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독이 있는 열매라니, 그런 것도 있어?”
루이제의 목소리에 호기심이 드러났다. 마치 어린 꼬마처럼 호기심 섞인 눈을 한 루이제를 내려다보던 카르반테는 이상한 표정으로 입술 끝을 살짝 움찔거렸다.
“아가씨가 방금 드신 차에도 그 열매의 껍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루이제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목을 확 쥐었다. 금방 울상이 된 채 어떡해, 어떡해 하는 소리만 연발하던 루이제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이럴 줄 알았어! 역시 날 죽이려고 기다렸던 거지!”
“…독은 씨앗에만 있지만요.”
카르반테가 말했다. 그때까지도 목을 붙잡은 채 나오지도 않는 기침을 캑캑거리고 있던 루이제의 어깨가 서서히 처졌다. 그러고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를 가늠하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이윽고 목소리를 높였다.
“감히 날 우롱해?”
“당치도 않습니다.”
“날 독살하려고 한 줄 알았잖아!”
“정말 독살을 하려는 생각이었다면 독이 있었다고 말씀드리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이전 같았으면 아버지께 고해 목을 어떻게 하겠다느니, 무게 없이 살벌하기만 한 소리를 쫑알거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다만 화난 아이처럼 숨을 쌔근쌔근 몰아쉬다 고개를 팩 돌리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표현의 전부였다. 아버지의 보호로부터 벗어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깨달을 때마다, 루이제는 북받치는 서러움을 참기가 힘들었다.
카르반테는 루이제의 그런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눈치챘다. 걸핏하면 먹히지도 않을 협박을 하던 것이 그날 이후로는 뚝 그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충격을 받아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딱하기도 했다.
하긴 그것 때문에 눅스 노인이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좋으니 산책을 하라고 권한 것이다. 계속 제대로 일어서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눕거나 앉아만 있으면 다리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카르반테는 눅스 노인을 누구보다 잘 따랐고, 그가 생각하기에도 루이제의 변화가 위험할 지경이다 싶었기에 해가 떠 있을 동안에는 후원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물론 감시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당신은 언제까지 날 지키고 있을 거지?”
루이제는 화가 난 것 같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더니, 아버지 생각을 하자 기분이 틀어진 모양이다. 정말 변덕스럽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카르반테는 무심히 대꾸했다.
“명령이 거둬질 때까지는 해야 합니다.”
“누가 당신에게 명령했지? 아버지야?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어?”
“제가 직접 자작님을 만나 뵌 적은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분이 아니시지요.”
“그러면?”
카르반테는 잠시 고민했다.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줘도 괜찮을까. 그러나 알든 모르든, 그녀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똑같을 것이다.
망설이던 카르반테는 감정이 북받쳐 빨갛게 상기된 루이제를 내려다보았다.
“명령을 내리신 분은 저의 아버님이십니다. 아버님께서는 아가씨의 부친이신 자작님의 명령을 받으셨을 테지요. 아버님은 매우 오래전부터 자작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애쓰셨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당신의 아버지라면… 우드하우스 남작? 처음 듣는 이름인데.”
“보시다시피 이곳은 시골 벽지입니다. 수도에서도 쉽게 들으실 수 있을 만큼 가세가 대단치 못합니다.”
“그래서 날 가둬두는 대가로 아버지에게 뭔가 요구할 생각이겠군?”
“아마 그러실 테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루이제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모르는 일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지? 우드하우스 남작이 내 아버지에게서 권력과 부를 하사받으면, 그건 곧 당신의 것이 될 텐데? 당신이 아들이라면서.”
“저는 셋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서자이지요. 권력과 부를 물려받는 것은 저와는 먼 일일 뿐입니다.”
의외였다. 평소 말이 없던 그가 오늘따라 술술 대꾸를 해주는 것도 그랬지만, 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을 개인사를 굳이 루이제에게 알려주는 것도 놀라웠다.
루이제는 눈만 깜빡이면서 잠깐 할 말을 골랐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루이제의 반응은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서자라는 말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잡아챘을 것이고, 얄팍한 동정이나 연민이 섞인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을지도 모른다.
제국법 자체에는 적자와 서자를 차별하라는 내용이 없었지만, 계급의식이 누구보다 강한 귀족들은 서출에게 그리 관대하지 못했다. 차라리 가문을 이을 후손이 없어 입양된 자식이 사교계에서는 훨씬 더 나은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루이제는 카르반테가 서자라는 것을 알고도 예전처럼 철없고 무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생각이 깊어져서라기보단, 자기 자신의 처지가 귀족의 서자인 그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황후의 관을 쓰고 돌아가게 해주겠다는 슈로터의 말을 루이제는 믿지 않았다.
