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니타니!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니타니는 우물 안에 바가지를 던져 넣은 뒤 사람들이 모인 곳을 향해 달려갔다.
“저게 누구죠?”
눈썹 위로 손 그늘을 드리우며 니타니가 말했다. 마을 어귀에 모여 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 웬 귀족 나리인 것 같은데.”
“또 황제가 어쩌고 하면서 헛소리를 하면 바퀴를 빼버리자고.”
“아서. 병사는 몰라도 귀족에게 대들었다가는 그 자리에서 칼 맞아 죽을지도 몰라.”
달그락거리는 바퀴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마차를 보며 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렸다. 호기심과 적의가 뒤섞인 목소리들이 점차 낮게 가라앉았을 때, 비로소 마차가 마을 입구에 멈췄다. 니타니는 마차의 문에 찍힌 화려한 금박 문양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75장 뻗쳐오는 위험 (1)
마차의 문이 비스듬히 열리고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까마귀처럼 새카만 옷을 위아래로 갖춘 남자였다. 그는 먹잇감을 찾는 것 같은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모여 선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니타니는 그의 입가가 씩 웃듯이 비틀리는 것을 보고 기분 나쁜 오한에 어깨를 움츠렸다.
니타니는 그의 오만한 표정을 보고 마차의 주인이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이윽고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문을 당기자, 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다른 남자가 거드름을 피우듯 천천히 마차에서 내려섰다.
사람들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자, 앞서 내린 검은 옷의 남자가 뒤따라 내린 남자를 정중하게 손짓하며 말했다.
“모그올드 홀드빅 자작님이십니다.”
남자는 슈로터였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홀드빅 자작은 수도의 중앙 귀족으로 로이폰 같은 외곽 영지에서는 만날 일 없는 사람이었지만, 볼핀 후작이 실각한 후 그가 귀족들 사이에서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는 것은 귀 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니타니는 자기들끼리 웅성거리거나 엉거주춤 허리를 굽히는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제를 헐뜯고 비난하던 사람들이 그보다 못한 귀족 앞에서는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모습이 한심하고, 한편으로는 비참했다.
“그대들의 안타까운 소식은 수도에도 널리 알려졌소.”
자작이 말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던 것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기만 했다. 다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대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기대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말이다.
“황제 폐하만이 아니라 수도의 지각 있고 분별 있는 이들은 모두 다 그대들이 겪은 고통을 이해하며 깊이 공감하고 있소. 그대들의 불행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하오.”
“뭣으로 덜어주시렵니까? 설마 귀족 나리께서 우리 같은 시골 무지렁이들에게 일자리라도 주시겠다는 건 아닐 테고요.”
“우리는 당장 먹고살 길도 막막한데, 마음의 위로라니 거참 배가 부릅니다. 오늘 저녁밥은 굶어도 되겠는데요.”
마을 사람들 중 젊은 축에 속하고 입심이 센 남자들이 저마다 퉁명스런 얼굴로 빈정거렸다.
니타니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석상처럼 선 검은 옷의 남자, 슈로터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하게 싸늘해지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당장은 내색하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여차하더라도 이쪽의 수가 훨씬 많으니 어떻게든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니타니는 슈로터가 넓은 가죽 허리띠 사이에 예리한 단도를 두 자루나 숨기고 있다는 것은 몰랐다. 심지어 그 허리띠마저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러나 홀드빅 자작은 역정을 내는 일 없이 빙긋이 웃었다. 마치 이제야 말다운 말을 해볼 수 있겠다는 듯이 놀랍게도 홀가분한 표정이기까지 했다. 자작이 말했다.
“물론 나는 마음만 가지고 그대들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오. 자작가는 그대들을 도울 것이오. 황제 폐하께서도 나로 하여금 그대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라 명령을 내리셨으니 내게는 두 배로 기쁜 일이지. 우리는 모두가 제국의 은혜를 입은 백성이 아니겠소?”
물론 에리히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으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홀드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딘가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수레를 단 짐마차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제법 커다란 수레에는 식량과 여러 가지 물건을 담은 궤짝들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수레를 보자마자 누구에게 빼앗기기라도 할세라 앞다투어 달려들어 짐을 내렸다. 곡식이 든 자루와 채소가 든 나무 상자, 말리거나 염장한 고기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홀드빅이 눈짓하자, 슈로터가 소매 안에서 길쭉한 열쇠를 꺼내어 궤짝 하나의 자물쇠를 열었다. 호기심과 기대에 찬 눈으로 뚜껑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궤짝 안에 든 금화를 보며 와 하는 탄성을 질렀다.
