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싫어요! 그럴 수 없어요!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전 알아야 해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해요!”
“맞소! 우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죽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단 말이오!”
홀드빅 자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본 뒤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차분하게 가라앉힌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요 근래 매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소. 그 이유는… 지금의 황후 마마를 모셔오기 위함이 컸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사람들은 자작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서로 수군거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황후를 데려오기 위해서였다니, 황후는 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오해는 말고 들으시오. 폐하께서는 즉위할 당시부터 수도의 귀족들을 무척 견제하셨소. 물론 그대들은 정치나 귀족들 간의 알력 다툼과 관계없는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겠지만… 어느 황제든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또한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폐하께서는… 뭐랄까, 철저하신 분이오. 매우 철저하셔서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셔야 하는 분이란 말이오. 폐하께서는 귀족들의 세력이 일정 이상 커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셨고, 그리하여 원래대로라면 귀족 가문의 여식을 간택해야 했던 황후의 자리도… 폐하께서 염두에 두셨던 바를 실행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셨소.”
“나리, 황후 마마는 에레벤나께서 간택하시는 게 아닙니까? 어떻게 폐하 마음대로 하신단 말이죠?”
“물론 제국의 고결한 법도에 따른다면 그렇게 해야 하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제국을 수호하시는 에레벤나께서 왜 이국의 여자를 황후로 선택하셨겠소? 그대들은 에레벤나께서 그런 선택을 하시리라 진정으로 믿소?”
어느새 사람들의 표정은 니타니와 비슷하게 혼란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마다 손에 든 것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머리를 쓸어 올리거나 손짓을 하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홀드빅은 그 변화를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음험한 웃음을 흘렸다.
니타니가 말했다.
“그럼, 그렇다면… 자작님의 말씀은… 폐하께서, 신의 뜻을 거역하셨다는 건가요? 황후를…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황후 마마로 간택하기 위해서요?”
“폐하로서도 어쩔 수 없으셨을 것이니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외척이 된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제국을 뒤흔든 역사는 수도 없이 많았으니, 폐하께서는 그 점을 염려하셨음이다.”
누군가 불쑥 끼어들어 외쳤다.
“아니, 하지만 나리!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무엇보다도 고결해야 하는 황후 마마가 아닌가요? 선조들께서는 대대로 신의 뜻을 따르셨는데 폐하께서는요? 고작 그 이국 여자를 위해 신의 뜻을 저버리셨다고요?”
“게다가 지금의 황후 마마라면 얼마 전에 외간 남자를 정부로 두었다고 하던데요!”
“맞아! 그런 여자가 어떻게 제국의 어머니란 말이죠? 귀족들은 대체 뭘 하는 겁니까?”
“이 근처에 사는 이상하게 생긴 놈들도 다 그 여자의 가족들인가요?”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점점 더 험악한 투로 변질되어 갔다. 홀드빅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이미 흥분한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토르갈 부족민들이 사는 곳으로 뛰어가기라도 할 기세였다.
“설마 그놈들에게 돈이고 식량이고 퍼주느라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겁니까?”
“대체 누가 황제의 백성이란 말이에요?”
“그만, 그만들 하시오.”
홀드빅이 말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흥분해 소리치는 것을 겨우 멈추었으나, 일부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이 씩씩거리고 있었다.
“폐하께 불경한 말을 하는 자는 나도 용서할 수 없소. 그러나 큰 고난을 겪었으니 이번 한 번은 감정이 격해졌다 이해하고 넘어가겠소. 폐하께서는 그대들의 고통을 잊지 않으셨을 거요. 황후 마마께서 워낙 부족민들에 대한 보호를 우선하시는 분인지라 당장은 어쩔 수 없지만 곧 그대들의 요구에 응답하실 것이리라 믿소. 그때까지는 자작가에서 그대들을 보살피겠소.”
사람들의 표정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변했다. 일부는 분노를 터뜨리지 못해 갑갑한 표정이었고, 또 일부는 홀드빅에게 무한히 절이라도 하고 싶은 표정이 되었다.
니타니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감싼 채 소리죽여 흐느꼈다. 홀드빅은 니타니의 어깨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힘주어 잡았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폐하를 뵙고 너의 고통을 반드시 말씀드리겠다.”
“…흑,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작님…….”
니타니가 흐느꼈다. 안타까운 얼굴로 지켜보던 아주머니 몇몇이 니타니를 달래며 어디론가 데려갔다. 홀드빅은 남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내 하인들 몇 명을 두고 가겠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그들에게 말하시오. 그들이 내게 곧장 그대들의 말을 전달할 것이오.”
“감사합니다, 나리! 생명의 은인입니다!”
“나리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꾸벅꾸벅 절을 하며 자작의 인품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개중에는 ‘차라리 저런 분이 나라를 다스리셨더라면’이라는 말도 들려왔다.
