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그 애는 지금 잠들었어요.”
“급한 일이에요. 정말로.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해야 해요.”
“글쎄, 이런 밤중에 급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이오? 내일 해가 뜬 뒤에 와도 되잖소!”
남자는 소리를 지르면서도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여자들은 도둑 떼나 강도의 끄나풀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문을 더 세게 당기자 발이 낀 로즈안나가 작게 아얏,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아르사크의 손이 앞으로 확 뻗치더니 세찬 힘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억!”
외마디 비명을 지른 남자의 몸이 앞으로 휘청 기울어졌다. 아르사크는 한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받치더니 별로 힘들 것도 없다는 듯이 그의 몸을 쑥 밀어 일으켜 세웠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남자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드는데, 소란에 잠이 깨었는지 안쪽에서 두 여자가 등불을 들고나왔다.
“오빠… 뭐야? 무슨 일이야?”
“아니, 여보… 이 사람들은 누구예요?”
“아, 저기, 그게…….”
“실례하겠소.”
나직하고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있는 목소리에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로즈안나가 문을 닫자, 아르사크는 그제야 얼굴 전체를 덮고 있던 베일을 머리 뒤로 넘겼다.
“아!”
올케의 뒤에 바짝 붙은 채 겁먹은 눈을 하고 있던 틸이 조그맣게 숨을 삼켰다. 이윽고 그녀의 오빠와 그 아내 역시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황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화, 화… 황후, 마, 마마.”
틸의 오빠는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아르사크는 바닥에 꿇어앉은 세 사람을 약간 난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일어나시오.”
“저, 제, 제발… 제발 용서를. 어, 어두운 데다 그게, 자, 잘 보이지 않아서 그만… 제발…….”
“일어나라니까. 이럴 시간 없다고.”
아르사크가 약간 짜증스럽다는 듯 말하자 세 사람은 다시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틸은 치맛자락을 밟아 휘청거렸고, 그녀의 올케는 시누이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느라 불 켜진 램프를 놓칠 뻔했다.
우왕좌왕하던 그들은 급한 대로 나무 의자를 끌어다 아르사크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곧장 앉지 않고 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틸이니?”
“네? 아, 어, 저기… 네, 그… 그렇습니다. 마, 마마.”
“너에게 물어볼 것이 좀 있어서 왔어. 널 죽이거나 끌고 가지 않을 테니까 그만 떨고 이리 와서 좀 앉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대는 황후다.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이미 귀족의 저택에서 하녀로 일하며, 귀족들이 얼마나 쉽게 횡포를 부리고 사람을 궁지까지 내모는지 질리도록 봐온 틸이었다.
지금은 저렇게 말하지만 조금이라도 기분이 수틀리면 자신 같은 여자애 정도야 아무런 감흥도 없이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틸은 벌벌 떨면서 아르사크의 앞에 섰다. 의자가 있었지만 차마 앉지는 못했다. 감히 황후와 마주 앉는다는 것은 그녀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아르사크는 틸이 앉기를 기다리다가 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앉으라니까.”
“저, 저는, 서, 서 있어도… 괜찮습니다. 마, 마마. 감히… 황후 마마와 마주 아, 앉을 수는 없어요.”
“내가 앉으라고 하면 앉아도 괜찮아. 내 앞에서 앉는 건 안 되고, 내가 너를 올려다보게 하는 건 괜찮니?”
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지켜보던 로즈안나가 다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오빠가 가져다준 의자에 겨우 엉덩이를 걸친 틸은 스커트를 거의 다 쥐어뜯을 기세로 움켜쥐면서 잔뜩 움츠린 눈으로 아르사크를 바라보았다.
“저, 제, 제게… 하, 하실 말씀이라는 것이…….”
“네가 얼마 전까지 홀드빅 자작의 저택에서 일했다지?”
틸의 입술이 잠깐 멍하니 벌어졌다. 나이답지 않게 각질이 허옇게 일어난 입술이었다.
아르사크는 이들의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성인 셋이 먹고살기에 오빠의 벌이가 턱없이 부족하리라. 틸이 하녀로 취직해 돈을 벌 일도 이제는 요원해졌으니 막막할 것이다. 아르사크는 약간 안타까움을 느꼈다.
“황후께서 하문하셨다. 대답을 하라.”
곁에 서 있던 로즈안나가 말했다. 틸은 그제야 그녀가 낮에 만났던 길 잃은 소녀임을 깨달았다. 그때는 정말로 도시에 처음 온 시골 여자아이 같았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허룩한 옷을 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졌다.
틸이 말했다.
“마… 맞습니다, 마마. 얼마 전에… 해고를… 당했지만요.”
“소문을 들으니 네가… 자작가에서 도둑질을 해서 해고를 당했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아, 아니에요!”
틸이 갑자기 소리를 치자 저만치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녀의 오빠 내외는 동시에 비명을 삼켰다. 틸도 뒤늦게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죄, 죄송합니다. 마마. 제가…….”
