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요. 나도 즐거웠습니다.”
시녀가 귀부인들을 배웅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총총히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아르사크는 문이 닫히자마자 소파에 벌렁 드러누우며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죽는 줄 알았네.”
그 순간 다시 문이 열렸다. 백작 부인이 돌아온 줄 착각한 아르사크가 속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도 들어온 사람은 로즈안나였다. 로즈안나는 팔다리를 활개 치며 소파 위에 뻗어 있는 아르사크를 보고 한숨을 폭 쉬었다.
“아르사크 님, 또 그런 자세로…….”
“안 돼, 로즈. 지금은 잔소리하지 마.”
아르사크가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로즈안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잔소리라니요. 아르사크 님, 제가 언제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언제 어느 때에 누가 찾아올지 모르니 낮에는 항상 몸가짐을…….”
“벌써 다녀갔어! 어휴, 정말. 너까지 이럴 거야? 방금 전에 비스코시 백작 부인이 날 붙들고 몇 시간이나 떠들다 갔는지 알아?”
로즈안나는 짐짓 새침한 표정으로 입술을 실룩였다.
“저야 모르지요. 전 아르사크 님의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이니까요.”
“얄미워 죽겠다니까. 그래서, 그건 구했니?”
“소파에서 일어나시면 알려드릴게요.”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딱 벌렸으나, 그녀가 손에 든 주머니를 내보이며 슬쩍 흔들자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즈, 너 점점 나를 막 대하고 있어. 그거 알아?”
“설마요. 제가 감히 존귀하신 마마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공손한 어조였지만 로즈안나의 얼굴에는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아르사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로즈안나가 내민 주머니를 받아 들어 입구를 열었다. 하얀 소금 알갱이가 다닥다닥 붙은 볶은 견과류 같은 것이 접시 위에 조르르 쏟아졌다. 민가의 작은 장터 같은 곳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간식거리다.
아르사크는 반색을 하며 그것을 한 개 집어 들어 입속에 톡 털어 넣었다.
“맛있다.”
“구하느라 힘들었어요. 오늘따라 이걸 파는 노점이 많지 않더군요.”
“왜 황궁의 주방에서는 이런 걸 만들지 않는 거야?”
“그거야, 황실 요리에서는 소금을 되도록 적게 쓰려고 하니까 그런 거죠. 아르사크 님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건강에 좋지 않아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너도 먹어봐.”
로즈안나는 아르사크가 내민 견과류를 손에 받아 들고는 잇새로 한 개를 깨물어보았다.
소금이 얼마나 짠지 혀끝에서 단맛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참을 씹자 그제야 고소한 듯, 아닌 듯한 맛이 약간 느껴졌지만 소금기로 입 안 전체가 얼얼해질 정도였다.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 님, 이건 너무 짜요. 뭐라도 마시면서 드세요.”
“이건 원래 술이랑 먹어야 하는 거야. 술 마실래?”
“말도 안 됩니다. 대낮부터 술이라니요.”
“대낮에 술 마시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술을 가져오라고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아르사크가 제국의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 건지, 로즈안나가 아리송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찰나였다.
“그나저나, 홀드빅 자작가에서 일했다던 그 하녀는 어때? 찾았어?”
아르사크의 말에 로즈안나는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심부름의 본래 목적은 사실 그것이었던 것이다.
아르사크는 에셴으로부터 최근 홀드빅 자작가의 하녀 중 한 명이 갑자기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명목상으로는 뭔가를 훔쳤다고 하는데, 사용인이 주인의 물건에 손을 대었다가 쫓겨나는 일이야 비일비재한 것이었으므로 특별히 눈에 띌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루이제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에셴이 자신을 위해 일하던 사람을 통해 하녀에 대한 뒷조사를 시켰는데, 뜻밖에도 그녀가 아무것도 훔친 것은 없으며, 자신이 쫓겨난 이유가 루이제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미 없는 루이제 때문에 쫓겨나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로즈안나는 아르사크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을 꺼냈다.
“결혼한 오빠 집에서 잠시 얹혀살고 있더군요. 쫓겨난 후로는 다른 일을 찾지 못했고요. 도둑질을 해서 쫓겨났다는 꼬리표가 붙었으니 하녀로는 더 이상 취직이 어려울지도 몰라요. 길을 묻는 척하면서 들러보았는데, 저를 경계하는 것 같긴 했지만 루이제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아르사크 님의 생각대로 루이제 아가씨는 병 때문에 요양을 떠난 것이 아니라 어딘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보내진 것 같아요.”
그녀는 어지간히 억울한 모양이었다. 어떨까 싶어 슬쩍 운을 떠보았더니,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자신이 쫓겨나게 된 경위를 줄줄이 읊었던 것이다.
