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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06화 (106/191)

106화

79장 충돌 (1)

“아르사크 님, 대체 어딜 가시는 거예요?”

로즈안나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아르사크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뒤쪽의 인기척을 살폈다. 아직까지 따라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둘을 쫓아온 것이 분명하다. 아르사크는 머릿속으로 그럴 만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시시한 강도일 리 없어.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옷을 걸친 것도 아니고… 납치? 그러면 굳이 두 사람을 노리지 않겠지. 여자 둘이라 방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르사크 님…….”

“조용히 해, 로즈. 우리를 쫓아오는 자가 있어.”

“네? 쫓, 쫓아오는… 사람이라니요?”

“돌아보지 마. 시시한 납치범 정도면 다행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반드시 산 채로 잡아야 해.”

납치도 시시한 일은 아니지만, 로즈안나는 아르사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곧장 알아들었다.

단순한 납치를 노리고 쫓아오는 것이라면 굳이 붙잡거나 할 필요는 없다. 단지 겁만 좀 줘서—아르사크가— 쫓아내도 될 일이다.

하지만 그의 목적이 납치가 아닌 다른 것이라면, 예컨대 아르사크와 로즈안나가 왜 ‘틸의 집에서 나왔느냐’를 알고 싶은 것이라면…….

“설마… 자작이 보낸 사람일까요?”

로즈안나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르사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확률이 높지. 아마 오늘 밤에 그 여자아이와 가족을 해치려고 했을 거야. 그런데 우리가 거기서 나왔으니, 우리를 먼저 처리하고 싶은 거겠지. 무슨 말을 들었을지 모르니까.”

“그러면…….”

“내가 등을 밀면 돌아보지 말고 왼쪽 좁은 골목으로 뛰어. 알겠지? 그리고 경비대를 찾아서 불러와. 저자를 궁으로 데리고 가야 하니까.”

등 위로 아르사크의 손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지자 로즈안나는 바짝 긴장해 뒤꿈치까지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기분 탓인지 저벅저벅 쫓아오는 이들의 수가 늘어나는 듯하고, 심장이 귓속에서 뛰는 것처럼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지금이야, 로즈.”

아르사크의 손바닥이 로즈안나를 가볍게 민 순간, 로즈안나는 치맛자락을 휘감듯이 붙든 채 아르사크가 말한 골목으로 쏜살같이 뛰었다. 그와 동시에 지척까지 다가와 있던 그림자의 속도도 빨라졌다.

그를 유인하기 위해 로즈안나와 함께 뛰어가는 척하던 아르사크는 억센 손아귀가 베일을 잡아채기 직전에 몸을 휙 돌려 그의 손목을 잡아채 반대로 꺾었다. 그리고 뒤쪽으로 약간 물렸던 한쪽 발을 박차듯이 들어 올려 옆구리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억!”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저만치 나가떨어진 남자는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나뭇짐에 부딪혔다. 그러자마자 아르사크는 그의 품에서 뭔가 번쩍이는 것이 휙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단검이나 그 비슷한 무기임에 틀림없었다.

아르사크는 다급하게 베일을 끌어내려 벗어버린 뒤 어느 집 벽 옆에 놓여 있던 빈 우유통을 들어 남자에게로 던졌다. 퍽! 하는 소리가 났지만 안타깝게도 우유통은 남자에게서 빗나가 돌벽에 맞고 부서졌다.

“길 가는 여자를 습격하다니, 신사라고는 못 하겠네.”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러나 길게 떠들 시간은 없었다.

남자는 얼굴을 거의 다 가리고 있었다. 그가 아르사크를 알아보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몸을 추스른 그는 짧게 쥔 단검을 휘두르며 아르사크에게로 곧장 달려들었다. 휙, 스쳐 지나가는 칼끝에서는 분명한 살기가 느껴졌다. 이마 근처에서 서늘한 오한이 느껴진 순간, 아르사크는 다시 한번 검을 꼬나쥔 채 달려드는 남자를 피해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이 거추장스럽게 발목에 걸렸다. 아르사크는 주변을 눈짓으로 슬쩍 살핀 뒤 남자의 손이 옷자락을 붙잡기 전에 몸을 뒤로 빼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나?”

남자의 목소리는 어딘지 카랑카랑하지만 음험한 데가 있었다. 아르사크는 대꾸하지 않고 나뭇짐이 흩어진 곳으로 달려가 어린애 팔뚝만 한 길이의 막대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 순간 남자의 얼굴을 덮은 복면이 크게 씰룩였다. 웃음을 터뜨린 것 같았다.

“고작 그런 걸 쥔다고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남자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뭉뚝한 막대를 움켜쥔 채 자세를 잡았다.

“혓바닥이 긴 놈은 명줄이 짧다고 어른들이 그러셨지.”

아르사크는 망설이지 않았다. 막대기의 길이와 굵기를 촉감으로 감지하자마자 그대로 남자에게 달려들어 검을 쥔 어깨를 노려 후려쳤다.

남자는 단검 이외에 다른 무기는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다. 한 번은 막대와 검이 마주 부딪쳤으나 내뻗었던 팔을 잡아 빼는 것은 아르사크가 훨씬 더 빨랐다.

검날이 나무에 박혀 으드득 소리가 난 순간, 아르사크는 자세를 고치지도 않은 채 어깨를 살짝 비틀며 손잡이를 잡은 남자의 손목뼈를 내리쳤다.