아버지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을 황후로 만들고자 하겠지만, 슈로터는 분명 뭔가 다른 수를 꾸미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자신이 황후가 되기를 바란다면 슈로터가 이토록 무례하게 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정도의 통찰력을 갖출 수 있게 된 것도 루이제에게는 놀랄 만한 변화였다. 루이제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구두 끝으로 발밑의 땅을 툭 걷어찼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루이제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카르반테는 먼 데로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저는 루이제 아가씨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지, 해치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습니다. 아가씨의 신변에는 아무 이상이 없을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누가 그런 걸 겁낸댔나. 루이제는 입술을 뾰족한 모양으로 움츠리면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해가 지고 밤이 깊어지자 야간 경비대가 황궁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르사크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눈만 내민 채 경비병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로즈안나를 재촉했다.
“로즈, 얼른. 지금 나가야 해.”
그러나 로즈안나는 도무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우물쭈물 어쩔 줄을 몰랐다. 참다못한 아르사크가 손목을 붙잡아 당기자, 로즈안나는 질질 끌려오다시피 하며 소곤거렸다.
“아르사크 님! 이러시면 안 돼요!”
“…로즈, 이런 상황에 그런 말을 하니까 내가 널 납치라도 하는 것 같잖니.”
“그게 아니라… 어휴, 정말! 폐하께서 아시면 난리가 날 거예요! 한밤중에 몰래 나가시다니, 절대로 안 되는…….”
“그럼 넌 여기 있어. 나 혼자 다녀올게. 됐어?”
그럴 수는 없다. 로즈안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아르사크를 뒤따라 종종걸음을 쳤다.
로즈안나나 아르사크나 평소에 입던 옷이 아닌, 어느 시녀에게서 얻었을 법한 단출한 차림이었다. 평민들이라면 그럭저럭 외출복으로는 쓸 법하나 도저히 황후와 그 측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복장이었다.
“이렇게 입고 나가셨다가 경비병을 마주치면 어떡하시려고요?”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코웃음을 치면서 팔에 둘둘 감고 있던 베일을 머리 위로 푹 뒤집어썼다.
“기절시키지, 뭐.”
다행스럽게도 아르사크가 경비병을 때려눕혀야 하는 상황은 오지 않았다. 사냥터 숲 초입과 이어진 뒷문을 이용해 성을 빠져나온 아르사크는, 낮에 미리 빼돌려 놓았던 말 위에 올라탔다.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허리를 꽉 붙든 채 벌써부터 겁먹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요, 아르사크 님. 천천히 가세요. 밤중에 아르사크 님과 몰래 빠져나가다 말발굽에 짓밟혀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안 떨어지고 싶으면 좀 더 꽉 잡아. 가자, 스닉.”
쥐고 있던 고삐를 힘 있게 내리치자, 말은 울음소리도 내지 않고 재빨리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따금 흰 갈기가 나무 사이로 눈발처럼 반짝이는 것만 제외하면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허리에 매달리다시피 한 채, 제발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78장 뻗쳐오는 위험 (4)
제법 늦은 시간이라선지 골목은 인적이 드물고 조용했다. 로즈안나가 가리킨 집은 말을 매어 놓을 만한 공간이 없어서, 근처에 있는 조그만 주점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주점의 주인은 괜히 귀찮은 일 말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지만, 아르사크가 내민 금화 다섯 개를 받고는 부리나케 마구간을 내어주었다.
“저, 말에게 먹을 것을 좀 줄까요?”
“됐어요. 배불리 먹었으니 물이나 좀 줘요.”
로즈안나가 대신 대꾸했다. 주인은 손바닥을 비비면서 허리를 굽신거려 가며 아르사크와 로즈안나를 배웅했다.
“아르사크 님, 이런 시간이라면 혹시 잠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깨워야지, 그걸 말이라고 하니.”
아르사크는 무슨 대수냐는 듯이 대꾸하고는 예의 집 앞에 가서 섰다. 어두운 베일로 얼굴을 거의 가리고 있어서, 어지간히 불빛이 밝지 않고서는 얼굴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따금 순찰을 돌며 지나가는 경비병을 힐끔거리던 로즈안나는 아르사크 앞으로 나서며 문을 두드렸다. 묵직한 놋쇠로 된 손잡이를 몇 번 흔들자, 먼지 낀 창문 너머로 불빛이 일렁거리더니 막 선잠에서 깨난 듯한 남자가 부스스한 얼굴로 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오?”
“이 댁에 틸이라는 아가씨가 있는 걸로 압니다.”
로즈안나가 말했다. 남자는 순식간에 잠이 깬 얼굴로 눈을 껌뻑이더니 로즈안나와 아르사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말했다.
“내 여동생인데…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낮에 로즈안나가 찾아왔을 때 그는 일을 하느라 집에 없었다. 당연히 로즈안나가 틸을 만나고 간 것을 몰랐고, 무엇보다도 얼굴을 다 가린 아르사크는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얼핏 봐도 여자라는 것이 분명했지만, 시커먼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어딘지 모르게 도둑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가 경계하듯이 문을 닫으려 하자, 로즈안나는 문틈으로 급하게 발끝을 밀어 넣었다.
“기다려요. 당신의 여동생… 틸 아가씨를 만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