자신이 루이제의 방을 청소하다가 편지 더미를 발견했는데, 그걸 몰래 읽다가 흠을 잡혀 쫓겨났다는 이야기였다. 루이제의 행방에 대해서는 자신도 아는 바가 없지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아픈 데 하나 없이 멀쩡하다고도 말했다.
로즈안나는 거기까지 들은 후에 그녀의 집을 나섰는데,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은 기분이 드는 것을 떨칠 수가 없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어요.”
입가에 소금 알갱이를 묻힌 채, 아르사크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숨기고 있는 것?”
“네. 뭔가… 더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누군지 몰랐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아르사크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턱을 괴었다. 루이제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일은 아르사크에게도 중요한 일이었다.
아르사크를 공격하기 위한 소문을 조사하던 루이제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은, 소문의 출처에 홀드빅 자작이 연관되어 있다는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었다.
“내가 가서 만나봐야겠다.”
로즈안나의 눈이 둥그레졌다.
“아르사크 님께서 직접 가시겠다고요? 안 됩니다. 차라리 그 하녀를 궁으로 불러오시는 게…….”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귀족들도 너무 많이 드나들고. 누군가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아르사크 님께서 가시는 것도 눈에 띌 거예요.”
변장을 한다 해도 아르사크의 외모는 눈에 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괜찮아. 불 끄고 보면 어차피 다 비슷해.”
77장 뻗쳐오는 위험 (3)
루이제는 정원 벤치에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구름은 한가롭게 흘러가고, 후원이 좀 작고 꽃이라곤 없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따뜻하고 평온한 것이 나쁘지 않았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서 여전히 그녀를 감시 중인 남자, 카르반테만 제외한다면 어느 별장에 휴양이라도 온 것처럼 느긋한 오후다.
삔 발목이 다 나아 아무렇지도 않게 걸을 수 있게 된 날부터, 카르반테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루이제에게 오후 동안 저택의 후원 주변을 산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전까지는 방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게 지키고 서 있던 것을 생각한다면 놀랄 만한 일이었다.
바깥에 나갈 수 있게 되자마자 루이제는 틈을 봐서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지만, 카르반테가 마치 그림자처럼 뒤를 따라다녔으므로 계획은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수포로 돌아갔다.
하녀 한두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해볼 만할지도 모르지만—적어도 루이제의 생각에는 그랬다.— 자신보다 두 뼘은 키가 커 보이는 남자를 상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렇게 하루 종일 지키고 서 있지 않아도 어차피 아무 데도 못 가거든?”
루이제가 핀잔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카르반테는 눈만 움직여 그녀를 힐끔 바라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모처럼 햇볕을 쬐고 있는데 방해가 되잖아. 저쪽으로 좀 더 물러나.”
숫제 하인을 다루듯 하는 말투였으나 카르반테는 불쾌한 기색 없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가 여기 서 있는 것과 당신이 햇볕을 쬐는 것은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늘이 생긴단 말이야.”
카르반테는 발밑의 그림자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그쪽으로는 그림자가 닿지도 않습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카르반테의 발아래에서 길어지기 시작한 그림자는 루이제가 앉아 있는 방향과는 반대로 뻗었다.
루이제는 심술맞게 뺨을 실룩이며 바닥을 내려다보다 벤치에 등을 기댔다.
“산책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준다더니 딱 달라붙어 감시해서야 무슨 흥이 나겠어? 정취라고는 모르네. 하긴, 그렇게 시커멓고 우락부락한데 우아한 여흥이 뭔지 알 리가 없지.”
“산책은 어르신이 권한 것이라 따랐을 뿐, 제 의지는 아니었지요.”
종알거리던 루이제의 입술이 살짝 다물린다. 어르신이란 루이제의 발목을 보고 간 바로 그 흙투성이 노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단지 시골 늙은이에 불과할 뿐인 그를, 명색이 귀족의 자제라는 카르반테가 그토록 깍듯하게 대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루이제가 물었다.
“대체 그 노인이 뭐길래 그렇게 공손하지? 내가 그토록 말할 땐 듣는 시늉도 하지 않더니, 그 노인이 권했다고 날 밖으로 데리고 나왔단 말이야? 숨겨둔 할아버지라도 돼?”
“할아버지를 숨겨두는 게 가능하긴 합니까? 숨겨둔 자식이라면 또 모를까.”
루이제는 할 말을 잃고 뾰로통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카르반테는 그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고는 지나가듯이 말했다.
“어르신은 어릴 적 제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늘 지혜로우니 반박하지 않고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생명의 은인?”
카르반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 독이 있는 열매를 잘못 먹고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어르신께서 해독하는 법을 알고 계셔서 살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