홀드빅은 그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등을 돌려 마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이마를 짚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그를 향해 슈로터가 말했다.
“주인님의 뜻대로 되셨는지요?”
한참을 소리 죽여 큭큭 거리던 홀드빅이 고개를 들었다. 웃느라 얼굴이 벌게진 그의 눈이 번들거리며 빛났다.
“그래. 어리석은 것들. 그까짓 낟알 몇 톨과 푼돈 몇 닢에 못 하는 소리들이 없더군. 아주 마음에 들어. 이런 자들만 있어 준다면 영지 몇 개가 더 쓸려나가도 좋을 텐데 말이야.”
76장 뻗쳐오는 위험 (2)
“…낳으셔야지요!”
중년 여인의 단호한 목소리가 한낮의 다과 테이블 위를 탕, 내리쳤다. 찻잔을 든 채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아르사크는 느닷없이 들린 그 말에 고개를 휙 돌렸다.
“지금 뭐라고 했지요, 비스코시 백작 부인?”
비스코시 백작 부인이라 불린 여자는 키가 크고 어깨가 다부진 데다 인상이 무척 깐깐했다. 둘러앉은 다른 귀부인 두 명이 아르사크에게 대충 받아쳐 주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르사크는 찻잔의 손잡이를 쥔 채 잠시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가 말했다.
“내가 다른 것을 생각하느라 부인의 말을 놓쳤군요. 뭘 어쩌라고요?”
“황손을 낳으셔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마마.”
“황손…이라고요.”
백작 부인은 벌써 두 시간 동안이나 아르사크를 붙들고 소위 ‘고상한 황후의 자태’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지만 이건 또 느닷없는 말이다.
아르사크는 당황한 표정을 추스르기 위해 잠시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는 시늉을 하고 백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좀 당황스러운 이야기군요, 부인. 나는 아직 결혼한 지 일 년도 미처…….”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마마! 이렇게 건강하고 또 젊으신데요. 외부에서 오신 마마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카툴라 황실은 대대로 자손이 적었답니다. 선대 황제께서도 에리히 폐하와 유레나 황녀님을 제외하고서는 아이가 없으셨지요. 만약 다른 형제분들이 계셨더라면 폐하께서도 좀 더 누그러진 성정으로 자라실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마마. 한시라도 빨리 황손을 낳으시는 것이 마마를 위해서도 좋은 일입니다.”
아르사크는 눈을 한번 굴리고는 다른 귀부인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체격이 무척 작고 고양이 같은 인상의 남작 부인이 비스코시 백작 부인의 눈치를 살피며 거들었다.
“백작 부인의 말씀도 일리가 있지요, 마마. 지금도 마마께 불경한 자들이 많은데… 황손을 낳으시면 감히 더는 그럴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나에게 불경하게 구는 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요? 차라리 불만이 있으면 내게 도전장을 보내라고 하는 게 낫겠네요. 날 이기면 얼마든지 불만을 들어준다는 조건으로 말이에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대체로 이런 말을 하면 로즈안나는 기겁을 하거나 못 들은 척했고, 에셴은 깔깔 웃으면서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다며 같이 농담을 했다.
그러나 원래 보통 귀족들과는 기질이 좀 다른 에셴과, 아르사크의 곁에서 반쯤 길들여지다시피 한 로즈안나와 이 귀부인들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르사크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아니지요, 마마! 그런 식으로는 진정한 지지를 받으실 수 없습니다. 자고로 황후의 자리란 바깥으로는 제국의 안녕을, 그리고 안으로는 황실의 기반을 위해 노력하셔야 하는 자리입니다. 마마께서는 후녀로 계실 때부터 마마를 위협하는 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셨고,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저희는 알고 있어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혼자이신 폐하를 내조로 보필하실 필요가…….”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았습니다, 백작 부인.”
“아니요, 마마는 아직도 잘 모르십니다. 황실의 기반을 탄탄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처이신 마마께서 낳은 황손의 번영이 필수적이랍니다. 만약 마마께서 황손을 낳지 않으시면 곧 불손한 무리들이 폐하께 마마 이외의 후처를 들이시라 압박을 가할 테고… 그렇게 되면 마마께도 좋을 것이 전혀 없어요.”
점점 더 빠르게 쏟아지는 백작 부인의 말을 듣고 있던 아르사크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때에 쓰라고 가르쳐준 에셴의 비법이 있었다.
아르사크는 최대한 애매하게 미소를 띤 채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백작 부인의 충성심은 잘 알겠으니, 고려해 보도록 하죠.”
그리고 아르사크는 그녀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얼른 손끝으로 눈썹 위를 짚었다.
“오늘은 좀 피곤하군요. 이만 돌아들 가겠어요?”
눈치 빠른 남작 부인이 얼른 생긋이 웃으며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마. 오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