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99화 (99/191)

99화

“우리가 폐하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해야겠소! 대체 왜 막는 거요?”

“그래, 맞아! 감옥에 갇히든 목이 잘리든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라니까!”

울다 지친 니타니 대신 장정 몇몇이 삿대질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병사들은 열 몇 살짜리 소녀에게는 차마 손을 댈 수 없었지만, 상대가 남자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창대를 움켜쥔 병사가 말했다.

“이것 봐, 댁들은 지금 아슬아슬한 상태야. 지금은 폐하께 보호받는 제국의 백성이지만, 폐하의 명을 거역하는 순간 폭도가 되는 거라고.”

“당신들을 가둬두겠다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이렇게 난리들이야?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폐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거라니까!”

병사들이 위협적으로 나오자 앞으로 나섰던 장정들도 움찔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른 니타니가 사람들을 밀치며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이죠? 폐하께서 우리에게 무슨 약속이라도 했나요?”

“이봐, 아가씨. 황제 폐하가 아가씨 소꿉친구라도 되는 줄 알아? 폐하께서 하신다면 하시는 거지, 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

“애초에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데! 황궁에서 댐을 보수할 비용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잖아! 황족들과 귀족들은 수도에서 호의호식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아 이런 꼴이 된 거잖아!”

“아니, 이 계집애가 말이면 단 줄 알아!”

병사의 손이 니타니의 뺨을 후려칠 듯 높이 올라갔다. 그때였다.

“그만 해요!”

앳되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던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난민들은 이상한 옷차림에, 피부색이 가무잡잡한 소녀를 보고 놀랐다. 그러나 병사들은 우물쭈물하며 불만스럽게 입술을 실룩였다.

“뭐야, 넌 이 마을에 살지도 않잖아?”

병사 중 한 명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티리야는 굴하지 않고 사납게 치뜬 눈을 부라리며 니타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뭣들 하는 짓이에요? 부끄럽지도 않아요? 이 나라에서는 병사들이 사람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나요?”

“아니, 네가 무슨 참견이야! 썩 꺼지지 못해?”

“난 참견할 권리가 없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황후 마마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을걸요? 이런 비겁한 일을 보고도 나서지 않았다는 걸 아시면 황후께서는 내게 실망하실 거예요. 그래서 나서는 거예요.”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이 계집애가 막무가내로……!”

“그렇다고 당신에게 이 사람을 때려도 된다는 권리가 주어지는 건 아니죠.”

티리야의 말에 서로 눈치를 보던 병사들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괜히 귀찮은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다는 표정들이었다.

티리야가 누군지까지는 몰랐지만, 그들은 티리야의 외모로 토르갈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부족민들의 정착지에 황제와 황후가 다녀간 전적도 있으니, 만약 티리야를 잘못 건드렸다가 황후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낭패였다. 큰 벌은 받지 않더라도 황족의 눈 밖에 나고 싶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협하던 병사들은 슬그머니 사라졌지만 로이폰의 난민들은 여전히 ‘임시 거처’로 마련된 집을 둘러보며 허탈하게 서 있었다.

“괜찮아요?”

티리야가 조심스럽게 니타니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덜덜 떨고 있던 니타니가 갑자기 소리쳤다.

“넌 뭐야! 왜 방해하는 거야!”

티리야의 표정에도, 다른 사람들의 표정에도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티리야가 말했다.

“난 당신을 도우려고 한 거예요.”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누가 너한테 도와달라고 했어? 저리 꺼져! 꺼지라고! 우리 일에 참견하지 마! 외부인 주제에!”

티리야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소리를 지른 니타니의 눈에도 한순간 후회하는 듯한 빛이 지나갔지만, 티리야는 니타니에게서 천천히 물러섰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들 역시 니타니와 비슷하게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티리야의 행동에 고마워하고 있지는 않았다.

“내가 잠깐 착각했었어.”

티리야가 조용하게 뇌까렸다. 어둡게 가라앉은 밤색 눈동자가 피로와 꺼림칙함으로 물든 시선들을 천천히 훑었다.

“당신들은 원래 이런 인간들이었지.”

티리야는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를 벗어났다. 근처의 마을 곳곳에서는 이제야 아침 식사를 만들기 위해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는 연기가 굴뚝마다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니타니는 멀어져 가는 티리야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 * *

루이제는 오전이 거의 다 지난 시간이 되어서야 멍하니 눈을 떴다. 그토록 오랫동안 누워있기만 했는데도 도통 피로는 가시지 않고 입맛도 뚝뚝 떨어졌다.

“아가씨, 일어나셨나요? 세수하실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하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루이제는 가타부타 대답도 없이 귀찮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리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화창한 햇빛마저도 자신을 약 올리기 위해 누군가 꾸며놓은 것 같다. 날씨가 좋든 궂든, 방 안에만 있어야 하는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 얼굴을…….”