니타니는 이 모든 상황이 다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귀족이 나타난 것도 그랬지만, 식량이나 생필품으로도 구호물자로는 충분할 것을 굳이 금화까지 내어주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사람들의 수에 비하면 그리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상할 정도로 후했다.
사람들이 구호품을 어떻게 나누느냐—정확히는 누가 더 많이 가져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목청을 높여가며 옥신각신하는 동안에도, 니타니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짐마차를 끌고 온 하인들은 아우성을 치며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깔려 죽지 않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줄을 세우고 있었다.
니타니는 자신의 옆에 누군가 바짝 다가와 있는 것을 깨닫고 순간적으로 소스라쳤다. 그는 홀드빅 자작이었다.
“왜 그러지? 너도 가서 식량을 달라고 해야 하지 않느냐?”
자작의 목소리는 은근하게 낮아서, 마치 질척거리는 흙바닥에 발이 쩍쩍 들러붙는 것 같은 불쾌함이 있었다. 니타니는 그에게서 몸을 약간 떨어트리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는 부모님 두 분을 이번 사건으로 잃었습니다. 그러니 입은 저 하나뿐이죠. 사람들이 다 가져간 다음에 남는 것을 가져가도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욕심이 없군. 쉽지 않은 일일 텐데.”
“…….”
“그렇다 하더라도 바라는 것은 있겠지? 말해보라. 네 행실이 갸륵해서 내가 뭐든 들어주고자 하니.”
“저는…….”
니타니는 사람들이 몰려든 수레 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이미 수레는 거진 반은 동이 난 상태였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져가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니타니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고는 자작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폐하를 만나 뵙고 싶습니다.”
홀드빅 자작의 미간이 희미하게 움찔거렸다. 니타니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몰랐다. 자작이 말했다.
“아무나 폐하를 배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유라도 들어보도록 하지.”
실망스러운 대답이다. 그러나 니타니는 됐다고 고개를 젓는 대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수레 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럽고 천박한 고함소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로이폰의 주민들은 특별히 거룩하고 인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제 욕심만 차리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식량과 금화를 자루마다, 주머니마다 쑤셔 넣기 바쁜 마을 사람들의 행동은 니타니의 눈에 무척이나 낯설었다.
차마 그러지 않고 예의를 지키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앞다투어 나선 이들이 수레를 거덜 내기 시작하자 그들도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니타니가 말했다.
“우리 마을이 이렇게 된 건 폐하께서 댐의 보수를 해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작님.”
“댐을 보수하지 않으셨다? 그럴 리가. 영주가 삼 년에 한 번씩 보고서를 올리게 되어 있다. 무언가 착각한 것이 아니겠느냐?”
“아니에요! 영주님께서는 항상 댐을 보수해야 한다고 황궁에 건의를 하셨지만… 황궁에서는 아직 쓸 만하다면 보수할 필요가 없다는 말만 전해져 왔다고 했어요. 특히 폐하께는… 몇 번이나 보고서를 올리셨다는데… 폐하께서는, 다른, 급하게 해야 하는 일이 많다는 답변만 하셨다고… 기다리라고…….”
니타니의 눈에서는 이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홀드빅은 안타깝다는 듯이 눈썹을 찡그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쉽게 돌아갈 줄이야.’
“영주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홀드빅 자작이 말했다. 눈물에 젖은 니타니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지더니, 곧 분노와 슬픔으로 파르르 떨렸다.
그 말을 하는 자작의 목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컸기에, 아우성을 치던 사람들도 일시에 움직임을 멈추고 니타니와 자작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곡식이 든 자루를 안고 있던 누군가 말했다.
“영주님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니…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 마을이 이렇게 된 건…….”
“황궁에서 진작 댐을 보수해 주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란 그런 말씀인가요? 나리?”
홀드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이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니타니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곤란한 상황에서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니타니가 홀드빅에게로 와락 달려들어 그의 재킷을 움켜쥐고 매달렸다.
“자작님! 제발… 제발 폐하를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폐하께서도 이 일을 아셔야 해요!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그렇게 급했다는 거죠? 무슨 일 때문에 우리 마을이 이렇게 되도록 놔둔 것이냔 말이에요!”
니타니가 울부짖었다. 상황을 눈치챈 슈로터가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매섭게 달려들었으나, 홀드빅은 한 손을 들어 슈로터를 막았다. 그러고는 평소의 그였다면 결코 보이지 않았을 인자하고 이해심 많은 표정으로 미소를 띠며 니타니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너의 괴로움이 얼마나 클지 이해하는 바이다. 그러나 폐하께서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셨음을 마땅히 이해해야 한다. 그분은 제국을 다스리시는 황제 폐하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