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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100화 (100/191)

100화

루이제는 울상인 채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곧 숨이라도 넘어갈 사람처럼 끙끙거리고 있었으나 남자는 태연했다.

곧 하녀가 냉수를 가득 담은 대야와 수건을 가지고 왔다. 남자는 하녀를 내보낸 뒤 찬물에 적신 수건을 길게 접어 루이제의 발목에 대었다. 루이제는 기겁을 하며 무릎을 움츠리려 했지만 남자의 손이 부드럽게 그 움직임을 막았다.

“차가워! 차갑다니까!”

“삐었을 때는 차갑게 찜질을 해야 합니다.”

“차가워서 아무 감각도 없어!”

“덜 아프시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군더더기 없이 건조하고 깍듯한 대꾸에 루이제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발목이 냉기로 얼얼해지면서 통증이 잠시 사그라든 후에야 그의 손이 자신의 무릎 위에 얹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이제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숙녀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정말 귀족인 게 맞긴 한 거야?”

남자는 밀려 떨어진 손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반박도 하지 않고 고개만 까딱였다. 아마도 사죄의 의미인 것 같았지만 별 동요도 없는 덤덤한 태도가 루이제의 속을 또 한 번 홀랑 뒤집어놓았다.

하녀가 불러온 치료사는 늙수그레한 노인이었다. 게다가 제대로 된 치료사라기보다는 그냥 동네 노인인 것 같아 보였다.

깔끔한 복장을 차리고 귀족들의 저택을 드나드는 치료사들만 봐온 루이제로서는 믿음직스럽기는커녕, 그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무서울 지경이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노인은 방금 전까지 밭일이라도 하고 온 것인지 손톱 아래에는 새카맣게 흙이 끼어 있었다. 루이제가 냉찜질을 하던 물에 손을 대강 씻은 그는 컬컬한 기침 소리를 몇 번 내고는 삔 발목을 살펴보고 말했다.

“그냥 삐끗했구먼.”

누워있던 루이제가 소리를 빽 질렀다.

“지… 지금 뭐라고 했어… 요! 그, 그냥 삐끗하다니! 난 움직일 수도 없는데!”

노인은 바락바락 목청을 높이는 루이제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소리 지를 힘이 있는 걸 보니 오늘 저녁 한 끼 먹고 나면 후딱 일어나겠수.”

“무, 무슨……! 이, 이런 사람이 무슨 치료사야! 얼른 제대로 된 사람을 데리고 와!”

“눅스 어르신은 이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치료사입니다. 이분보다 더 나은 치료사는 없습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노인은 그의 칭찬도 아랑곳할 것 없다는 듯이 흥, 하는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약을 쓸 것도 없고, 뭐 정 아프다고 하면 저 길가에 난 쇠무릎이나 좀 씹게 하든지. 하지만 좀 주무르기만 해도 금방 나을 테니 염려 놓게.”

그리고 노인은 루이제나 남자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휭하니 방을 나가버렸다.

“어, 어떻, 어떻게… 말도 안 돼. 난 이제 걷지도 못하게 될 거야. 구두도 신지 못하게 될 거야! 발을 잘라내게 될지도 몰라!”

“…발이 잘린 사람을 보신 적이나 있으시고요?”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뜨리려던 루이제는 뜻밖에도 남자가 말을 거는 바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입가에 웃음이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 루이제가 말했다.

“보, 본 적은…….”

“제가 보기에도 그리 심한 부상은 아닙니다. 하루 정도 안정하시면 내일은 걸으실 수 있을 테지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렇게 되지 않으면 책임질 거야?”

어느새 ‘너’에서 ‘당신’으로 호칭이 약간 달라졌지만 루이제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는 잠깐 갈등하는 것처럼 눈동자를 움직이다 화장대 앞에 있던 스툴을 끌어다 침대 발치에 앉았다. 그리고 벌겋게 부어오른 루이제의 발목을 손끝으로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루이제는 이번에야말로 기겁을 했지만, 어쩐 일인지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무, 무슨… 무슨 짓이야.”

“아까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것을 못 들으셨습니까? 근육이 놀랐을 뿐이니, 주무르면 빨리 낫습니다. 못 견딜 만큼 아프시면 약초를 가져오라고 하지요.”

“시… 싫어. 약초 같은 건 안 먹을 거야. 뭐… 뭔지도 잘 모르는데.”

“그럼 어쩔 수 없지요.”

남자는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루이제의 발목을 천천히 주물렀다. 처음에는 긴장한 탓에 발끝까지 힘을 풀지 못하던 루이제도 어느 사이엔가 통증이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침대에 누워있다가 옷도 갈아입지 않았으니 루이제는 당연히 맨발이었다. 남자의 오른손이 조그만 발바닥을 감싸듯이 쥐자 루이제가 꺅 하고 낮게 비명을 질렀다.

“바, 발은… 만지지 마.”

“간지러우십니까?”

“그게 아니라…….”

입술을 오물거리던 루이제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이불 귀퉁이를 마구 뜯다시피 쥐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손이 발목을 가볍게 주무를 때마다 가슴속 어딘가가 콕콕 찔리는 것 같은 기분에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동안 루이제의 발목을 주무르고 있던 남자는 통증이 좀 가라앉았겠거니 생각했는지 손을 떼고 다시 찬 수건을 얹었다.