“사과는 그만해. 괜찮으니까.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너는 왜 쫓겨난 거지? 자작이 갑자기 너를 해고한 이유를 솔직하게 말해봐. 하나도 빼놓지 말고.”
틸이 정말로 루이제의 행방을 알고 있는지, 그녀가 해고된 사실이 그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홀드빅 자작가에서 최근 일어난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일련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이 한 점으로 이어진다는 명확한 증거가 필요했다.
“저어, 그, 그건… 그 이유는…….”
“잘 들으렴.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야.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기까지 직접 찾아올 일도 없었겠지. 그러니 숨길 생각은 하지 말고 전부 다 말해야 해.”
우물쭈물 망설이던 틸은 긴장을 감추지 못한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건… 편지 때문이었어요.”
“편지? 무슨 편지?”
“그게… 루, 루이제 아가씨가… 저기, 화, 황후 마마께… 편지를 쓰, 쓰셨어요. 그걸… 그걸 제가… 제가 봤어요. 저는 그, 그냥… 혹시 아가씨께서 누, 누군가 좋아하는 분이, 생기신 줄만 알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게… 저, 저기, 그, 얼마 전의 그, 소문… 화, 황후 마마께서 저, 정…….”
“정?”
“…정부를 두고 계신다는 소문요.”
빠르고 낮은 속삭임이었다. 말을 마친 틸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아르사크의 눈치를 살폈다. 아르사크의 표정은 무척 심각했고, 틸은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착각해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요, 용서해 주세요, 마마……! 저, 저는 그저……!”
“아니, 아냐. 널 벌 줄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게 아니라, 루이제가 편지에 그런 내용을 썼단 말이야? 확실해?”
“네, 저, 제가… 제가 똑똑히 봐, 봤어요. 그건 확실해요. 그런데… 그런데, 제가 그 편지를 본 걸… 슈로터 님이 아셔서…….”
“슈로터? 그게 누군데?”
“자작님의… 자작님이 가장 가까이 두시는 측근이에요. 무서운… 무서운 분이세요. 소문에는, 옛날에… 사람도 해쳤다는 말이 있어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든 아르사크는 비슷한 표정의 로즈안나와 눈이 마주쳤다.
틸이라는 이 하녀가 쫓겨나게 된 것은 그게 원인이었을 것이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슈로터라는 남자에 대한 말이 사실이라면,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루이제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고 있어?”
아르사크가 묻자, 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가씨는 아프신 게 아니에요.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정말 멀쩡하셨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데 갑자기 요양까지 해야 할 정도로 아프시다니 거, 거짓말이 분명해요.”
“어딘가 갈 만한 곳은?”
“저,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정말이에요. 홀드빅 자작가는 별장이 너무 많고… 게다가 아가씨의 언니분들도 다들 결혼해서 다른 곳으로 가셨고…….”
“그럼 루이제가 어디로 갔는지는 슈로터, 그자밖에는 알 수 없는 거야?”
“마… 마차를 타고 갔으니, 마부도 아마… 알 거예요. 하,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자작가에 드나들 수 없고…….”
“자작가에는 마부가 여럿인가?”
“아뇨, 한 사람뿐이에요. 입이 굉장히 무거운 사람이어서… 아마 아무에게나 행선지를 말해주진 않을 거예요.”
마부가 한 사람이라면 그나마 일이 수월하다. 아르사크는 자작가의 마부를 불러낼 수 있을 만한 일을 생각해보았다.
그때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 님, 곧 경비병들의 교대가 끝납니다. 너무 늦으시면 곤란해집니다.”
“…그래, 알겠어. 틸, 네가 오늘 내게 한 말에 단 한 치도 거짓이 없다고 맹세할 수 있겠어?”
“맹세해요! 정말이에요!”
틸은 당장이라도 아르사크가 자신을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겁에 질린 초록색 눈동자를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던 아르사크는 다시금 베일을 뒤집어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알았어. 이만 가보도록 하지. …밤늦게 실례가 많았소.”
아르사크는 여전히 꼭 끌어안은 채 겁을 집어먹은 틸의 오빠와 그의 아내를 향해 말했다. 그들 역시 틸처럼 어쩔 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르사크는 로즈안나와 함께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지나가던 경비병들이 잠시 힐끔거리며 그들을 바라보긴 했으나 다행히 검문을 하지는 않았다.
“밤중에 몰래 궁을 나간 것을 폐하께서 알게 되시면 정말 화를 내실 거예요, 아르사크 님.”
“그래, 알겠어. 말을 찾아서 얼른…….”
고개를 끄덕이던 아르사크의 말이 갑자기 끊어졌다. 로즈안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아르사크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아르사크 님, 왜 그러세요?”
“…로즈안나, 이런 것도 흔치 않은 경험인데 우리 좀 더 걷다 가지 않겠니?”
“네? 아르사크 님, 대체 무슨……!”
“쉬, 조용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를 따라와. 어서.”
아르사크는 소리 없이, 그러나 단호한 태도로 로즈안나의 등을 밀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어두운 골목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달빛도 없이 새카만 길 위로 좀 더 짙은 그림자 하나가 음습하게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