“윽!”

그리 굵직하지는 않지만 단단한 나무가 도드라진 뼈를 강타하자 순간적으로 어깻죽지까지 저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아픔을 이기지 못한 남자의 한쪽 무릎이 굽어진 사이, 아르사크는 움푹 들어간 오금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휘청거리던 손이 흙바닥을 짚은 순간, 아르사크는 손가락 사이에 단검의 손잡이가 끼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의 손등을 있는 힘껏 밟았다.

“으악, 잠깐!”

“잠깐이라니, 재롱이라도 부리려고?”

남자는 그제야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을힘을 다해 밟힌 손을 빼낸 남자는 손가락 사이에 걸치다시피 한 검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아르사크는 순간적으로 발을 물렸지만 날카로운 칼끝이 발목에서부터 정강이뼈를 따라 살갗을 얇게 그었다. 섬뜩한 통증이 느껴진 순간, 아르사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들고 있던 막대로 남자의 귀 옆을 후려쳤다.

시커먼 몸뚱이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울어지자, 아르사크는 그의 어깨를 걷어차 뒤로 넘어뜨리고는 훤히 드러난 흉곽을 막대 끝으로 있는 힘껏 찔렀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단단한 것이 부러지는 감촉이 피부 밑에서부터 막대를 타고 치솟아 올랐다. 남자는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입가에 거품을 문 채 기절하고 말았다.

“아르사크 님!”

골목 끝에서 로즈안나의 다급한 목소리와 철컥거리는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경비대 서너 명이 횃불을 들고 달려왔다가 아르사크의 얼굴을 보고서는 기겁을 했다.

“화, 황후 마마! 어째서 이런 곳에……!”

“긴말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자를 당장 궁으로 데려가라.”

“예? 주, 죽었습니까?”

“죽었으면 파묻으라고 했겠지, 데려가라고 했겠어?”

아르사크가 짜증스럽게 묻자 병사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축 늘어진 남자를 추슬렀다.

“아르사크 님, 다치지 않으셨어요?”

“난 괜찮아. 우리도 어서 황궁으로 돌아가자.”

“알겠습니다.”

숨을 고르며 일어서던 아르사크는 시큰거리는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아르사크를 부축한 로즈안나는 그제야 땅바닥에 고인 질척한 액체가 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르사크 님!”

“소란 떨지 마, 로즈. 많이 안 다쳤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경비병!”

남자를 데려가던 경비병 중 한 명이 로즈안나의 부름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도 역시 아르사크의 발밑으로 줄줄 흘러내린 피를 보고는 기절초풍할 것 같은 기세로 등을 돌려 대었다.

남의 등에 업히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지만, 다친 다리로 말을 타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아르사크는 어쩔 수 없이 병사에게 신세를 져야 했다.

“골목 초입의 주점에 내 말을 맡겨두었으니 찾아오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마마.”

“아르사크 님, 지금 말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맙소사, 어떡해, 피가… 아르사크 님!”

“로즈… 소리 지르지 마. 그렇게 많이 다친 게 아니라니까. 네가 소리를 치니 오히려 머리가 더 아픈 것 같아.”

아르사크가 말했다. 로즈안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을 문지르며 부지런히 병사의 뒤를 따랐다.

아르사크와 로즈안나가 사라진 것은 이미 에리히의 귀에까지 들어가 있었다.

곳곳에 불을 밝힌 채 발칵 뒤집힌 황궁으로 들어갔을 때, 로즈안나는 에리히가 누구 하나를 홧김에 죽이지나 않을까 싶어 덜덜 떨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아르사크의 다친 다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핏줄기가 뚝뚝 떨어져 융단을 적시는 것을 보고 있던 에리히가 말했다.

“…황후를 당장 방으로 모셔가고 치료사를 데려와라.”

이를 꽉 깨문 채 겨우 한 마디를 내뱉은 에리히는 로즈안나가 허둥지둥 절을 하기도 전에 몸을 휙 돌렸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는 뻔한 일이다. 피를 흘려 낯빛이 약간 창백해진 아르사크가 가물거리는 눈을 뜬 채 말했다.

“로즈… 로즈.”

“네, 아르사크 님. 저 여기에 있어요. 왜 그러십니까?”

“폐하를… 따라가. 그자를 죽이면 안 된다고 말씀드려. 지금 바로.”

“네? 지, 지금요?”

“그래. 어서. 절대로 죽이면 안 된다고 말해. 더 중요한 것을 알아내야 한다고. 그자가… 그자가, 틸이 말한 슈로터라는 자일 거야. 틀림없이.”

로즈안나는 도무지 내키지 않았지만 충직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사크는 그제야 맥이 풀린 채 까무룩 잠에 빠지듯 정신을 잃었다.

“폐하!”

병사를 따라 복도를 걷던 에리히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로즈안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춤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에리히가 말했다.

“뭐지? 로즈안나.”

“…폐하, 저, 아르, 아니… 황후 마마께서… 폐하께, 꼭 전달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어물거리지 말고 빨리 말해라.”

에리히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사크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람은 로즈안나 자신이었다. 그런데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아르사크가 다치기까지 했으니 에리히가 화를 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로즈안나는 긴장한 나머지 딸꾹질이 나올 것 같은 호흡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말했다.

“아르사크 님을, 저렇게 만든… 범인을, 지금 죽이시면… 안 됩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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