“사과하지 마. 사과받자고 한 말이 아니니까.”

“그럼 왜 화를 내시죠?”

“…….”

숨을 씨근거릴 때마다 따라서 들썩이던 에리히의 어깨가 서서히 처졌다. 아르사크는 그의 그늘진 표정을 보고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다친 것 이외에도 무언가 사건이 생긴 것이다.

설마, 틸이 죽었나? 그녀의 오빠와 아내도?

“무슨 일이 있으시군요. 그렇죠?”

에리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이 곧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아르사크는 다급한 태도로 이불을 걷으며 통증 때문에 가누기 힘든 상체를 억지로 일으켰다. 베인 다리에서부터 욱신거리고 날카로운 감각이 일어나 온몸을 쿡쿡 쑤시며 날뛰었다.

“폐하, 말해보세요.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설마… 제가 만난 그 사람들이 죽기라도 했나요?”

“아니. 그런 소식은 없어.”

“그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이쪽 좀 봐요! 정말, 답답해 죽겠네!”

아르사크가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에리히는 그제야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에리히는 아르사크가 누운 자리 옆에 걸터앉아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튈브리크 인근에 문제가 생겼다.”

“…튈브리크에 문제가 생기다뇨? 튈브리크라면…….”

아르사크의 눈이 서서히 커진다. 에리히는 미간을 찡그린 채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로이폰의 난민들과 마을 주민들이 그대의 부족민들이 사는 거주지 근처에서 소요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조금 전 황궁에 도착했다. 사태가… 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어.”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아르사크의 어깨를 에리히가 강하게 눌렀다. 아르사크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버둥거리다 그의 손목을 있는 힘껏 붙잡으며 목청을 높였다.

“놔요!”

“그 다리로 어딜 가겠다는 거야? 말도 탈 수 없으면서!”

“탈 수 있는지 없는지는 타봐야 알죠. 상관없어요. 탈 수 있으니 놔요. 놓으라고요!”

“절대로 안 돼. 상처가 다 낫기 전까지는 이 방, 이 침대에서 꼼짝도 못 할 줄 알아.”

아르사크는 불이 튀는 것처럼 사나운 눈으로 에리히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에리히 역시 물러날 생각은 한 치도 없었다.

테오도르가 가져온 전갈은 약식이어서 세세한 정황까지는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총독의 말에 따르면 소요는 오늘 밤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닌 듯싶었다. 며칠 동안 크고 작은 사건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여태 보고가 올라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아르사크를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테오도르를 보냈다. 내일 해가 뜰 때쯤에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겠지. 그러니 오늘 밤은 얌전히 자도록 해. 지금 당장 그곳으로 달려간다고 해서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 것 같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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