“됐으니까 나가.”

루이제가 쏘아붙이자, 하녀는 어물거리면서도 단정하게 접은 천을 대야 옆에 내려놓고 총총히 방을 나섰다.

보아하니 심사가 조금만 더 틀어지면 대야의 물을 다 엎어버릴 기세였던 것이다. 하녀로서는 물 얼룩이 생긴 카펫을 빨고 바닥을 청소하느니, 차라리 눈치가 둔한 척 내빼는 편이 훨씬 나았다.

어차피 방 안에는 하녀들이 아니어도 루이제가 꼼짝도 할 수 없도록 지키는 남자가 언제나 서 있었으니 걱정할 것도 별로 없었다.

말갛게 일렁이는 수면을 쏘아보고 있던 루이제는 문 앞에 버티고 선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바로 며칠 전에 입을 열었던 것이 루이제의 착각이기나 한 것처럼 하루 종일 한마디 말도 없이 석상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너는… 노예인 거야? 대체 네 정체가 뭐야?”

천을 물에 적시며 루이제가 물었다. 경멸이 뚝뚝 묻어나는 어조였건만 남자는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물을 묻힌 천으로 얼굴을 닦아낸 루이제는 하녀를 부르지 않고 스스로 머리를 묶었다. 손속이 서툴러 여기저기 잔머리가 빠져나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74장 소녀의 우울 (3)

“아버지가 너에게 이런 일을 시키시고 뭘 약속하셨지? 신분? 땅? 아니면 돈? 그것도 아니면 전부?”

루이제는 나이트가운 차림 그대로 침대에서 내려가 그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남자는 꼿꼿이 세운 허리를 굽히지 않은 채 시선만 살짝 내려 루이제를 내려다보고는, 다시 어딘지 모를 먼 곳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보수를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의 말에 루이제가 코웃음을 쳤다.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저는 노예도 아닙니다. 저에 대해 말씀드릴 필요는 없습니다만,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것만큼은 정정할 필요가 있겠군요.”

루이제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틀림없이 덩치만 큰 병사 나부랭이거나 아니면 슈로터가 고용한 용병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가문 운운하는 것을 보면 그리 대단하지는 않아도 작위를 받은 집안 출신임이 분명했다.

수도에 머물지 않는 것을 보면 그리 부유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집안일 테지만 일단은 귀족의 자제인 이상 함부로 해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루이제가 그를 해칠 수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귀족의 자제가, 파렴치하게 숙녀를 감금하다니.”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남자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루이제는 온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찡그렸다.

실제로 그녀를 이곳에 가두고 감시까지 붙인 것은 자신의 아버지다. 파렴치한이라고 그를 욕해봐야 제 얼굴에 침 뱉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쌔근쌔근하는 숨소리만 내쉬고 있던 루이제가 팩 소리가 나도록 몸을 돌렸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리며 어깨가 기우뚱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발끝이 융단 위에서 미끄러지며 발목이 옆으로 뚝 꺾였다.

“아야!”

외마디 비명을 지른 루이제의 몸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융단 위로 넘어진 것이라 크게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발목이 꺾이는 순간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들린 뚝 하는 소리에 루이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남자는 쓰러진 루이제의 몸을 곧장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얼결에 그에게 몸을 기대었던 루이제는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발목을 단단히 삐었는지 자력으로는 설 수가 없었다.

다시금 휘청거리는 루이제를 얼른 팔로 받쳐 안은 그는 들릴 듯 말 듯 한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혀주었다.

“뭐 하는 거야! 나한테 손대지 마!”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던 루이제는 남자의 손이 발목에 닿자 흐느끼는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움츠렸다.

사실 그렇게까지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여태껏 생채기 한 번 난 적 없이 곱게 자란 루이제에게는 발목이 통째로 날아간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충격이었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발목을 몇 번 만져보던 남자는 숙였던 몸을 세우며 말했다.

“치료사를 불러오죠.”

“싫어! 날 혼자 두고 가지 마!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누가 날 죽이러 오면 어떻게 할 거야!”

“…하녀를 불러드리겠습니다.”

“하녀들이 무슨 수로 자객을 막는단 말이야! 안 돼!”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꺼지라며 패악이더니 이제는 가지 말라고 난리를 피운다. 짜증이 날 법도 했건만 남자는 여전히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벽에 달린 줄을 당겨 하녀를 불렀다.

“차가운 물과 수건을 가져와라. 그리고 치료사를… 마을에 내려가서 눅스 어르신을 모셔와.”

하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자의 얼굴과 침대에 누운 루이제를 번갈아 보다가 어디론가 후다닥 뛰어갔다.

0