온기가 돌던 손끝의 감각 대신 차디찬 수건이 닿자 루이제는 질겁을 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신기할 정도로 통증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루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여전히 아픈 것처럼 얌전히 누운 채 남자를 보던 루이제가 말했다.

“당신의 이름을 말해.”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맞닿았다.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이다. 희고 깨끗한 피부를 가치 있게 여기는 귀족치고는 드문 용모였으나 남자에게는 잘 어울렸다. 그가 말했다.

“제 이름을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필요하다면 필요한 거야. 빨리 말해. 그러지 않으면 당신이 내게 함부로 손을 댔다고 아버지께 고할 테니까.”

어지간한 사람이었다면 씨알도 안 먹힐 협박이지만 남자는 의외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치료를 위해서였다고 말한들, 홀드빅 가문의 영애씩이나 되는 아가씨가 자신을 치한으로 몰아붙인다면 사실관계와는 상관없이 명예에 먹칠을 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자신뿐이라면 그것도 별 상관없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그런 문제로 집안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잠깐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은 남자는 낮은 소리로 한숨을 쉰 뒤 루이제를 내려다보았다.

“우드하우스 남작의 아들, 카르반테 우드하우스라고 합니다. 루이제 홀드빅 양.”

* * *

로이폰의 난민들을 위한 임시 거처는 급하게 마련된지라 여기저기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원래 살던 마을 사람들이 상권 이동으로 인해 튈브리크 중심으로 거처를 대거 옮긴 후, 빈 채로 방치되었던 집을 수리하여 살게 되었다.

노숙을 하거나 경계 지역 병사들의 지저분한 천막보다야 나은 환경이었지만, 하루아침에 살던 집과 고향을 잃은 그들에게는 티끌만큼의 위로도 되지 않았다.

“젠장! 이게 뭐냔 말이야! 이런 곳에다 아무렇게나 처박아놓고 감사하라는 거야?”

“누가 아니래? 흥, 황제가 우리를 위해 보상을 할 거라고? 개나 주라지.”

“애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을 게 분명해. 귀족들이란 게 다 그렇지.”

내려앉은 지붕을 고치느라 목재와 짚을 나르던 남자들이 투덜거렸다.

니타니는 벽에 난 구멍을 막고 문을 고정하기 위해 새끼를 꼬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경계 지역에 남았던 난민들까지 이주를 끝내고 나자, 황궁으로 갈 길은 더욱더 요원해지고 말았다.

튈브리크는 큰 상업 도시라 어딜 가나 병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고, 더군다나 마을이 많은 만큼 보는 눈도 많았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빌어먹을, 이런 데다 데려다 놓고 뭘 먹고살란 말인지. 우리더러 고물이라도 주워다 팔라는 거야?”

목재에 못질을 하던 남자가 말했다.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기 싫었는지, 그 옆에 앉아 채소를 다듬고 있던 그의 부인이 핀잔을 주었다.

“먹을 건 수레로 실어다 주잖아요?”

“그러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먹으면서 입 닥치고 있으라는 거야?”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예요?”

니타니는 긴 한숨을 내쉬며 꼬던 새끼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 사람들은 눈만 마주치면 누구하고든 싸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이해할 여유도 없었다. 행복하게 웃었던 것이 마치 전생의 일인 것만 같다.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마신 니타니는 손등으로 젖은 입가를 훔치며 마을 주변의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멀찌감치 보이는 튈브리크의 중심 구역을 제외하면, 외곽 지역은 모두 고만고만한 크기의 마을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토르갈 부족민들이 사는 마을도 있었다.

니타니는 며칠 전, 자신의 뺨을 때리려는 병사를 가로막았던 소녀를 떠올렸다. 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피부색과 눈동자,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 독특한 옷차림이 아니었더라도 그녀가 외국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 소녀가 자신을 위해 나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니타니는 거기에 고마움보다 부담을 먼저 느꼈다.

이국에서 온 황후에 대해 마을 어른들이나 부모님들이 좋지 않은 말을 늘어놓곤 하던 것을 니타니도 몇 번이나 들었다. 황제가 황후의 억지를 거절하지 못하고 그 부족민들에게 집이며 땅, 그리고 엄청난 재산을 내려주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니타니는 황후와 그 부족민들에 대해 크게 악감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제국의 사람들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도록 해줄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날 보았던 소녀의 모습은 호화로운 생활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독특한 옷차림이기는 했지만 그다지 고급스러운 천으로 만든 것도 아니었고, 어찌 보면 수해가 나기 전 로이폰에 살던 사람들과 비교해도 별반 다를 것 없이, 평범하게 살고 있는 듯했다.

토르갈 부족민들이 사는 마을까지 가본 적은 없었지만 이 부근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생활도 자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이나 어른들이 말하던 것처럼, 황제가 막대한 재물을 그들에게 하사했다는 것은 아마도 뜬소문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니타니는 어쩐지 그들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왜냐면, 당연하잖아. 난 아무 잘못도 없이 이렇게 된 거야. 자기들 발로 제국의 백성이 된 그들과는 다르단 말이야. 게다가… 게다가 그 사람들 뒤에는 황후까지 있잖아. 그럼 황제도 그들을 지켜주는 거지. 우리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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